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법륜스님 UC버클리대 강연회에서

거울닦는 달팽이 2014. 6. 1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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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법륜입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돼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오늘 평화와 환경에 대해서 주제가 주어졌는데요, 먼저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여러분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얘기를 나눠 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두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는 몸이 건강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마음이 행복해야 합니다. 



몸이 건강해야 하는 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첫번째가 공기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없다면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제가 고문을 당해 봤는데요, 두들겨 맞고 뭐 여러가지 고문을 당했을 때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얼굴에다가 수건을 덮어놓고 주전자에 물을 부을 때, 즉 숨을 못쉴 때 그것이 큰 고문이었습니다. 

저는 지난번에, 로스엔젤레스 근교에 저희 수련장이 있는데, 거기 불이 났어요. 수련장에 가는데 한 30분 가까이 바깥에 산불 연기가 꽉 차서 차 안에까지 냄새가 나서 숨을 못쉴 정도로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딴 건 어떻게 피할 수 있는데 숨을 못 쉬는 것은 어떻게 피할 방법이 없더라구요. 나는 이렇게 30분 지나가면 패스해서 지나가면 되지마는, 저 안에 있는 동물들은 어떻게 견딜까 그런 안타까움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귀중한 공기를 점점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공기를 무엇을 위해서 오염시키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물입니다. 
제가 지난달에 34일간 단식을 했습니다. 음식은 34일 먹지않아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데 물은 먹지 않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물은 정말 귀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 물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어떤 것을 얻으려고 우리가 이 생명수를 오염시킵니까? 


세번째는 음식입니다. 
음식을 먹지 못한다면 누구든 백 일 이상 살기는 곤란할 겁니다. 그런데 음식이 지금 여러가지로 오염되고 있습니다. 또 일부 지역에는 음식을 많이 버리기도 하는데 다른 데서는 그 음식이 부족해서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음식을 일부 지역에는 많이 먹어서 비만증으로 오히려 수명이 단축되고 있습니다. 음식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음식이어야 하기도 하여야 하지마는, 건강해질려면은 음식은 적게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단축시키는 비만증이 걸리는 그런 음식을 과다 섭취하고 있습니다. 왜 자기 건강에 나쁜 음식을 과다하게 섭취하는지 무슨 이유로 하고 있는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네번째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연 동물을 보면 운동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노동이 운동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몇 발 걷지도 않고 차를 타고 움직여서 운동 부족으로 건강을 해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또 헬스클럽에 가서 가지도 않는 자전거를 열심히 탑니다. 걸어가야 될 곳을 차를 타고 가면서 헬스클럽에 가서는 움직이지도 않는 제자리에서 열심히 달리기를 합니다. 적당한 노동 그것이 바로 가장 좋은 운동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지나친 운동으로 인해서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선진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동 부족으로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번째는 깊은 수면입니다. 
그것은 긴 시간의 수면이 아니라 깊은 수면입니다. 깊은 수면에 들어가려면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고 심리적인 불안 속에 살고있기 때문에 깊은 수면에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깊은 수면에 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아무리 좋게 방을 꾸미고, 아무리 좋은 침대를 들여놓고 한다하더라도 제대로 잠들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수행이 건강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을 짓고, 좋은 옷을 입고, 많은 음식을 먹고, 이렇게 소위 발전됐다고 하지마는, 사실은 우리 자신들의 건강을 가장 해치는 행위를 계속 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공기를 오염시키고 물을 오염시키고 음식을 과다하게 섭취하고 그리고 운동부족이고 그리고 불면증 그런들이 바로 과연 우리가 잘 살아가고 있는가? 저 산에 있는 짐승들보다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점을 제기합니다. 


두번째로는 사람이 동물과 다르니까 건강만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괴롭지 않고 행복해야 합니다. 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마음을 가져야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을 많이 가지면 행복하다, 지위가 높으면 행복하다, 인기가 많으면 행복하다 이런 생각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것이 갖춰진다면 행복할까요? 

지구상에서 현재 미국이 가장 잘 산다고 합니다. 지구상의 인구가, 인류의 인구가 한 62억 정도 되는데 미국에 3억이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살기를 원합니다. 미국에 가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에 오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요즘 들어와서 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요즘 여행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미국에 지금 여러분들이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합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누가 행복해야합니까? 누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바로 이런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위가 높다고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나는 많은 TV 탤런트들을 상담하고 있는데요, 그들은 인기가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다 하나같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힘들어 해요. 과연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는 300개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큰 나라가 마가다 국이었습니다. 요즘 미국같은 나라죠. 그 나라의 왕의 이름이 빔비사라입니다. 그는 가장 좋은 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가장 값비싼 보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마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가장 이쁜 사람들로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의 부인을 뒀습니다. 그리고 많은 자식을 뒀습니다. 많은 군대도 있었습니다. 높은 성을 쌓았습니다. 거기다 또 많은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괴로웠어요. 너무너무 괴로워서 부처님한테 가서 하소연을 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때때로 마음의 평정을 얻었습니다. 붓다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그는 옷도 버린 천을 줏어서 걸쳤습니다. 신발도 없었어요. 음식도 남의 집에 가서 얻어 먹었습니다. 거지도 세 번 얻어먹는데 붓다는 하루에 한 번 밖에 못 얻어먹었어요. 그는 나무 밑이나 동굴 속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는 어떤 가족하고도 같이 살지 않고 혼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복할 뿐만 아니라 괴로운 사람들을 행복하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가장 지위가 높고 가장 많은 것을 가진 빔비사라왕은 괴로웠고, 가장 갖지 않는 붓다는 행복했고. 그래서 그 괴로운 빔비사라왕이 붓다를 찾아와서 도움을 얻었습니다. 
경전의 어떤 기록을 봐도 붓다가 왕을 찾아가서 뭐 좀 도와주세요 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옷을 달라는 것도 없고요, 절 지어 달라는 얘기도 없고 어떤 뭐 도와달라는 것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왕이 왕궁에다가 음식을 차려놓고 붓다를 초청했을 때 붓다는 오히려 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을 왕궁으로 초대해놓고 그는 괴로움을 상담을 하려고 했는데 붓다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붓다가 있는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산 밑에까지 마차를 타고 갔습니다. 왕이라 하더라도 그는 산 중턱까지 걸어 갔습니다. 지금 인도에 가면 지금도 '빔비사라킹 로드'라고 해서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붓다에게 가서 자기 괴로움을 하소연할 때는 신하가 듣는 것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신하를 두고 홀로 가서 붓다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 남의 것을 뺏습니다. 어딘가 좋은 음식이 있다면 그것은 왕에게로 갑니다. 좋은 보석이 발견돼도 그것은 왕에게로 갑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해도 또 왕으로 갑니다. 그는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더 가집니다. 그래도 그는 괴롭습니다. 그러니 이런것은,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이런것으로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없어도 붓다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면, 없으면 행복해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인도의 극빈층은 다 행복해야 합니다. 아까 저 영상에서도 봤지마는 불가촉 천민이 사는 그 지역에 가면 정말 음식이 없어서 하루 한끼 밖에 못 먹고, 옷이 없어서 그냥 걸레같은 거 걸치고 있고, 정말 맨발로 다닙니다. 그럼 그들이 행복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괴로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길은 다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스스로 또 우리들에게 그 길을 제시한 분이 붓다입니다. 

한 두가지만 예를 들어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상대편을 이해하지 못할 때 심리상태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상대편 행동이나 말이,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다, 쟤가 왜 저럴까 그렇게 될 때 내 마음이 어떻습니까? 내 마음이 답답합니다. 답답하다는 것은 괴롭다는 뜻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내가 이해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난 또.. 그렇게 이해했을 때 마음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시원하다는 것은 괴로움이 사라진다, 행복해진다는 뜻입니다. 
즉 남을 이해하지 못하면 괴로워지고, 남을 이해하면 내가 행복해진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행복해지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이해 안 해주고 있기 때문에 내가 괴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내가 그를 이해하면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여러분들 바다에 가 보셨죠? 바다 보면 기분이 좋죠? 왜 기분이 좋을까요? 여러분들이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산을 좋아하면 역시 행복해집니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면, 바다가 좋습니까 내가 좋습니까? 내가 산을 좋아하면, 산이 좋습니까 내가 좋습니까? 내가 바다를 좋아하고 내가 산을 좋아하면, 내가 행복해집니다. 내가 상대편을 좋아하고 내가 상대편을 사랑하면 내가 행복해집니다. 

근데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괴롭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게 아니라 사랑 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고 그런 남편을 내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한 거에요. 남편이 술을 먹기 때문에 내가 괴로운게 아니고 그 술 먹는 남편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괴로워지는 거에요. 아이가 공부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게 아니고 공부를 안하는 그 아이를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괴로운 거에요. 


하나만 더 얘기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인이고 한사람은 노동잡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동잔지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일이 끝나고 누가 누구에게 돈을 주는지를 보면 됩니다. (웃음) 주는 자가 주인입니다. 받는 자는 노동잡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면, 돈이 아니라도 인사를 하면,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하는 사람이 주인이고 받는 사람이 노동자에요. 객이에요, 객. 

두 남녀가, 남자 여자가 호텔에서 자고 나왔습니다. 누가 매매춘을 한 사람이고 누가 논 사람이에요? 남자가 여자에게 돈을 주면, 남자는 논 사람이고 여자는 매매춘한 사람이에요. (웃음) 여자가 핸드백에서 돈을 꺼내가 남자한테 주면 여자가 놀고 나온 사람이고 남자가 매매춘이에요. 좀 예가, 스님이 할 예는 아니에요. (웃음) 


그러나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주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베푸는 자가 주인이에요. 도움을 받는 자가 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하느님을 찾던, 부처님을 찾던, 관세음보살을 찾던, 어쨌던 달라 그래요. 그러기 때문에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주는 자가 붓다에요. 주는 자가 보디삿트바입니다. 주는 자가 하느님이에요. 

여러분들은, 중생이 되겠느냐? 붓다가 되겠느냐?- 지금 어떻게 마음을 쓸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다 붓다는 되기 싫고 중생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다 중생으로 사는 거에요. 왜? 맨날 달라고만 하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행복하고 싶으면 남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고 싶으면 다른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내가 베풀면 내가 행복해집니다. 내가 누군가를 보살피면 내가 주인이 됩니다. 우린 누구나 다 주인의 길,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못가는 거에요. 

바로 이러한 마음의 원리를 붓다는 깨닫고, 본인이 스스로 그것을 증득하고, 또 우리에게 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분은 종교를 만들려고 한 분이 아니에요. 남에게, 신으로부터 복을 전해주고 전해받는 그런 중재자도, 성직자도 아닙니다. 그건 당시 브라만이 하던 일이었습니다. 붓다는 사제가 아니라 수행잡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종교화 되어있는 불교보다는 진리로서의 붓다- 실제로 누구나 다 그 가르침에 따라 이렇게 행하게 되면 니르바나, 그 행복을 누구나 다 경험할 수 있는 이 길을 그가 가르쳤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존경하고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겁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믿던 그것은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미국 헌법에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간섭해서는 안됩니다. 헌법은 지켜져야지 어겨서는 안됩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분 중에 설령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또는 힌두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남을 이해하는 마음을 내면 행복해지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행복해집니다. 불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을 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면 불행해집니다. 

이것은 종교, 신앙, 이런 것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에서 오는 겁니다. 마음을 어떻게 가지면 행복해지는가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에 어떤 원리가 있습니다. 붓다는 그것을 가르치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 어떤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또 누구나 자기 생각이 옳다고 하는 그런 고집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집이 세서가 아닙니다. 이것이 정신 작용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선 위치, 자기를 중심해 놓고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이크가 있습니다. 여기 지금 손이 있습니다. 
이 마이크를 기준으로 보면 제 쪽에서 보면 손은 제 왼쪽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면 오른쪽에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고집하는게 아닙니다. 내 입장에서 볼 때 그런거요. 그러기 땜에 내가 내 입장만 생각하면 이건 무조건 왼쪽에 있는거요, 이 손은. 여러분들 여러분 입장만 생각하면 오른쪽에 있는거요. 우리가 만약에 자기 입장만 생각한다면,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하고 우리는 싸우게 됩니다. 왼쪽인데 왜 저사람은 오른쪽이라고 그럴까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 입장에 서 본다면 이건 금방 해결이 됩니다. 이것이 오른쪽이라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보이겠다..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나와 다른 상대의 생각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오른쪽이라고 하고, 내가 왼쪽이라고, 상대가 왼쪽이라고, 할 때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이 아니라 이건 서로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어? 나와 다르구나! 이렇게만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툼이 없습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아? 그 편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이해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갈등이 있고, 부모자식 간에도 갈등이 있고, 이웃 간에도 갈등이 있고, 나라 간에도, 민족 간에도, 종교 간에도 많은 갈등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싸움이 되고 전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화로 가는 길은 바로 상대에 대한 인정과 이해입니다. 이런, 마음에 욕심이 없으면 우선 마음이 깨끗합니다. 그리고 욕심이 없으면 상대하고 다툴 일도 없습니다. 자기 의견이 옳다고 고집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또한 상대하고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가 평화로 가는 아주 중요한 지름길입니다. 저는 지금 미국과 북한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지난 몇년 간 계속 노력했습니다. 이쪽에 가면 왼쪽이라고 그러고, 이쪽에 가면 오른쪽이라고 그러고 도-무지 대화가 안됩니다. 그래서 대화를 돕기 위해서, 야, 저쪽 편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봐라,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면 나보고 저 편이라고 합니다. 

부인이 와서 저한테 남편에 대한 불평을 말합니다. 제가 그를 위해서, 남편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좀 해 줍니다. 근데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스님도 남자라고 남자 편드네! (장내 웃음) 

또 부모가 자식 땜에 괴롭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그래서 아이 입장에서 이럴 수도 있지 않느냐, 아이를 이해하라고 말하면 금방 말합니다. 스님이 애를 안 키워보이 그런 소리 하지! 이런 얘기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항상 자기 편을 서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이 안됩니다. 
상대를 이해할 때 해결이 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많은 서로 다른 것들, 서로 다른 인종, 서로 다른 민족,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성별, 뭐 온갖 서로 다른 것들이 이제 하나의 세계 안에서 섞여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됐습니다. 이제 자기 것만 고집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것만 고집하게 되면 계속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자기걸 버리고 상대걸 따라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화단의 꽃들을 보십시오. 종류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그런데도 아름다운 화단을 이루지 않습니까? 그처럼 우리 사람들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얼마든지 조화롭게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것이 옳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옳다! 다른 것은 틀리게 됩니다. 그러면 또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이것이 진리다! 하고 주장하면서 엄청난 갈등과 통념과 전쟁을 만듭니다. 이것이 자기 인종, 자기 민족, 요렇게 단일하게 살 때는 자기 종교만 믿고 살 때는 이게 어느 정도는 용인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열려있고 섞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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