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아름다워~

슬픔이 없는 십오초

거울닦는 달팽이 2016. 11. 5.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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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에 이 시를 듣다가 강렬함에 이끌리어

아침에 일어나 찾아 보았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 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청춘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복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사랑은 나의 약점

당신은 내게 어느 동성애 운동가의 시를 읽어준다
강렬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시를
내 언어가 결코 가닿지 못한 슬픔의 세계
밤하늘의 성좌처럼 선명한게 펼쳐진 시를
나는 고통스럽다
반은 질투심에, 반은 감화되어
그러나 나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한 명의 유순한 독자가 되어

시를 읽고 난 후 당신은 내게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동성애자였다면
이렇게 좋은 시를 쓸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유일한 약점이군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당신의 위트 섞인 선의 아래에는
아주 날카로운 메시지가 숨어 있다
내가 중산층 이성애자 시인이라는 사실
그것은 유일한 약점이 아니라
나의 본질적인 한계가 아닌가?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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