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달팽이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며...

거울닦는 달팽이 2011. 5. 22.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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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2009년, 5월 23일..

이곳에서는 토요일 저녁이었지..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완전 나를 망연자실하게 했던 뉴스...

 

난 그저 컴 앞에 앉아서 

하염없이 소리내어 울수 밖에 없었던 기억뿐이....ㅠ.ㅠ

 

 

 

 .

. 

 

이런 분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구나..라는 기쁜 감격으로 전율케 했었고..

그 이후, 간간히 들려오는 이 분의 행보...(드라마틱 했다..)

난 멀리서 언제나 마음으로 응원하며 지냈었지..

 

그리고, 2007년 우리나라를 방문했을때의 놀라운 발전과 성숙된 분위기와 더불어

그 분을 비난하는 일반인의 여론을 이해 할 수 없어서 의아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결국, 

비열,저급한 MB정권의 정치적 술수에  온몸으로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던 노대통령의 마지막 행보는

 나를 참 많이 울게도 하셨지...ㅠ.ㅠ

.

노대통령의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내겐 마음을 나눌 블로그 친구들과

이곳에서는 전혀 만날 기회가 없었던

마음 통하는 벗들을 만나게 되는 계기도 되어 주었지....

,

,

2년이 흘렀구나..그래...ㅠ.ㅠ

 

.

.

 

오늘 아침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컴에서 검색해 보던 습관처럼

노무현 대통령을 적어 보았다.

 

 

 

아래는 다음 백과 사전의 내용이다. 

 

이 분에 관해 이렇게 정리가 되어 있구나...싶었고...

,

,

 

함께 읽어보며,

이 분의 삶을 반추해보며

깨어있는 시민으로 존재하길

언제든 연대할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옮겨 놓아봅니다. 

 

 

 

 

1946. 9. 1 경남 김해~2009. 5. 23 김해.
인권변호사·정치가.
개요
노무현 /노무현

 

제16대 대통령으로서, 한글 세대의 첫 번째 대통령이다.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인권변호사로 맹활약하며 양심수·노동자의 인권옹호와 권익신장을 위해 헌신했으며,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인 6월민주화운동(1987)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했다. 42세 때 정계에 입문한 뒤 민주민족세력의 정치적 대변자, 노동자·농민·도시영세민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옹호자, 군사독재의 유산인 영·호남간 지역대립 극복을 위한 동서화합의 전도사를 자임하며 남다른 정치 역정을 걸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한국 사회의 비주류(非主流)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극우·보수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반대를 물리치고 21세기의 첫 대통령 선거(2002)에서 승리해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다. 퇴임 후 정치활동을 접고 고향 김해의 봉화마을로 내려가 생활하다가 재임중 친인척 수뢰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중 사저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성장기와 정치 입문
노무현은 8·15해방 이듬해에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뼈저린 가난은 향학열을 자극하는 한편 사회적 불평등에 일찌감치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가정교육을 통해 불의에 대한 저항감을 물려받았다. 입학금이 없어 외상 입학한 중학교 1학년 말, 제4대 정·부통령 선거(3·15부정선거, 1960)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그는 백지동맹을 선동하다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한 해 휴학한 뒤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를 마쳤으며, 지방 명문이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장학생으로 마지막 학업을 마쳤다. 이후 농업협동조합 입사시험에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해 곧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고시 준비생 시절 사상범 권오석의 딸 권양숙과 결혼(1973)했으며, 197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으나 이듬해에 법복을 벗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해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대대적인 반정부세력 소탕작전에 따라 부산지역의 민주인사 22명이 무더기로 구속된 이른바 부림사건(釜林事件)은 노무현이라는 열정적인 인권변호사의 출현을 알렸다. 약 3개월간의 구금과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학생운동가들과의 만남은 치열한 시대정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며, 그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동료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지적하고 군사독재 정권의 전가의 보도인 국가보안법에 대한 재평가를 재판부에 요구했다.
이후 재야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그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등의 주요 시국·노동사건 변론과 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1984),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1985) 활동을 통해 용기 있고 신망 받는 재야 지도자로 성장했으며,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열어(1985) 노동자들의 권익보호와 노동운동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서 6월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같은 해 8월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평화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희생된 거제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사망 사건을 수습하다 제3자 개입, 장식(葬式)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여론의 강한 반발에 힘입어 20여 일 만에 풀려났으나, 변호사 업무정지처분이라는 정치 보복을 당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대중적 지도자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그 해 12월, 12·12사태(1979)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후보의 당선으로 귀착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전국의 거리를 뜨겁게 달구었던 6월민주화운동은 물론 이 운동의 야전사령관 격이었던 그에게도 찬물을 끼얹었다.
이듬해(1988) 4월 그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제13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박해받는 노동자·농민·도시영세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의회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다른 정치인들이 낙선을 우려해 맞대결을 기피하던 신군부 실세 허삼수 민정당 후보의 대항마를 자청해 부산 동구에 출마, 승리함으로써 화려한 정계 입문 의식을 치렀다. 이어 같은 해 11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국회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 이종원 전 법무장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이들의 습관성 '기억상실증'과 위증(僞證)·발뺌에 쐐기를 박으며 궁지에 몰아넣어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불굴의 정치 역정
그러나 국민적 각광을 받는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된 그에게 보수적인 정치·언론 풍토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옹호하며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1987. 12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행한 연설)고 한 발언으로 언론의 포화를 맞은 그는 1989년초 국회 5공비리·광주특위 증인 출석을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이를 다시 거둬들였다.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의 집권 민정당, 김영삼의 제2야당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간의 이른바 '3당합당'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민주화 국면을 일거에 뒤집고 국민을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2개의 국민'으로 갈라놓았다. 그는 이를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부산·경남의 정치적 맹주인 김영삼과 결별했다. 그는 3당합당을 거부한 일단의 통일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소수야당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이후 1991년 지방의회 선거에서 야권이 참패하자 제1야당인 신민주연합당(평민당의 후신)과의 통합을 성사시켜 통합야당 민주당의 대변인, 부총재로 활약했으며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허삼수 민자당 후보와 재대결했으나 강한 지역감정에 밀려 재선에 실패했다. 그의 패배는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그대로 재연되었다.
그의 좌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14대 대통령 선거(1992)에서 김영삼 집권 민자당 후보에게 패한 뒤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이 지방의회 선거 직후인 1995년 9월 정계에 복귀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그는 이를 야권분열로 규정하고 김대중과 결별했다. 보스 중심의 줄서기와 이합집산을 거부한 결과 그는 이듬해 제15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이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본격 연구하며 자신의 지방분권 철학을 다듬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1997)를 앞두고 자신이 속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구성원들의 의견이 엇갈리자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해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를 이끌었다.
이듬해 서울 종로 보궐선거를 통해 6년 만에 원내입성에 성공했으며, 평생의 꿈인 동서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제16대 총선(2000)에서 부산 북-강서 을에 출마했으나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를 계기로 최초의 정치인 팬 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결성되었다. 이후 그는 해양수산부 장관(2000. 8~2001. 3)을 역임하며 행정가로서 수완을 발휘한 뒤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집권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정치권에 복귀해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나섰다.

 


집권과정
2001년 9월 그는 집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자금도 계파도 조직도 없으며 가진 것이라고는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라는 대중적 평판뿐이었다. 게다가 민주당 주류인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이른바 '이인제 대세론'이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민주당이 당 쇄신안으로 내놓은 대통령 후보 국민참여 경선제는 그에게 절호의 기회를 안겨 주었다.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국민참여 경선제는 당원 외에도 일반 국민이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지금까지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국민을 정치의 장으로 불러모았다. 7만 명 규모의 선거인단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는 일반 선거인단 참여를 신청한 국민이 무려 200만 명을 웃돌 정도로 이 제도는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3~4월 경선 후보 7명이 출마한 가운데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실시된 49일간의 경선 장정 끝에 그는 무려 72.2%의 높은 지지율로 당당히 집권당 후보가 되었다. 특히 영남 출신인 그의 광주 경선 1위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며 동서통합의 가능성을 알렸다. 이후 이른바 '노풍'(盧風)은 대선 정국을 이해하는 핵심어가 되었다. 한편 야당 한나라당도 5월 초 국민경선제로 이회창을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했다.
그러나 경선기간 중 60%까지 치솟았던 그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은 경선 직후 '민주 대연합론'을 내세운 그의 김영삼 방문을 계기로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 비리 관련 구속, 6월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월드 컵 4강 진출 열기에 힘입은 정몽준 대안론의 부상, 민주당의 잇달은 6월 지방의회 선거 참패, 8월 재보궐선거 참패로 20%대까지 떨어졌다. 이에 따라 그는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 상임고문을 중심으로 한 당내 반대세력의 집요한 재경선·후보사퇴 요구에 직면했다. 또한 당권파는 당권파대로 그의 대안으로 정몽준 의원을 내세우기 위해 신당 창당도 불사하겠다고 그를 압박했다. 이어 9월 중순 정몽준 의원의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계기로 그는 후보단일화 압력에 직면해야 했다. 그 사이에 여론조사 지지율은 3위로 떨어졌다.
11월초 그는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에게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를 잇달아 제의하면서 대역전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11월 중순 정몽준 후보와 '정책 중심의 텔레비전 토론 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방식의 후보단일화 원칙에 전격 합의한 데 이어 여론조사 설문 내용을 둘러싸고 양당간의 단일화 협상이 난항을 겪자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전격 수용했으며, 11월말 후보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승리했다. 그 결과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단숨에 앞질러 선거 막판까지 이를 유지했다. 대통령 선거 전날 저녁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갑작스러운 지지 철회도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마침내 12월 그는 민주당 후보 경선 승리, 후보직 사퇴 위기, 야권 후보단일화를 통한 극적 반전 끝에 유효표의 48.9%를 얻어 46.6% 득표율에 그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은 많은 국민들에게 건국 이래 50여 년 간 이어온 보수독점 정치에 대한 국민참여형 새 정치의 승리, 사대외교에 대한 자주외교의 승리, 기득권 세력에 대한 서민대중의 승리, 흑색선전·폭로전에 대한 정책선거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7만 명에 이르는 '노사모'의 자원봉사, 미디어·인터넷을 이용한 선거운동, 희망돼지 저금통으로 표상되는 국민의 자발적 후원금 등 그가 선보인 선거운동은 자금과 조직, 지역주의라는 낡은 방식에 의존한 이회창 후보의 선거운동과 크게 대비되었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당했다.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 이후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과 계속 갈등을 빚어왔는데, 두 정당은 3월 9일 측근비리, 경제파탄, 선거법 위반 등의 사유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제출했다. 결국 3월 12일 열린우리당의 물리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그러자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촛불시위와 시민단체들의 탄핵철회운동이 거세지면서 전국이 탄핵사태로 들끓었다. 이러한 전국민적인 분노의 결과는 4월 15일 제17대 총선에서 나타났다. 노무현을 지지하며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해온 열린우리당이 결국 원내과반수를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또한 5월 14일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어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의 권한을 회복했다. 노무현은 비록 대통령 탄핵 사태에 휘말렸지만 결국 대통령의 권한도 회복하고, 그를 지지하는 열린우리당도 압승하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은 결과가 되었다.
이후 그는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언론관계법·과거사진상규명법 실시, 부동산 가격안정을 위한 부동산세 신설, 미국으로부터 한반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의 개혁 정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숨가뿐 개혁정책은 보수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잇따른 부동산 정책에도 불구하고 집값이 치솟자 서민들마저 등을 돌려 지지율은 더 떨어졌다. 그 결과 여권인 열린우리당은 재·보선 패배에 이어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에 참패하였다. 2007년 이후 열린우리당은 민심을 이유로 그에게 등을 돌린 국회의원들의 탈당으로 2007년 8월 결국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함으로써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그의 정치실험의 동력도 사라지고 말았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은 남북 분단 이후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걸어서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다. 10월 2~4일에 걸쳐 진행된 이 회담은 김대중 전(前) 대통령에 이어 2번째로 이루어진 것으로, 제1차 남북회담의 성과물인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과 통일을 실현하는 데 따른 제반 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북이 공동발표한 10·4 남북정상 공동선언문에는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이산가족 상봉 확대, 서해 공동어로수역 추진, 해주경제특구 설정 등 남북경협 확대, 백두산관광 실시를 위한 백두산-서울 직항로 개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성과를 담았다.
2008 년 2월 25일 노무현은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한국고속철도(KTX)를 타고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함으로써,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또 얻었다. 귀향 후 마을 주변 하천에서 직접 쓰레기를 줍고 습지인 화포천 환경정화 활동을 벌이면서 봉하마을의 주변 환경개선에 주력하였다. 특히 그와 봉하마을 주민들이 작목반을 구성해서 재배한 노무현표 '봉하오리쌀'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불티나게 팔렸다. 이와 같은 활동 덕분에 그는 봉하마을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이 되었는데, 실제로 봉하마을은 하루 최고 1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할 정도로 김해 지역에서는 최고 관광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국가기록물 유출 논란'으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곧이어 형 노건평이 세종증권 비리에 연루된 것이 드러나고, 안희정·이광재·서갑원 등 그가 '동지'라며 애정을 보였던 386 측근들과 박정규 전민정수석 등 참모들이 비리혐의로 수감되었다. 또한 부인 권양숙과 아들 노건호가 30년 정치인생의 후원자였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뇌물 비리사건과 관련하여 검찰의 수사를 받았고, 그 자신도 검찰에 출두함으로써 역대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전두환·노태우 전(前) 대통령에 이어 3번째로 검찰에 소환조사를 받은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2009년 5월 23일 새벽 컴퓨터에 유서를 남기고 사저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서거하였다.
서거 이후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봉화마을에는 수많은 추모객들이 방문하였고, 전국적으로도 시민들이 직접 설치한 분향소를 포함하여 수백 곳의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국민장 7일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서울 경복궁에서 영결식이 진행되었고, 서울광장에서 시민들이 준비한 노제가 열렸다. 유언대로 그는 화장되어 봉하마을에 안치되었다. 그의 서거로 인해 정치권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서거의 원인을 둘러싸고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일부에서는 이로 인한 갈등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저서로 〈여보 나 좀 도와줘〉(1994),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상식 혹은 희망〉(2002, 공저),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행정가와 CEO를 위한 8가지 리더십의 원리〉(2002) 등이 있다.

 

 

 

 

남자, 노무현을 느끼게 해 준 글이어서,

 언젠가 읽고, 보관해 두었던 포스트입니다.

 

  

<노무현과 여성>
[여성 4인 좌담] “노무현은 따뜻한 용맹남, 그리고 매력남”
조회수 : 6944
등록일 : 2011.01.26 13:38






양정철(재단 전 사무처장) : 재단에서 마련한 좌담, ‘노무현과 여성’이란 주제로 네 분을 모시고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고, 그 분에 대한 이해도 깊고, 무엇보다 입심이 좋은 분들을 모셨습니다.(웃음) 장하진 전 여성부 장관님,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님,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님, 최민희 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님. 네 분 다 대통령님과는 인연이 깊죠? 각각의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첫 만남 느낌은 ‘포스’ ‘배려’ ‘겸손’

유시춘 : 87년 6월항쟁이 끝나고 노동자들을 돕다가 구속돼 마산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노 변호사를 면회 가서 처음 봤어요. ‘저 사람, 변호사 맞아?’ 싶을 만큼 농사짓는 분 같은 모습이었는데도, 처음 보는 순간 압도당하는 느낌이랄까, 전율을 느낄 만큼 강렬한 포스가 느껴졌던 기억이 생생해요. 내가 그때 이미 사람을 알아본 것 같아.(웃음)

최민희 : 나는 <말>지 기자 출신인데, 92년 초 <민주광장>이라는 잡지로 옮겨 일할 때 인터뷰를 하면서 뵈었죠.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저희 사무실로 오시겠다는 거예요. 다른 정치인과 참 달랐어요. 첫 인사도 수줍게, 겸손하게 하셨고. 이후 언론문제에 천착하고 직접 용기 있게 싸우는 유일한 정치인이셔서 언론운동 쪽에선 천군만마 같은 분이었어요.

조기숙 : 94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장 하실 때 다른 연구기관 책임자들과의 연대회의에 가서 만났던 게 처음이에요. 회의 끝나고 어떡하다 나만 남아 민방위훈련에 걸려서 못 나가게 됐어요. 대통령님도 후속 일정 때문에 거기 남아 있다가 내가 뻘줌하게 혼자 있는 걸 보고 “혼자 있기 심심할 텐데 같이 얘기나 하자”고 일부러 챙기는 거예요. 정치인이 그렇게 배려하는 걸 보고 참 인상적이었어요.

양정철 : 노무현 하면 많은 여성들이 2002년 대선 시절 장인의 좌익전력 문제로 공격당할 때 “그럼 대통령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아내를 버려야 한다면 차라리 후보직을 버리겠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에 마음을 움직였죠?

최민희 : 상상초월의 답변이고 대응이었어요. 오죽하면 한나라당 지지하는 친정아버지가 “노무현이 대통령 될 것 같다, 니 엄마도 그 얘길 듣고 가슴 설레 한다. 큰 일 났다”고 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조기숙 : 나는 여성이나 부인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정치학자로서 내가 아는 노무현 하면 소신과 의리가 있는 사람! 그런 분의 철학에서 보면 당연한 걸로 봤어요. 오히려 그런 반향이 너무 놀라웠는데….

장하진 : 노무현다운 답변이었죠.

유시춘 : 마음에서 우러나온 얘기지만, 가장 야비한 공격에 대한 가장 따뜻한 대응이었죠.



여성정책과 인사에서 남달랐던 이해와 배려

양정철 : 대통령님 취임 후 여성정책 얘길 좀 해 볼까요?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남성 중심의 우리 사회를 구조적으로 바꾸기 위한 정책적 배려를 많이 했죠? 호주제 폐지, 성매매특별법 제정, 여성가족부 확대개편, 보육정책, 여성 일자리 확대정책 등등. 또 실제로 여성정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보는데 성과를 한 번 짚어 주시죠.

장하진 : 김대중 대통령은 여성정책에 대해 적극적이라는 게 잘 알려져 있지만, 노 대통령은 경상도 사나이란 선입견 등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참여정부 시절에 여성정책의 법적, 제도적 장치를 거의 완성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UN에서도 놀랐어요. 한국의 예를 다른 나라들이 따라 배워야겠다구요. 선진국들은 우리가 이룬 여성정책을 거의 100여년에 걸쳐 이루는데 한국은 그 짧은 시간에 이루는 걸 보고 후진국들이 한국을 따라 배워야겠다고 평가가 아주 좋았어요. 대통령님은 여성정책을 정말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었죠.

여성가족부로 개편하자고 한 분도 대통령님이에요. 당시 보건복지부가 반대했는데. 가족정책과 보육정책이 중요하다, 21세기엔 가족정책이다, 어려우면 가족에 기댄다고 하는데 이젠 기댈 수가 없다, 이젠 한 사람이 아파도 돌볼 사람이 없게 됐다, 여성정책을 너무 작게 보면 안 된다, 이렇게 역설하고 추진한 분이 대통령님이죠. 이명박 정부 인수위에서 여성부 폐지한다고 하니까, 곧 퇴임하실 대통령님이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여성부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해 주신 거 기억나시죠. 결혼이민자정책 갖고 법무부랑 싸울 때도 항상 여성부 편을 들어주셨어요. 그런 점이 제대로 평가됐으면 좋겠어요.

양정철 : 성매매특별법 제정도 대통령님 의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조기숙 : 시행과정에서 반발이나 진통이 컸지만 결과적으로 보세요. 기업의 경우 과거 성 접대 같은 데 쓰이던 음성적 접대예산이 이제 문화공연 티켓 선물이나 건전한 문화후원 쪽으로 이어지고 있잖아요. 기업인들한테 직접 들은 얘기예요.

장하진 : 여성계도 이명박 정부를 겪으면서 뼈저리게 절감하는 것 같아요. 여성정책이 자연적으로 발전한 게 아니라 두 분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는 걸 말이에요. 여성계 지위 향상도 그렇고. 복지정책은 김대중 정부로부터 계승 발전한 것이지만, 보육정책은 전적으로 참여정부 성과거든요. 예산이 3천억원에서 1조3천억원으로 급증했으니까요. 보육의 10년 대계를 디자인했어요.

양정철 : 인사에서 여성에 대한 배려도 컸죠?

최민희 : 언론계나 방송계를 보면 여성이 처음으로 어느 자리를 맡은 게 많았어요. 참여정부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봐요.

조기숙 : 참여정부 출범과 동시에 강금실(범무), 지은희(여성), 한명숙(환경), 김화중(복지) 등 역대 정부 중 가장 많은 여성각료로 시작했죠. 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총리(한명숙), 사법사상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전효숙)과 대법관(김영란) 탄생 등도 참여정부 시절인데, 그 의미가 적지 않죠.

장하진 : 열린우리당 시절 여성의 비례대표 급증도 대통령님 의지가 컸죠. 대통령님이 평소 여성의 정치진출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지금은 대부분 정당이 그렇게 가고 있죠.

노무현의 리더십은 ‘여성적 리더십’이다?

양정철 : 대통령님이 정책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여성에 대한 배려가 많았던 분 아닌가요?

최민희 : 정치인이 시민단체 사람들 만나도 얘기를 건성으로 듣는 경우가 많은데 대통령님만큼은 ‘아, 귀 기울여 내 얘기를 듣고 있구나’라는 걸 느껴요. 특히 여성들이 있으면 일부러 의견을 물어보시기도 하고. 악수할 때도 여자들이 뒤로 좀 빠지려고 하면 대통령님이 먼저 와서 “여긴 서열이 없습니다. 저랑 악수합시다”라고 하시구요. 그러는 남자 정치인 잘 없거든요.

유시춘 : 늘 경청해주는 자세가 있죠. 아마 ‘노무현의 여성적 리더십’의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세심하게 깊이 이해하는 여성적 리더십의 단면….

조기숙 : 청와대 가서 뵈니까 수평적 통합의 리더, 투명한 표리일체의 리더라는 걸 느꼈어요. 저는 일 때문에 싫은 소리를 많이 드린 편이거든요. 특히 “싫어도 이벤트를 좀 하시라”고. 여러 번 깨졌어요.(웃음) 그리고선 마음이 아프신지 주말에 전화를 하세요. 와서 저녁이나 하자고. 미안하다는 말씀도 살짝 비치시면서 마음 상한 게 있으면 풀라고. 또 청와대 좌석은 다 서열이 있잖아요. 그런데 여성이 있으면 다른 서열 깨고 여사님 옆에 앉게 하시고. 말 안 하면 꼭 의견 물어봐주시고.

양정철 : 대통령님의 그런 면모의 배경은 뭘까요?

조기숙 : 그 분의 민주주의 철학 아닐까요? 민주주의는 완성이 없고, 민주주의의 궁극은 문화에 있다고 봤을 때, 문화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니까, 일상의 실천, 일상속의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 같아요.

최민희 : 독서가 아니었을까요. 다방면에 다독이시잖아요. 책을 늘 접하면서 가지고 있는 감수성, 아주 예민한 작가적 감수성과 섬세함이 바탕이 돼서 여성적 따뜻함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장하진 : 그런데 또 굉장히 이성적인 분이잖아요. <여보 나 좀 도와줘>를 보면 노동 인권변호사가 돼 당시 진보적 서적들을 접하면서 ‘여성에 대한 생각을 180도 바꿨다’ ‘그 다음에는 부부싸움도 거의 안했다’고 하시잖아요. 여성에 대해서는 약자에 대한 착한 마음도 있고, 이성적으로 남녀는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면도 있겠죠.

유시춘 : 대통령님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얘기가 있어요. 3당 합당을 거부하고 야인 시절에 꼬마민주당 동지들과 식당을 했잖아요. 그때 근처 음식점 종업원들에게 대통령님 인기가 아주 좋으셨대요. 왠지 아세요? 항상 여성종업원들한테 존댓말을 쓰고, 물심부름 하는 아가씨한테도 존댓말을 썼다는 거예요. 정치인 가운데 자신들을 그렇게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대접해주는 유일한 정치인이었다고 기억한다는 거예요.



노무현은 연인? 남편? 리더? 당신이라면…

양정철 : 여자 입장에서, 남자 노무현의 매력은 어떤 점이란 생각이 드나요?

최민희 : 용맹스럽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어렵더라도 필요하면 딛고 일어나서 하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용맹! 부산에 출마한다, 서울에서 다 버리고 내려간다, 이런 게 가장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유시춘 : 오해하지 마세요. 여성에게 남성은 힘의 상징이거든요.(웃음) 통상의 여성들이 갖기 어려운, 거대한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 절대적 권위에 대한 그리고 옳은 것에 대한 의로운 용기! 난 그거라고 보는데.

장하진 : 나는 진실남을 좋아해요. 편안한 남성. 애인이든 남편이든 그 앞에서 긴장하게 되는 남자는 아주 꽝이야. 앞에 가서 얘기하면 편안하고, 뒤돌아서 나오면 흐뭇한 남자. 대통령님이 그렇지 않나?

조기숙 : 나는 유능한 남자 좋아해요. 노무현만큼 스마트한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회의 때 보면 복잡하고 결론이 나기 어려운 난해한 사안도 착착 갈래를 치고 정리하시더라구요. 지적으로 유능하고, 업무능력에서도 유능한 남자의 매력….

양정철 : 그냥 가정입니다. 리더로서의 노무현, 연인으로서의 노무현, 남편으로서의 노무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면 각각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유시춘 : 난 연인. 좋잖아.

장하진 : 나는 셋 다야.

조기숙 : 나는 당근 리더.

최민희 : 나는 리더. 아니면 그냥 친구.

양정철 : 왜요?

장하진 : 연인이면 재미있을 것 같고, 남편으로는 믿을 수 있는 남자니까. 그런데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리더.

최민희 : 친구라면 수없이 많은 얘기를 자분자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유시춘 : 다들 너무 공익적이야. 그렇게 멋진 남자를 왜 리더로 가져? 연인으로 가져야지.

조기숙 : 아니야. 남편으로는 아내의 희생이 너무 클 것 같아요. 나는 그런 남자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웃음) 여사님만큼 되질 않아. 참모로 모셨던 노무현이 너무 좋아요. 나는 노무현의 참모가 제일 좋고, 그게 가장 영광이에요.

여성들의 눈물, “자기 슬픔과 노무현 슬픔의 동일화”

양정철 : 대통령님 서거 후 500만 조문객 가운데 특히 여성이 눈에 띄게 많았던 걸로 기억납니다. 이유가 뭘까요? 사회학적으로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요?

유시춘 : 서울역에 오셨던 김대중 대통령이 정답을 내놨어요. 여성들이 많고 정말 슬퍼했다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셨냐 하면, “자기 슬픔과 노무현의 슬픔이 동일화돼서 우는 사람들이다” 이렇게요. 사회적으로 별로 성공하지 못한 평범한 여성들, 자신의 삶이 고단하고 슬픈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힘센 놈들 등쌀에 자기 목숨을 내준 노무현의 처지가 자신의 것으로 동일화 됐다는 말씀이겠죠.

문학으로 보면 노무현의 죽음은 희랍 비극의 원형이에요. 불세출의 영웅이나 왕 또는 천재가 주어진 거대한 운명의 벽과 싸우다가 처절하도록 슬프게 명멸하거나 소멸하거나 무너져버리는 것이 희랍 비극의 정의거든요. 여기서 독자들은 어떤 공감을 얻느냐? 그걸 보고 울면서 자기정화 작용을 한다는 것이죠. 거기서 나온 말이 카타르시스에요. 고학력 주류 중심의 사회에서 여러 가지로 비주류인 노무현이 맨 정점까지 올라갔다가, 아직 건재하고 있는 운명적 벽에 좌절돼서 돌아가신 것, 비극의 원형이죠.

최민희 : 나는 이명박 폭정 아래 이뤄진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이 여성의 모성을 자극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효순이와 미선이가 죽었을 때 어느 할머니가 “억울하고 불쌍하다”고 하면서 우시더라구요. 단 두 마디. 억울하고 불쌍하다. 그거 아닐까요?

조기숙 : 임기 말에 어떤 데이터를 보면 대통령님 돌아가시기 전에 여성들의 (노무현) 지지가 남성을 앞질렀어요. 특히 20~30대에서.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주류화, 여성의 진보화, 그리고 젠더갭(여성과 남성의 투표차이)이 10년 전부터 나타났거든요. 그러면서 20~30대가 압도적 지지층이 된 거죠. 우리 사회에 선진국 징후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는데요. 감성적 현상도 분명 있지만 이성적 영향도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하진 : 여성은 전통적으로 소외된 집단이잖아요. 대통령님 돌아가신 것을 자기와 비슷한 처지로 동일시한다는 분석이 일리가 있어요.



마지막 만남, 심장에 남는 처절한 한 컷

양정철 : 네 분 모두 대통령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분들인데요. 가장 심장 깊이 남아 있는 대통령님과의 잊지 못할 추억이나 장면 딱 한 컷을 꼽는다면요?

유시춘 : 누가 물어봐도 나는 죽기 전까지 평생 잊지 못할 일이 그 날이에요. 2009년 4월 30일. 검찰 출두하기 전날. 잘 다녀오시라고 다들 내려갔잖아요. 대통령님이 연거푸 담배 두 대를 피우시고 차 있는 데까지 내려가셨는데, 여사님이 통곡을 하시니까 다시 올라오셔서 ‘괜찮다’고 하시며 위로하셨거든요. 그때 나를 보셨어요. 내게 오셔서 손을 잡으면서 “유 선생 글 봤어요(당시 유시춘 전 위원은 검찰수사에 분개해 ‘나는 노무현이로소이다’를 공개적으로 쓴 적이 있다). 날 변호해줄라고 한 모양인데, 순 억지데”라며 쓱 웃고 가셨어요. 그런데 나는 너무 가슴이 미어져서 차마 아무 말도 못했어요. 그게 마지막이에요. 그렇게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그 날 따뜻한 위로말씀을 더 드리는 건데.(울음) 내가 꿈을 잘 안 꾸는데, 올해 4월 30일에 대통령님이 꿈에 나타났어요. 어쩌면 딱 1년 되는 날.

최민희 : 나도 그 날이에요. 마지막으로 악수하고 한동안 대통령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뭔가 위로를 해야 하는데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대통령님 눈이 참 서글프게 느껴졌는데…. 그 눈빛이 늘 생각나요. 대통령님 뵌 마지막 날이 돼 버렸어요. 그 마지막에 한마디를 못한 게…(울음). 그 애처로운 눈빛이….

장하진 : 그 날은 정말, 너무나 무거워서, 우리도 말할 수 없고 대통령님도 무슨 말씀하시기가 어려웠던 것 같고…. 그날이 참…. 그 전에 봉하를 어떻게 가꾸시겠다고 밝게 말씀하시던 모습과 교차도 되고, 그 전에 여러 가지 앞으로의 얘기를 나눴던 꿈같던 때도 자꾸 기억나고….

조기숙 : 당시 조선일보 왜곡보도 때문에 그날 가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에요.(울음) 서거 얼마 전까지 대통령님과 <진보의 미래> 연구 때문에 비공개 카페에서 온라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요. 제게 주신 마지막 답글, “조 수석, 처음엔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참 따뜻한 사람입니다”라는 문구가 마지막이 돼 버렸어요. 그 후 더 힘들어 하실까봐 말을 걸지 못했는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마지막까지 따뜻한 말을 남기고 가셨어요.

양정철 : 각자에게 너무 아픈 상처를 제가 괜히 꺼냈나보군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이겨내기 힘든 부분입니다. 오늘 네 분과 함께 대통령님을 회고하고 추억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잘 몰랐던 여성정책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여성에 대한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와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푸근한 추억여행, 알찬 평가의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네 분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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