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술

[스크랩] 마음은 내가 아니다 - ( 에크하르트 톨레 )

거울닦는 달팽이 2012. 2. 2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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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내가 아니다 - [에크하르트 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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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ower of Now]       
                          

 

 

 

▣. 깨달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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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요?


 30년 동안이나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해온 거지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한푼 줍쇼.”라는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거지가 내밀고 있는 낡은 야구 모자에는 가끔씩 동전이 떨어졌습니다.


  한 행인이 지나가다가 거지에게 말했습니다.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적선積善도 할 수가 없구려. 그런데 당신이 걸터앉은 그건 뭐요?”
 “이거 말이오? 그냥 낡은 상자일 뿐입죠. 난 늘상 이 위에 앉아 있었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

   만, 어쨌든 난 이 상자箱子 위에 쭉 앉아 있었소만…….”


  행인行人은 상자를 가르키며 말했습니다.
 “한번이라도 그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소?”
 “그건 봐서 뭘 하게요?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안을 한번 들여다시보시구려.”
 행인이 다그쳤습니다. 거지는 마지못해 상자뚜껑을 들어올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상자 안에는 놀랍게도 황금이 가득 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 또한 여러분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야기 속의 행인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것들과 그 내부를 들여다보라고 말할 뿐입니다. 내가 들여다보라고 말하는 것은, 이야기에서처럼 여러분과 분리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自身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내면內面입니다.


 “난 거지가 아니오.”라고 누군가는 항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하다고 해도, 존재의 기쁨과 흔들리지 않는 평화라는 참된 재산을 발견發見하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이야기에 나오는 거지처럼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충만한 기쁨의 조각들을, 자신의 가치나 안전이나 사랑을 외부에서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心外無法]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아니 세상이 제공하는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보물 상자를 우리들 내면에 이미 갖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아무리 다가가도 붙잡을 수 없는 초월의 세계가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와 하나됨으로써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입니다. 어떠한 힘 앞에서도 부서지지 않는 그 무엇, 겉거죽의 나보다 훨씬 위대한 그 무엇에 연결된 상태입니다.

 

내 이름과 모습 뒤에 숨어 있는 본래의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결 상태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단절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각自覺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스스로를 외로운 섬처럼 여기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엄습하고 안팎으로 갈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붓다[Buddha]는 깨달음을 ‘번뇌의 끝’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정의를 좋아합니다. 거기에는 ‘인간성을 뛰어넘어야만 깨달을 수 있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그것이 깨달음에 대한 완벽한 정의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단지 번뇌가 아니라는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더 이상 번뇌가 없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붓다는 거기에 대해서 말이 없습니다. 그 침묵에 담김 알맹이는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일러주기 위해 붓다는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친절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불자들은 깨달음을 붓다만의 영역으로 치부해 버리고, 이번 생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진정한 ‘존재’ 상태란 어떤 것인가요?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무수한 형태의 생명체 너머에는 영원한오직 하나의 생명’ 이 자리합니다. 그것은 저 너머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히 부수어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 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 자신,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생각이 정지 되었을 때만 그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만하게, 강렬하게 집중하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존재 상태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의 헤아림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있음’의 상태에 활짝 깨어 있으면서 그 느낌, 그 앎에 머무는 것이 밝은 ‘깨달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존재 상태란 신의 상태가 아닌가요?  그런데

    당신은 왜 ‘신神’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나요? 


 ‘신’이라는 단어는 수천 년 동안 잘못 사용된 나머지 그 의미가 공허해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말을 아끼는 편입니다. 그 말의 뒤편에 광대하게 펼쳐지는 신성한 세계를 흘깃이나마 엿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태연스럽게 그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부정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신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내가 믿는 신만이 유일한 신이고, 당신이 믿는 신은 거짓’이라는 어리석은 주장과 믿음에 빠지게 됩니다. 심지어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명제를 남겨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신’이라는 말 자체가 닫힌 개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단어를 입 밖에 내는 순간, 인간적인 어떤 이미지가 창조되고 맙니다. 지성으로는 단순히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우리 밖에 있는 누군가를 상상하고, 그럴 경우에는 대체로 남성적인 누군가를 상상하게 마련입니다.


 ‘신’이라고 하든 ‘존재存在’라고 하든, 혹은 다른 단어를 쓰든, 그 말 뒤에 숨은 실재實在를 정의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그 말이 품고 있는 바를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 자체가 본래의 뜻을 방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바깥의 누군가를 내세워 우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존재(being)’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편입니다. ‘존재’라는 단어는 ‘신’이라는 단어처럼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지만, 열린 개념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적어도 그 단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함을 제한된 것으로 축소하진 않습니다. ‘존재’라는 말을 듣고 인간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존재’야말로 당신 자신의 정수입니다. ‘존재’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의 현존  상태를 우선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라고 규정하기 이전의 생생한 ‘있음’ 자체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 ‘존재’라는 단어는 당신 자신의 존재를 향해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존재’상태를 경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同一時시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은 엄청난 고통임에도 우리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생각의 행렬 이 소음이 되어, 내면의 고요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진정한 본질은 내면의 고요한 세계와 일치합니다. 갖가지 생각을 헤아리면서 그런 생각들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아[假我]가 만들어지고 두려움과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가장 기본적인 오류를 범한 셈입니다. 생각을 자기 존재라고 착각한 것이지요.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머릿속 헤아림을 좇아가다 보면 문제와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 미친 듯이 복잡한 세상에 휩쓸리게 됩니다. 세상은 조각조각 부서진 우리들 마음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만물의 배경을 이루는 ‘하나’의 상태에 머물러 전체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깊은 곳의 진정한 자아와 하나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화된 세상 속의 생명력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안팎으로 일어나는 고통과 계속되는 갈등의 끝일 뿐 아니라 멈출 줄 모르는 생각의 끝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노예처럼 구속하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해방입니까!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면 보이지 않는 장막이 생겨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고, 말이나 이미지를 곡해하고 자기 나름의 판단을 내리게 돼, 진정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 장막이 당신과 진정한 당신 사이를, 당신과 당신의 동료 사이를, 당신과 자연 사이를, 당신과 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장막으로 인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여기에 있고 당신과는 전적으로 분리된 ‘다른 것’이 저기에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모습들과 형상들의 차원 밑바닥에서 당신은 진실로 만물과 하나입니다. 생각이라는 장막에 가려 그 본질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망각으로 인해 이런 하나됨의 상태를 자명한 현실로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이 하나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경험을 통해서 확연하게 알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일종의 질병 입니다. 질병은 균형이 무너질 때 생깁니다. 균형이 무너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를 들어, 몸 안의 세포가 분열하고 증식하는 것 자체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몸 전체의 질서와 상관없이 계속된다면, 세포들이 급격히 증가해서 병에 걸리게 됩니다.


 올바르게 사용하면 마음은 아주 훌륭한 도구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대단한 파괴력을 갖게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잘못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우리를 부리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마음을 부리지 못하고 부림을 당하는 것이 곧 병입니다. 나를 내 마음이라고 믿는 것은 환상이요 기만입니다. 부림을 당해야 할 도구가 주인의 자리를 점령하고 만 꼴입니다.

 

 

전적으로 수긍이 가지는 않는군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부질없는 생각

   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얻고 성취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항상 그렇게 마음을 사용해 왔습니다.


 십자말풀이를 하고 원자폭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해서 당신이 마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들이 뼈다귀를 물어뜯기 좋아하는 것처럼, 마음은 늘 문제점을 붙들고 늘어지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십자말풀이나 원자폭탄 만들기에 매달리게 된 이유입니다. 진정한 당신 자신[眞我]은 사실 거기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없습니다.

 

 이쯤에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원할 때면 언제나 마음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마음을 ‘꺼버리는’ 단추를 갖고 있습니까?

 

생각을 완전히 멈추는 것 말인가요? 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생각이 멈추는 경우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마음이 당신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게 점령당하고, 점령한 실체를 당신 자신自身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점령한 실체인 ‘생각하는 자’가 진정한 당신이 아님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이를 알면 당신을 점령하고 있는 실체를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생각하는 자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하는 순간’,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활성화되는 겁니다. 당신은 그제야 생각 너머에는 광대한 앎의 영역이 있으며, 생각이란 단지 그러한 앎의 영역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사랑, 창조력과 기쁨, 내면의 평화 같은 진정 중요한 것들은 마음 너머에서 온다는 것을. 그럼으로써 망각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 당신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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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자를 지켜본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어떤 사람이 의사에게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하면 의사는 그에게 정신병원에 가보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이 머릿속으로 하나 이상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저절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는 독백 이나 대화對話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집니다.


 거리를 걷다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미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단지 입 밖으로 큰 소리를 내지 않을 뿐이지요. 그 목소리는 뭔가 자기 의견을 내놓고, 추측하고, 판단하고, 비교 하고, 불평하고, 좋아하고, 싫어합니다. 그때그때의 특정한 상황에 관련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깝거나 먼 과거를 재현할 수도 있고,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연습하거나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이 잘못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상상 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소위 근심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때로 그 목소리는 시각 이미지나 영상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그 목소리는 가까운 장래에 관한 상황일 때조차 과거에 비추어서 그 상황을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당신의 조건화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란 당신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집단적인 문화의 소산일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겪은 과거 역사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눈을 통해 현재를 보고 판단하면서 완전히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목소리야말로 당신 자기의 가장 큰 적입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대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처벌하여 활력을 앗아가는 고문 도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 질병이 생겨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진정한 해방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가능하면 자주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십시오. 낡은 축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오랜 세월 되풀이해서 들려왔던 사고 유형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라’ 는 의미입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그 자리에 목격자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는 아무런 견해도 갖지 말고 그저 듣기만 하십시오. 아무런 판단도 하지 말고 비난을 퍼붓지도 마십시오. 어떤 판단을 하고 비난을 하면 똑같은 목소리가 뒷문을 통해 다시 들어오는 셈입니다. 목소리가 들리면, ‘아,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할 뿐, 거기에 끼어들지 않고여기에 남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생하게 깨어 있는 것이고, 이것이 자기 자신의 현존現存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이 아니며 마음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당신은 그 생각뿐이 아니라 그 생각의 목격자로서의 자신 또한 의식하게 됩니다.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임에 따라, 그 생각의 저변이나 뒤안에 있는 더 깊은 곳의 당신 자신을, 그 현존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당신을 점령하고 있던 생각은 힘을 잃고 재빨리 자리를 피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거기에 힘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제멋대로 날뛰는 생각의 횡포를 막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자리를 비키면 당신은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심[無心]’의 틈새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틈새가 처음에는 몇 초에 지나지 않겠지만 점차 길어질 겁니다. 무심無心의 틈새를 경험할 때, 당신은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평소에는 마음에 의해 가려져 있던 존재와의 자연스러운 합일감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고요와 평화의 느낌이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사실, 그 깊이에는 끝이 없습니다. 당신은 또한 깊은 내면에서부터 불가사의한 존재의 기쁨이 번져나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무아지경의 상태가 아닙니다. 결코 의식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평화를 얻는 대신 의식이 흐려지고, 고요함을 얻는 대신 활력과 예민함이 줄어든다면 무엇 때문에 그걸 얻으려고 애쓰겠습니까? 내면의 연결 상태 속에서 당신 자신을 생각과 동일시했을 때보다 훨씬 더 또렷이 깨어있게 될 것입니다. 존재의 충만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에너지 장場의 진동 주파수가 높아져서 몸이 더욱 건강해지고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무심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감에 따라, 소위 순수의식의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는 현존하는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고 매혹적이어서 모든 생각과 감정, 육체뿐만 아니라 외부 세상 전체가 상대적으로 무의미해집니다. 순수 의식의 상태는 자기중심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기自己가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당신은 그제야 ‘나 자신’에 대한 예전의 생각들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현존이야말로 당신자신의 진정한 본질이며, 동시에 당신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무엇입니다. 내가 말하는 바가 역설적이거나 모순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는 대신 단순히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흐름 속에 틈새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을 확고 하게 의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마음의 움직임으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거두어들여서 주의를 집중하고 예민하게 깨어 있음으로써 무심의 틈새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상의 핵심입니다.


 이는 일상생활을 계속하면서도 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단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일상적인 활동에 목적을 부여하고 거기에 최대한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그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십시오. 집이나 직장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도 계단 하나하나에, 걸음을 옮겨놓는 동작 하나하나에,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하나하나에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십시오. 손을 씻을 때에도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감각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물이 흐르는 소리와 물이 닿는 느낌, 손의 움직임, 비누의 향기 등을 놓치지 마십시오. 자동차를 탈 때에도 문을 닫은 후 잠시 모든 동작을 멈추고 호흡의 흐름을 지켜보십시오.

 

고요하지만 강렬한 현존의 감각을 느껴 보십시오. 그렇다면 이러한 수행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느끼는 내면의 평화가 어느  정도인지가 그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마음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同一時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음의 흐름 속에서 어떤 틈새를 만들 때마다 의식의 빛은 점점 더 밝아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아이의 재롱을 보면서 미소짓듯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發見할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마음에 의존하지 않게 됨으로써 마음이 지어내는 내용물을 그리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깨달음이란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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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요?


 마음은 도구이며 연장입니다. 마음이란 특별한 과업에 사용되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일이 끝나면 내려놓아도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 중에서 80~90퍼센트는 반복적이고 부질없는 잡념 불과합니다. 더구나 부정적인 성질을 품고 있을 때도 적지 않아서, 대부분의 생각들이 해롭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당신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내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겁니다. 부질없고 해로운 생각들로 인해 소중한 에너지가 새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행렬이란 사실, 중독이나 다름없습니다. 중독이란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중독이란 나보다 더 강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거짓된 즐거움을, 고통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생각에 중독될 수밖에 없나요?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내용물과 활동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멈추면 자신의 존재 또한 끝장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성장함에 따라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기초해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거짓된 자아를 ‘에고[ego]’라고 합니다. 에고는 마음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에고[ego]라는 용어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그 말을 사용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함으로써 창조된 거짓된 자아를 뜻합니다. 에고에게는 현재의 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만을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이는 진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에고로 존재하는 한 우리의 마음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고[ego]는 항상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를 살아 있게 하려고 합니다. 과거가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또한 스스로를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계속적인 생존을 보장받으려 하고 거기에서 어떤 해방이나 만족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에고는 말합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난 행복할 텐데. 저런 일이 생기면 난 평화로워질 텐데.”


 에고[ego]가 현재에 관여하고 있는 듯이 보일 때조차도, 에고가 보고 있는 것은 현재가 아닙니다. 에고는 과거의 눈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현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만들어 내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서 현재를 하나의 수단으로 축소하기 일쑤이지요. 여러분 스스로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자유를 향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분석력과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필요하다면 좀더 집중적으로 좀

   더 분명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마음을 잃어버리고 싶진 않습니다. 생각한

   다는 것은 우리가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죠.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다름없

   을 겁니다.


 마음이 지배하는 단계는 의식의 진화에 있어서 한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마음은 괴물로 자라나 우리 자신을 파괴할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생각과 의식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생각은 의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의식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생각을 딛고 솟아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더 낮은 차원으로, 동물이나 식물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생각하는 마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집중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면의 중얼거림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화롭게,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마음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부릴 수 있게 되고, 무언가 창조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면 시계추처럼 생각과 생각 없음 사이를, 유심과 무심 사이를 몇 분 간격으로 오갈 수 있을 겁니다. 무심[無心]이란 생각의 헤아림이 없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만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죠. 생각은 자기보다 훨씬 더 광대한 의식 영역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힘을 잃고, 혼란에 빠지고, 파괴적이 됩니다.


 마음이란 본질적으로 생존生存을 위한 도구입니다. 다른 마음들과 대적할 때 공격과 방어를 하고, 정보를 얻고, 저장하고, 분석하는 일은 잘하지만 창조적이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예술가들의 창조력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무심의 장소로부터, 고요한 내면으로부터 나옵니다. 마음은 창조적인 충동이나 통찰에 형상을 부여할 뿐입니다. 위대한 과학자들도 생각이 멈춘 순간의 고요한 상태에서 창조적인 돌파구가 열렸다고 말해 왔습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미국의 저명한 수학자들에게 연구 방법을 질의한 결과는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창조적인 활동에 있어서 생각은 부수적인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창조적이지 못한 이유는 생각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을 멈추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과 육체라는 기적이 창조되고 유지되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마음보다 훨씬 더 위대한 지성이 작동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지름이 0.2밀리미터도 안 되는 인간 세포의 DNA가 어떻게 600쪽 분량의 책 100권 정도를 채울 수 있는 지령을 담고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작용하는 지성이 얼마나 광대한지, 그리고 우리의 앎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마음이 그러한 지성과 다시 연결된다면 경이로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마음은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감정이란 마음에 대한 몸의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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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란 무얼까요? 나는 마음보다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더 짙은 것 같아요.


 마음이란 단지 생각만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생각뿐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무의식적인 반응까지 포함합니다. 감정은 마음과 몸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감정이란 생각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공격적이거나 적대적인 생각을 하면, 우리 몸 안에는 분노 에너지가 강화됩니다. 몸이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것이죠.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몸을 움츠리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몸의 반응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강렬한 감정은 신체 내부에 생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화학적 변화가 감정이 가진 육체적·물질적인 면입니다.

 

 대개가 자신의 사고 유형을 모두 다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자신의 감정을 지켜봄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그러한 생각들을 자기 자신이라고 동일시하면 할수록, 다시 말하자면 지켜보는 의식으로서 현존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감정적인 에너지 소비가 더 많아집니다. 감정을 느낄 수 없고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면, 당신은 감정이라는 것을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 육체의 문제나 증상으로써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책이 쓰여진 바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강한 무의식적 감정이 우연처럼 보이는 외부적인 사건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으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고, 또 그것을 표출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은 분노를 품고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신체적인 공격이나 언어적인 폭력을 당하곤 합니다.

 

나는 이런 것을 자주 목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강한 분노를 발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분노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몸 안의 에너지 장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몸이 말하는 바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감정이 말하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당신은 감정이란 몸 안에 반영되는 마음이라고 말했지만, 때로는 감정과 마음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 않나요? 마음은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감정은 그렇다면 하는 식으로 말이죠.


 진정으로 당신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나요? 그러면 몸을 들여다보십시오. 몸은 항상 마음을 충실하게 반영해서 보여줄 겁니다. 몸 안에 일어나는 감정을 바라보거나 느껴 보십시오. 마음과 감정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마음이 거짓이고 감정이 진실입니다. 당신의 감정 상태가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진실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마음상태에 대한 상대적인 진실眞實일 것입니다.


 표면적인 생각과 무의식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무의식적인 마음 활동이 아직 생각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무의식은 항상 우리 몸 안에 감정으로 나타나며, 우리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지켜보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생각을 지켜보거나 귀 기울이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생각은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반면, 감정은 물질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어서 주로 몸 안에서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그로써 감정感情에 지배당하지 않고, 감정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감정 자체가 아닐 수 있습니다. 감정을 지켜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연습하면, 당신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모든 것이 의식의 빛 속에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을 관찰하는 것이 생각을 관찰하는 것만큼 중요한가요?


 그렇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십시오. ‘지금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이 질문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줄 것입니다. 하지만 분석하지 말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내면에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감정의 에너지를 느껴 보십시오. 만일 아무 감정이 없다면 문 안의 에너지 장을 향해 좀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그것이 존재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감정에는 보통 왕성하고 활발한 생각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 에너지가 지나치게 압도적인 나머지 처음에는 그냥 지켜보고 있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감정은 우리를 점령하려 하고, 대개는 그렇게 되고 맙니다. 거기에 휩쓸리게 되면 감정은 일시적이나마 ‘나’가 되어 버립니다.

 

생각과 감정感情은 서로를 돌고 도는 못된 습성이 있어서 서로를 부채질합니다. 일련의 생각들은 감정의 형태를 스스로를 확대하고, 감정의 진동 주파수는 애초의 생각들에 계속해서 먹이를 제공합니다. 감정의 원인으로 인식되는 상황이나 사건, 또는 사람에 대해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런 생각들이 감정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그렇게 에너지를 얻은 감정은 다시 생각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식으로 서로를 키워 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리 자신은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습니다. 모든 감정은 진정한 자신에 대한 인식을 상실함으로써 느끼게 된 애초의 원시적인 감정이 변형된 것입니다. 애초의 그 감정은 성격이 불분명해서 딱히 무어라고 이름 짓기 곤란합니다. 그나마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거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속적인 위협을 느끼는 것만이 ‘두려움’은 아닙니다. 자포자기와 자신의 불완전함을 깊이 느끼는 것 또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이런 감정은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만큼 그냥 ‘고통’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할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하는 주요한 과업 중 하나는 이런 감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싸우거나 그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토록 분주한 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고통을 덮어두는 정도의 성과밖에 거두지 못합니다.

 

사실, 마음이 고통을 없애려고 싸우면 싸울수록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마음은 결코 해결책을 찾을 수 없으며, 당신으로 하여금 해결책을 찾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이죠. 경찰서장이 불을 질러 놓고는 방화범火犯을 찾아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는 일을 그만둘 때까지는 이런 고통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에고[ego]의 옷을 벗어 던져야만 합니다. 에고라는 거짓된 자아[假我]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만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사랑이나 기쁨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설 자리가 없나요?


 사랑과 기쁨은 진정한 자신과 연결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우리 본연의 상태가 곧 사랑과 기쁨의 상태로서 그 감정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의 흐름 속에 틈새가 생길 때면 언제라도 사랑과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잠시나마 심오한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틈새를 경험하는 일이 지극히 드물고, 어쩌다 우연히 경험할 뿐입니다.

 

지극히 아름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육체가 극도로 피곤해졌을 때, 혹은 위기일발의 상황에 처했을 때 마음이 ‘할 말을 잃는’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갑작스럽게 내적인 고요함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요함 속에는 미묘하면서도 강렬한 기쁨이 있고, 사랑과 평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대개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곧 ‘생각’이라는 시끄러운 활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죠.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생각의 지배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전까지는 꽃피울 수 없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 너머 훨씬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감정感情을 완전히 의식하고 느낄 수 있어야만 그 너머의 것들도 느낄 수 있습니다.

 

감정이란 문자 그대로 ‘교란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emotion은 ‘교란하다’라는 라틴어 movere에서 유래된 말).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존재의 심오한 상태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존재와 내적으로 연결된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 상태는 마음 너머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대립이 없습니다. 반면, 마음의 일부인 감정은 이원성의 법칙에 따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악이 없으면 선도 없습니다.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란 고통의 반대편에 있는 쾌락에 지나지 않아서 오래 가지 못합니다. 거기에 사로잡혀서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극단을 오갈 수 있을 뿐입니다. 쾌락은 항상 외부外部에서 오지만 기쁨은 내면內面에서 일어납니다. 오늘 즐거움을 주는 바로 그것이 내일은 고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쾌락이 떠난 자리에는 고통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동안은 즐겁고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위태롭고 중독적인 집착이기 쉬워서, 스위치를 한번 누르기만 하면 완전히 거꾸로 뒤집히고 맙니다. 수많은 ‘사랑의 관계’들을 보십시오. 처음의 도취 상태가 지나가면, 사랑과 증오가 밀고 당기기를 되풀이할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정한 사랑은 갑작스럽게 증오로 변하지 않고, 진정한 기쁨 또한 쉽사리 고통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도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사랑을, 내면의 깊은 평화를, 고요하면서도 진정 살아 있다는 감각을 잠시 잠깐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상태야말로 우리 본연의 모습이지만, 대개는 마음에 의해 흐려져 있기 일쑤입니다.


 중독된 사랑의 관계 속에서도 오염되고 부패되지 않은 어떤 순간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잠시뿐이고, 마음의 방해로 곧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매우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혹은, 그것은 단지 부질없는 환상이었을 뿐이라는 마음의 속삭임에 설득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을 잃으려야 잃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래 처해 있던 상태의 일부이기 때문에 마음에 의해 가려질 수는 있지만 파괴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이 잔뜩 흐려 있을 때에도 태양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태양은 여전히 구름 뒤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붓다는 고통이나 번뇌가 욕망이나 집착에서 생겨나며, 고통

    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탐욕은 순수한 존재의 기쁨 대신 외부 세상과 미래에서 구원이나 만족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나와 나의 마음을 동일시하는 한 그러한 탐욕, 욕구, 바람, 애착, 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런 것들과 분리되면 ‘나’는 존재하지도 않게 됩니다. 단지 어떤 가능성, 어떤 충족되지 못한 잠재력, 아직 뿌려지지 않은 씨앗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유나 깨달음에 대한 바람조차도 미래의 만족이나 완성을 위한 또 다른 집착에 불과합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깨달음을 ‘성취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존재存在하십시오. 마음을 지켜보는 자로서 남아 있어야 합니다. 붓다의 말을 인용하는 대신 붓다[Buddha]가 되십시오. ‘붓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 대로, ‘깨어난 ’가 되십시오.


은총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온 인간들은 시간과 마음의 영역에 묶여 충만한 존재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영겁의 세월 동안 고통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스스로 근원根原과 이어지지 못하고, 서로에게 이어지지 못한 채, 우주를 떠도는 무의미한 조각들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을[Ego] 자신自身이라고 여기는 한 

 영적靈的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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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 Now]" 중 [양문 刊]
 

 

 

 

                                  어떠한 일도 과거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

                                  과거의 일도 지금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떠한 일도 미래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

                                  미래의 일도 지금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 Eckhart Tol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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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목탁소리 지대방
글쓴이 : 난 행복하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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