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술

틱낫한의 치유교실]

거울닦는 달팽이 2013. 2. 2.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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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의 치유교실]

숨쉬기, 걷기, 놓아버리기

호흡은 우리를 몸으로, 느낌으로 그리고 생각(mind)으로 돌아오게 하는 경이로운 수레다. 마음 모아 숨쉬기(mindful breathing)를 활용할 줄 알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는다. 숨쉬기는 우리가 날마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마음 모아 숨을 쉬지 않고, 그래서 자기 몸과 느낌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 여기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이 명상수련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만 우리는 삶을 깊이 경험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순간순간 깊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수련이다. 마음 모아 숨쉬기를 잃는 것은 이 순간을 잃는 것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빨래하면서, 먹으면서 마음을 모을 수 있다. 지금 여기로 돌아와 삶을 깊이 경험하는 방법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방법들에 마음 모아 숨쉬기가 포함된다. 마음 모아 숨쉬기에 닻을 내리면 언제라도 수련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인생을, 지금 여기에서만 살 수 있는 우리 인생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마음 모아 숨쉬기가 모든 마음-모으기 수련의 바탕이다. 마음 모아 숨쉬기를 연습할 때 우리는 마음을 몸으로 데려와서 진정한 현존을 이룬다. 마음-모으기 에너지 안에는 우정과 자애로운 친절의 기운이 들어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에게나 남에게 친절할 수 없다. 어느 정도 동정심(compassion)을 기르지 않고서는 누구에게도 친구가 되어줄 수 없다.

마음 모아 숨쉬기를 수련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몸과 느낌과 생각 그리고 지각(知覺)에 참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 자기 자신과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들하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가족이나 친구들과 화해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보살펴야 한다. 자기 말을 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의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일이다.

[통증 알아차리고 잠재우기]

우리는 저마다 몸이나 마음에 어느 정도 질병을 안고 있다. 가장 좋은 치료법은 모든 것을 멈추고 지금 여기에 온전히 현존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몸과 마음을 스스로 치료한다. 우리가 호흡에 주의를 집중할 때 들숨과 날숨이 편안해지고 느슨해진다. 마음 모아 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을 때, 벌써 치유가 시작된다.

심한 통증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느슨하고 편안한 들숨과 날숨으로 돌아가면 도움이 된다. 그래도 통증이 느껴지면 그것에 휘둘리는 대신 통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통증과 싸우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한 부분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우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아픔, 짜증, 질투가 모두 우리의 한 부분이다. 그것들이 일어날 때 들숨과 날숨으로 돌아감으로써 그것들을 잠재울 수 있다. 편안한 호흡이 그 강한 느낌들을 잠잠하게 해줄 것이다.

느낌이 잠잠해질 때 우리는 고통의 뿌리를 볼 수 있고,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 또한 고통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고통당할 때 자기만 아프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행복한 줄 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도 많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를 따름이다. 깨어서 숨 쉬는 것으로 우리는 마음-모으기 에너지를 생산하고, 우리 자신의 고통과 다른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누구한테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성을 내어 앙갚음하려고 마음먹을 수도 있고 반대로 스스로를 자비심과 이해심으로 달래며 평화로운 마음을 먹을 수도 있다. 나중 방식을 취하면 다른 사람도 역시 아파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러면 분노도 소멸될 것이다.

[깊은 휴식]

몸이 평화롭지 않으면, 격렬한 감정에 휘둘리면, 호흡이 편안할 수 없다. 마음 모아 숨쉬기를 수련할 때 우리는 호흡이 더 고요해지고 깊어지고 조화로워지고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본다. 마음 모아 숨을 쉬면 우리 마음이 호흡으로 돌아가고, 계속하면 온몸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우리 몸으로 돌아가 그것과 화해한다. 그리하여 우리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슨 탈이 났는지, 어떤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 몸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는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음 모아 숨쉬기를 통해서 우리는 자기 몸을 집으로 인식한다.

숨을 들이쉬며, 내 몸을 알아준다.

숨을 내쉬며, 내 몸한테 웃어준다.

자기 몸을 알아주고 자기 몸한테 웃어주는 것은 아주 잘하는 짓이다. 하루에 10-15분 정도 시간을 내면 치유를 위한 깊은 휴식(deep relaxation)을 경험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편안하게 앉을 장소를 찾거나 바닥에 누워도 좋다. 자리를 잡았으면, 호흡으로 돌아간다.

숨을 들이쉬며, 내 들숨을 알아준다.

숨을 내쉬며, 내 날숨을 알아준다.

우리는 누워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몸을 있는 그대로 두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거기 있어보는 기회를 몸한테 주는 것이다. 이것이 전적인 휴식이요 자기 몸을 사랑하는 수련이다.

온몸에 의식을 집중하고 나서 몸의 여러 부분들에 의식을 모을 수 있다.

숨을 들이쉬며, 온몸을 알아준다.

숨을 내쉬며, 온몸의 긴장을 풀어준다.

정수리에서 시작하여 발가락으로 마칠 수 있고 거꾸로 발가락에서 시작하여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 의식을 한 데 모아, 몸의 어느 부분이 거기 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마음 모으기 에너지로 그 부분을 감싸주며 긴장을 풀고 푹 쉬게 해준다.

그런 다음, 몸의 각 부분에 의식을 모은다.

숨을 들이쉬며, 정수리가 거기 있음을 알아준다.

숨을 내쉬며, 정수리한테 웃어준다.

몸의 각 부분마다 들숨 한 번, 날숨 한 번 쉴 수도 있고 각각 열 번씩 쉴 수도 있다. 이렇게 몸의 모든 부분들을 훑어나간다. 마음 모으기 광선으로 몸 전체를 정밀하게 촬영하는 것이다.

숨을 들이쉬며, 눈이 거기 있음을 알아준다.

숨을 내쉬며, 눈한테 웃어준다.

나는 자주 눈의 긴장을 풀어준다. 눈이 긴장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웃음이 좋은 이유가 여기 있다. 웃음은 얼굴의 긴장을 풀어준다. 우리는 몸의 여러 부위에 따스한 웃음을 선물할 수 있다.

우리 얼굴에는 근육이 수백 개나 있는데 화를 내거나 겁이 날 때 그것들이 잔뜩 긴장한다. 하지만, 숨을 들이쉬며 그것들을 알아주고 숨을 내쉬며 그것들한테 웃어주면 긴장이 풀어지도록 도울 수 있다. 그래서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얼굴이 전혀 딴판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웃음 하나가 기적을 부를 수 있다. 나는 자주 눈의 긴장을 풀어주고 눈한테 웃어준다. 그냥, 당신 눈이 거기 있음을 알아주고 그 눈한테 사랑스런 미소를 보내주어라. 참으로 놀라운 물건이 우리 눈이다.

그런 다음, 귀로 간다.

숨을 들이쉬며, 내 귀가 거기 있음을 알아준다.

숨을 내쉬며, 내 귀한테 웃어준다.

이번엔 어깨로 간다.

숨을 들이쉬며, 내 어깨가 거기 있음을 알아준다.

숨을 내쉬며, 내 어깨한테 웃어준다.

이렇게 어깨를 쉬게 해주고 굳어지지 않도록 풀어준다.

이번엔 폐로 간다. 폐를 안아준다.

숨을 들이쉬며, 내 폐가 거기 있음을 알아준다.

숨을 내쉬며, 내 폐한테 웃어준다.

폐는 수고가 참 많다. 게다가 나는 그에게 늘 신선한 공기를 주지도 못한다.

이번엔 심장이다.

숨을 들이쉬며, 내 심장이 거기 있음을 알아준다.

숨을 내쉬며, 내 심장한테 웃어준다.

내 심장은 밤낮없이 두근거리며 일한다. 나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폐와 심장을 돌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온몸을 마음-모으기 빛으로 정밀 촬영하면서 각 부위를 알아주고 안아주고 웃어준다. 온몸을 고루 방문하여 마음-모으기 에너지를 전해주는 데 10분에서 20분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천천히 각 부위에 웃어주는 것으로 그 부위의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문제가 있는 부위에는 더 오래 머물면서 알아주고 안아주고 웃어준다. 마음-모으기 에너지로 거기를 안아주고 웃어주어 긴장이 풀어지게 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통증이 있을 경우에는 마음-모으기가 그것이 육체적 통증일 뿐임을 알게 해줄 것이다. 그렇게 깨어 있음으로써 우리는 더 많이 느긋할 수 있고 더 속히 치유될 수 있다.

[목적과 수단을 나누지 않기]

마음 모아 걸을 때 우리 걸음은 더 이상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밥 먹으러 부엌으로 갈 때 우리는 마음을 모아 “난 지금 밥 먹으러 부엌으로 간다.”고 말한다. 그때에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서 목적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없다. 행복이 그 길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없다. 깨달음이 그 길이다.

마음 모아서 걸을 때마다 우리는 깨달음의 행위에 참여한다. 자기가 걷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모든 발걸음마다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 설거지를 하는 것이 깨달음의 행위일 수 있다. 설거지야말로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인지!

[아픈 느낌을 돌보기 전에]

마음 모아 육신 돌보는 법을 알았으면 이제 당신은 느낌들의 영토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느낌에 관하여 명상한다는 것은 그 때문에 기분이 좋든지 나쁘든지, 아니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든지, 아무튼지 간에 일어나는 느낌들을 모두 알아차리는 것이다. 아픈 느낌들을 돌볼 수 있기 전에 우리는 먼저 아프지 않은 느낌들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붓다는 아픈 느낌들을 상대할 수 있기 전에 기쁘고 행복한 느낌들을 만들라고 권한다. 외과의사가 환자를 수술할 때 환자 몸 상태가 너무 약하면 먼저 휴식을 취하고 영양을 보충한 뒤에 수술하듯이, 우리도 고통을 상대하기 전에 기쁨과 행복의 기반을 든든히 다져둘 필요가 있다. 기쁨과 행복은 우리 의식 깊은 곳에 씨앗으로 들어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우리는 기쁨으로 명상을 시작할 수 있다.

숨을 들이쉬며, 내 안에 기쁨의 씨앗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숨을 내쉬며, 내 안에 있는 기쁨의 씨앗한테 웃어준다.

숨을 들이쉬며, 내 안에 행복의 씨앗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숨을 내쉬며, 내 안에 있는 행복의 씨앗한테 웃어준다.

[등지고 놓아버리기]

우리의 고통을 상대할 충분한 힘을 기르기 위하여 필요한 기쁘고 행복한 느낌을 어떻게 불러올 것인가? 먼저 할 일은 풀어주는 것이다. 놓아버리는 것이다. 등지고 놓아버리는 데서 기쁨이 생겨난다.

우리가 뉴욕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에 산다고 생각해보자. 거기서 우리는 소음, 매연, 먼지 등으로 고통을 받는다. 그래서 아마도 주말에 시골로 도피하고 싶을 것이다. 한두 시간 걸려 도시를 떠날 수 있으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렇게 시골로 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언덕과 숲과 구름과 파란 하늘을 보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고, 아예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면서 그 아름다운 것들을 경험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과 행복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몇 주 안에 우리는 다시 파리나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시골에서 처음 며칠 동안은 무척 행복하지만 그 기쁨과 행복을 오래 간직하며 맛볼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집이 있다고, 홈 스위트 홈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파리나 뉴욕으로 돌아가 거기서 또 기쁨과 행복을 맛본다. 우리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것은 다시 따분함과 답답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왔다 가고 갔다 오기를 되풀이한다. 현대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별장을 가지고 있어서 한동안 환경을 바꾸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한다.

기쁨과 행복은 무상(無常)하다. 그것들을 오래 지속시키려면 먹여서 길러야 한다. 먹여 기르는 법을 모르면 곧 죽고 만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기쁨과 행복을 붙잡아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들은 먹여 기르거나 치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잠재의식 바닥에 있는 깊은 아픔을 바꿔놓을 만큼 충분히 깊고 강하지는 못하다.

[표면 아래]

바다 수면 아래엔 고요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래에는 숨은 조류(潮流)가 흐른다. 우리의 수련이 깊어져서 선조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고통 뭉치에까지 닿지 못하면 잠시 동안의 고요를 즐길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흐르는 세월과 함께, 숨어 있는 고통 뭉치는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종류의 기쁨과 행복에 매달리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애초에 문제를 안고 출발했거니와 무엇이 우리의 진짜 문제인지, 진짜 고통인지를 모른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어쩌면 우리 아버지가 겪은 고통이고 그것을 유산으로 우리에게 물려준 것일 수 있다. 어머니는 자기 고통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었고, 그래서 그대로 우리에게 물려준 것이다. 피상적인 수련으로는 우리 의식 깊은 바닥에 깔려 있는 고통을 다른 것으로 바꿔놓을 수 없다.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 감추어진 고통을 밝혀내어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고통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고통의 탓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돌리며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자기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나 문제가 따로 어디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말한다. “우리 집 식구들은 서로 존중할 줄 모른다.” 또는 “이 공동체는 여전히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세상에는 그런 문제들이 많이 있다. 자기의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우리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자신에게로 돌아가 자기 고통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껴안아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일에도 얼마쯤 고통이 따를 것이다.

아시아에는 맛이 쓴 오이가 있다. 베트남어로 쓴 맛을 ‘코오’(kho)라고 한다. 코오는 괴롭다는 뜻도 된다. 쓴 것은 괴로운 것이다. 이름을 제대로 붙였다. 평소에 쓴 오이를 먹지 않았다면 그것을 처음 맛볼 때 무척 괴로울 것이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이 있다. 비록 맛은 쓰지만 먹으면 신선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쓴 오이’를 ‘신선하게 해주는 오이’라고 바꿔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입맛을 신선하게 해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쓴 맛은 여전하다. 쓴 오이를 먹는 사람들은 그 맛을 즐긴다. 쓴 맛이 몸에 좋다는 사실, 쓰긴 하지만 맛이 있고 그래서 몸에 이롭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놓아버리기]

어느 날 붓다가 제자들과 숲에 앉아 있는데 한 농부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방금 잃은 암소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그가 붓다 일행에게, 이리로 지나가는 암소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붓다가 대답했다. “아니, 이리로 지나가는 암소를 보지 못했소. 다른 데로 가보는 게 좋겠소.” 농부가 사라지자 붓다가 웃으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참 복된 사람들이군. 잃어버릴 암소가 없으니.”

종이에 자기 ‘암소들’ 이름을 적어보는 수련방법이 있다. 그것들이 과연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 하나하나 짚어보는 거다. 그렇게 해서, 여태까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깊이 들여다보니 오히려 진정한 기쁨과 행복에 장애가 되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독일의 한 사업가가 우리 수련모임에 왔다가 잃어버린 암소와 농부 이야기를 듣고는 크게 웃었다. 내가 그에게 다음 모임에도 참석할 것을 권했다. 그런데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대답이었다. 당장 이태리로 날아가서 처리할 업무가 있다고 했다. 이튿날 나는 사람들 틈에 앉아있는 그를 보았다. 의아해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묻자, 이태리로 가다가 중간에 유턴했다는 것이었다. 움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암소 한 마리를 놓아버린 것이다. 그는 참으로 행복해보였다.

[마음 모으기]

기쁨과 행복의 첫째 요소는 ‘놓아버리기’(letting go)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잠간 동안의 피상적 행복을 맛볼 따름이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우리 마음이 지난 일에 대한 후회나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어지럽다면 떠오르는 해의 아름다움을 깊이 즐기며 감상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옹글게 모아져 있지 않아서다. 마음을 들숨과 날숨에 온전히 모으고 깊은 호흡명상에 들 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으로 마음을 온전히 데려올 수 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과거로부터, 미래로부터 그리고 사업계획으로부터 해방시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되게 하는 것이다. 마음 모으기(mindfulness)는 우리로 하여금 옹글게 지금 여기 있으면서 눈앞의 현실을 바로 보게 하고 그윽이 응시하게 하여 장엄한 일출(日出)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 우리는 먼 길을 찾아온 친구와 차를 마시고 있다. 마음 모으기의 도움을 받아서 그와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사업이나 장래 계획 따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친구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 있는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시는 현실에 온전히 깨어 있다.

기쁨(joy)과 행복(happiness)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막을 여행 중인데 마실 물이 떨어져서 목이 무척 마르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오아시스를 본다. 우리는 거기 나무들이 있고 마실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앎이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하는 자기 모습을 그려본다. 그 느낌을 기쁨이라고 부른다. 마침내 우리는 오아시스에 이르러 물을 마시고 시원한 그늘에 앉아 휴식한다. 그게 행복이다. 기쁨 안에는 우리를 흥분시키는 무엇이 들어있다.

앉아서 명상하거나 걷기 명상을 할 때 육체적인 고통이 있다면 명상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명상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다. 명상은 고된 노역이 아니다. 명상이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어야 한다. 우리가 명상으로 충분한 기쁨과 행복을 얻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아픔, 슬픔, 절망들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것이다.

이를 닦거나 식사를 준비하거나 수련장을 청소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 모든 동작, 모든 호흡이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어야 한다. 인생은 이미 충분하게 고통스럽다. 다른 고통을 만들어 덧보탤 이유가 없다.

[붓다가 숨 쉬게 하라]

수년 전 어느 날 나는 한국 서울에 있었다. 그곳 사람들이 주선하여 걷기 명상을 하게 되었다. 길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되어 걷기 명상을 시작하려는데 어찌나 많은 카메라맨들이 모여들었는지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아예 발 디딜 자리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붓다에게 말했다. “붓다여, 난 포기합니다. 당신이 나 대신 걸으시오.” 붓다가 건너와서 걸었다. 길이 다시 깨끗해졌다. 이 경험을 하고 나서 나는 언제든지, 특히 걷기 명상이나 호흡 명상이 어려워질 때 사용할 수 있는 수련 노래들을 몇 개 지었다.

붓다가 숨 쉬게 하라,

붓다가 걷게 하라.

나는 숨 쉬지 않겠다,

나는 걷지 않겠다.

붓다가 숨 쉰다,

붓다가 걷는다.

나는 숨쉬기를 즐긴다,

나는 걷기를 즐긴다.

오직 숨쉬기가 있을 뿐,

오직 걷기가 있을 뿐.

숨 쉬는 자는 없다,

걷는 자는 없다.

숨쉬기와 함께 평화,

걷기와 함께 평화.

숨쉬기 곧 평화,

걷기 곧 평화.

처음 시작할 때에는 숨쉬기가 가능하려면 누군가 있어야 하고 걷기가 가능하려면 누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걷기와 숨쉬기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다만 계속되는 걷기를 주시할 뿐이다. 있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숨쉬기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흔히 비가 내린다고 말한다. 웃기는 말이다. 본디 비는 내리는 물건이다. 내리지 않는 비는 없다. 내리지 않는 것은 비가 아니다. 그러니까 비는 내림 그 자체다(So the rain is the falling itself). 비를 내리는 자(rain-er)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 바람이 분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웃기는 말이다. 불지 않는 것은 바람이 아니다. 그러니 바람을 불게 하는 자(blower)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비’ 또는 ‘바람’으로 충분하다. 걷기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걷는 붓다’(Buddha walking)는 걷기 그 자체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질(質) 높은 걷기다. 마음 모아 걸을 때 걷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요 거기에 큰 평화와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숨쉬기 곧 붓다다. 걷기 곧 붓다다. 걷기 속에 큰 기쁨과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음 모아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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