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몇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펌)

거울닦는 달팽이 2013. 2. 18.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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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크게 세 가지의 물음과 함께 한다. 첫째, 인간이란 무엇인가? 둘째,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셋째, 안다는 건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나는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가?'라는 원초적 물음으로 철학은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이 질문을 시시콜콜 밖으로 드러내며, 소크라테스처럼 남에게 질문을 하고 다닌다거나, 자기확신에 가득 찬 현자처럼 존재성 충만한 표정을 짓고 다닌다면 조금 곤란하겠다. 다만 이 물음에 관한 자기탐구와 실천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삶은 좀 더 의미 있는 것이 되어간다.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스스로를 긍정하는 철학을 개진하며, 위의 질문들에 명쾌한 해답을 내린 사람 중 하나이다. 쉽사리 인생에 허무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긍정을 불어넣고 건강한 인간유형을 제시하는 니체 철학은 누군가에게는 삶을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기에,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복음'이라 참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니체의 복음은 일방적이고 변하지 않는 실체에 대한 복종 내지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성하는 세계에서 마치 능숙한 서퍼처럼 파도를 타는 법'을 알려주는 구릿빛 하와이안 강사님의 말씀과 같았다

이 세계를 긍정해야 한다

스스로 '위대한 심리학자'라고 부른 니체는(참자. 그의 자뻑만 잘 참아낸다면 니체 철학에 다가갈 수 있다) '심리 분석적 계보학'으로 종교의 시원을 추적해 들어간다. 인간은 생성의 세계에서 살아가며, 늘 불확실한 경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끊임없는 자기변화를 겪는다. 한 마디로 확실하다고 믿을만한 게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행동의 지침과 원칙 없이 생성의 세계에서 살아남기란 망망대해에서 통통배를 타고 극강의 멀미를 겪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 불안과 고통 속에서 죽을 용기조차 없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해 줄 기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신'이다.

그러나

니체는 신을 불러낸 이들을 아니 정확하게는 스스로 무릎을 꿇을만한 우상을 만든 이들의 마음을 '괴상한 형이상학자의 심리'라고 했다. 특히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의 가치를 훼손한 채 '죄와 벌'의 개념을 만들어 종말론으로 인간을 협박한 그리스도교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인간은 자기가 발 딛고 있는 세계를 제대로 된 방식으로 '해석'해내지 못하고, 고통에 못 이겨 다른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리고 '저편'의 세계에 도취하느라 '여기'를 긍정하지 못했다.

니체가 보기에 그것은 스스로 노예가 되는 매우 적절한 방식이었다. 진정한 주인의 삶은 외부대상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창조자가 되고 의욕자가 되며, 평가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조건이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이원론을 폐기하고, 플라톤의 고정불변의 존재세계를 없애버렸다. 그로써 니체의 세계관에서는 오로지 생성하는 세계만이 존재하게 된다.


힘에의 의지

이제 니체에겐 커다란 과제가 남았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향유해왔던 저편의 존재세계를 부정했으니, 생성의 세계에서의 생존법을 설명해야 하는 에프터서비스 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생존법의 중심에는 니체 사상의 핵심개념, '힘에의 의지'가 있었다. 니체는 생명, 생성의 근원에는 '힘에의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 '힘에의 의지'는 간단히 말해 '주인이 되려 하고, 더 많아지고자 하며, 더 강해지길 원하는 것'이다

. 이 힘은 매 순간 최대방출을 원칙으로 한다. '힘에의 의지'는 기존상태보다 더 나은 것을 획득하고자 한다. 그것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힘에의 의지'는 안주하지 않고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 더 나은 것으로 다시 향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지속된다. 이것이 '힘에의 의지'의 법칙이다.

또한 이 '힘에의 의지'는 늘 관계 속에서만 작용한다. 관계는 '명령'과 '저항하는 복종'을 만들어내며, 이 둘의 관계는 생성 속에서 끊임없이 위계를 전복하고 전복하며 또 전복한다. '힘에의 의지'는 타자와 더불어 자기보존이 아닌 자기극복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위버멘쉬

 

위버멘쉬는 니체가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헌데 우리의 이상형이 평생 가도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한 그것인 것처럼 위버멘쉬가 되기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다.

위버멘쉬는 늘 현 상태를 넘어서는 인간이며, 나를 긍정하는 유일한 인간유형이다.

물론 위버멘쉬가 가능한 것은 앞서 말한

인간 내부의 '힘에의 의지' 때문이다. 니체는 말했다. "너희 자체가 힘에의 의지다"라고

 

또한 니체는

위버멘쉬의 정반대인 최후의 인간형

을 함께 제시한다.

이 최후의 인간형에는 두 가지 특징

이 있다.

하나 자기비판이 없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은 자기비판 능력이 결여되어 있어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한다. 현 상태에 만족하고 있거나, 포기하고 있는 인간

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이다.

그는 모든 의미를 축소하는 재주가 있다. 한 마디로 자기 창조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세계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우연의 소산이며,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모든 역사와 사건의 피해자로 상정하며, 의지로 받아내지 못한 역사나 사건의 거대한 짐을 증오와 복수심의 그릇으로 받아낸다. 최후의 인간은 병든 원한 인간이며, 노예이다

.

반면 위버멘쉬는 '힘에의 의지'의 구성원으로서 세계에 참여한다. 이 말인즉슨 이 세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스스로 갖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힘에의 의지'로 세계를 해석하고, 매 순간 자기극복을 감행한다.

목적도 없고 부표도 없는 이 영원한 생에서 건강한 인간유형인 위버맨쉬는 허무에 빠지기는커녕 되려 가열차게 외칠 뿐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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