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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도서

거울닦는 달팽이 2016. 11. 1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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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작가
더글라스 러미스
출판
녹색평론사
발매
200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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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11'1.28(P212) 어려운 용어를 아주 쉽게 설명한 그러나 대안을 저극 제시한 약간 진보적인 성향의 도서

 

[밑줄치기]

o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살해된 전쟁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자국민 사이의 오랜전쟁이었습니다

o 군대는 자기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사용합니다.

   목숨을 지킨다는 것은 군대의 목적이 아닙니다. 적을 죽이고, 자기의 병사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군사행동의 기본입니다

o 헤겔은 그의 철학 속에서 독일어 'Entwicklung'이라는 말을 써서 역사의 변천 속에서 인간의 정신, 혹은 역사 그 자체의 정신이

  '발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발전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부작용'과 같은 모양으로 역사의 발전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o 맑스의 혁명에 대한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총파업입니다

o 그와 같은 시시한 시작(삐라를 받아 읽는다든지, 가두연설을 서서 듣는다든지)만으로도 - 그렇게 해서 세계가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변한다. 즉 자신이 자유롭게 된다, 라는 의미에서 큰 '민주화'가 이루어집니다.

o 맑스주의 속에서 유물론은 하부구조는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하부구조란 생산수단을 비롯하여 생산의 모든 관계를 뜻합니다.

   노동자와 그들이 쓰고 있는 도구나 기계, 그리고 노사관계 등의 인간관계가 그것입니다. 하부구조가 바뀌면 어쩔 수 없이 상부구조

  는 영향을 받는다는 사고방식입니다

o 영어회화라는 하위문화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구조이다.그것은 고용방식과 광고방식 면에서 인종차별적이며, 교재와 강의실

  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 면에서 또한 인종차별주의적이다

 

[기사모음]

"경제 성장 통해 모두 잘 살자? 그건 어렵지"
[서평]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이경미 (pasodoble) 기자

서민들은 왜 신자유주의 세력을 지지하는가

 

이명박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두고 '잃어버린 10년의 회복'이니 '역사의 심판'이니 호들갑스러운 수사가 주류 언론에서 대거 쏟아져 나왔다.

 

대다수 서민이나 중산층이 그에게 표를 던져 50%에 육박한 역대 최고 지지율로 당선된 것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했다. 당시 선거에서 참패한 진보세력은 서민들이 이명박에게 몰려간 것을 두고 적잖이 당황했다.

 

서민들은 왜 이명박을 지지하는가. 이건 진보세력이 두고두고 고민할 문제다. 이명박씨는 자신의 도덕성에 금이 가는 숱한 의혹을 뿌리고도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됐다. 서민들은 도덕성이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 잘 살게 해주는' 대통령을 원했다.

 

이명박씨와 신자유주의 세력은 그것이 경제성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지배계층이나 일부 중산층들은 이 달콤한 유혹을 확신하며 확대재생산했다.

 

팍팍한 현실 앞에 무력한 서민들이 이런 선전을 적극적으로 믿었다기보다는 달리 방법이 없어, 그냥 속는 셈 치고, 막연하게 그들에게 표를 던졌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경제성장이 우선돼야 국민 모두가 잘 살 수 있다', '파이를 키우면 자연스럽게 몫이 늘어난다'는 주장을 반박할 설득력 있는 근거를 진보세력이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등' '정의' 추상 수준에서 설파하는 것은 설득력 약해

 

성장과 분배 논쟁은 그동안 지식인 사회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지겹도록 되풀이된 논쟁이며 앞으로도 지겹도록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성장 논리는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고 여기에 제동을 걸 힘은 미약해 보인다. 평등이나 정의와 같은 개념을 추상적 수준에서 설파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며 오히려 성장 논리를 더욱 공고히 해줄 정도로 무기력한 상황이다.

 

미국인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가 쓴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신자유주의 광풍에 제동을 걸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한다. 한마디로 경제 성장을 통한 풍요가 허구라는 것을 하나하나 증명해내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신자유주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정의'에 호소하던 방법은 버리고 그 주장을 깨부술 논리를 장착하는 듯하다.

 

경제 성장을 통해 모두 잘 살자는 구호에 대해 저자는 모두가 부자가 되는 건 '성립불가'라고 단언한다. 빈부라는 것은 절대적 수치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부자의 전제를 '돈을 갖고 있지 않지만 돈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상황이라고 규정한 뒤 이를 바탕으로 '타인의 노동력을 지배할 수 있는' 상태가 부자의 본질이라고 한다.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돈을 많이 갖게 된다 해도 사회는 풍요로워지지 않고 그건 단순한 인플레이션일 뿐이다. 그래서 TV 광고에서 '부자 되세요' 하는 말은 사실 '(네 이웃보다)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부가 개인 간의 경쟁으로밖에 획득할 수 없고 또 반드시 낙오자가 나온다는 점에서 '다 같이 잘 살자'는 허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빈곤은 어떻게 발생하고 재생산되는가. 저자는 빈곤의 종류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① 전통적 빈곤 ② 절대빈곤 ③ 부자의 전제가 되는 빈곤 ④ 기술발달에 의한 빈곤.

 

①은 전통적인 자급자족 사회다. 이들은 많은 것을 생산하지 않으며 동시에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구성원들은 필요한 것만 생산하며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이런 삶은 단지 바깥에서 바라본 '빈곤'이다. 

 

②는 의식주 등 생산요소가 절대적으로 빈곤해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건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③은 부자들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부자에게 고용된 노동자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경우에 따라 인격적 모욕을 당하기도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다.

 

④는 전에 없던 빈곤이다. 예컨대 자동차가 없을 때도 우리는 아무런 불편함 없이 살았지만 자동차가 생기고 난 뒤부터는 모든 길이 자동차 중심으로 재편되고, TV 광고에서는 자동차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설득을 넘어 자동차가 없으면 안 된다는 어조로 자동차 구입을 거의 강요하다시피 한다.

 

자동차 없이도 잘 살던 사람들, 지금은?

 

자동차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삶이 기술 발전으로 인해 자동차가 없으면 가난해지고 불편해지는 환경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서 국민은 소비자로서의 개인이 된다. 이런 체험은 심심찮게 할 수 있다. 특별히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제품을 광고에서는 필요한 것처럼 우리를 현혹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없으면 불편해지는 지경까지 이른다. 오는 2013년 아날로그방송 시대가 막을 내리고 디지털방송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소비자들은 그때까지 디지털 TV나 디지털 방송 신호를 수신할 수 있는 셋톱박스를 구입해야 한다. 이런 장비를 구입하지 못하는 가정은 또 다시 기술 혜택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기존의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빈곤은 경제와 기술이 발전하면 자연히 빈곤이 사라진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오히려 기술 발전이 새로운 빈곤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지난 한 세기 경제발전은 ①을 ③과 ④로 고쳐 만드는 과정이었다. 현대인은 일과 소비에 중독되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② 역시 지난 세기를 거치면서 절대적으로 증가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이해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서 대안이 뭐냐"라고 물을 것이다. 질주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대세를 거스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이다. 급진적인 운동에 대한 거부감도 크다.

 

저자는 이런 인식에 단호하게 답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민주주의 아닌가. 사회의 기본 구조, 기본 경향을 국민이 바꾸지 못하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자본주의의 거대 흐름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최소 물건만으로도 별 탈 없이 살 수 있다

 

이와 함께 저자는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이라는 용어로 대안을 모색한다. 대항발전은 물건을 조금씩 줄여가며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별 탈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기술 발전은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퇴화시켰다. 기계를 줄이고 도구를 늘려 인간의 능력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경제발전 이데올로기 속에는 경제성장이 진보라는 생각이 뿌리내리고 있는데 이것을 대항발전의 과정으로 전환하면 진보하는 대상이 물질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자신이 제시하는 방법들은 전혀 새롭거나 급진적인 게 아니라고. 이미 우리 주변에는 이런 대안에 공감한 시민들이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자본주의와 경제발전 논리의 허구성에 동감한다면 이들과 함께 행동만 하면 되는 거라고.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은 '경제동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장 논리에 포섭돼 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게 바람직한 방향이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지배논리가 불합리하지만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어' '나만 안 하면 결국 손해니까' 물결에 휩쓸리듯 흘러가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항발전을 모색하는 시민들과 함께 하는 행동마저 급진적이어서 꺼려진다면 선거라는 소극적 정치참여를 통해 당장 내가 나서지 않고도 경쟁 논리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 대안이 없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외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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