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술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는 이에게

거울닦는 달팽이 2018. 1. 1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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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는 이에게

‘마음 청진기’ 문요한 정신과 의사의 조언
“나만의 오티움(내적기쁨)을 발견하라”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는 여러모로 남다른 경력의 소유자다. 오랫동안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돌보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에 1기 연구원으로 들어가 한국형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연구했다. 사후적 정신 치료보다 예방적 활동에 더 사명감을 느껴 심리훈련 전문 교육기관 ‘정신경영아카데미’를 열어, 학교·기업체·공공기관 등에서 개인과 조직의 정신건강을 향상하는 강연과 워크숍을 했다. 그 와중에 1년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세계 각지를 여행한 적도 있다. 진료실보다 길과 연단 위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챙긴 문요한 전문의는 책 <굿바이, 게으름> <문요한의 마음 청진기> <스스로 살아가는 힘> <여행하는 인간> 등을 통해 기꺼이 독자들의 ‘마음 청진기’가 돼주었다. 그에게 한국 청년들의 불안과 회피, 의존과 자율성 부재 등의 문제를 물었다. 문 전문의는 쉼없이 ‘스펙 쌓기’에 몰두하지만 정작 취업·연애·결혼 등 중요한 선택지 앞에선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청년들에게 “자기이해로 내적 기쁨을 찾고 그걸 통해 자기세계를 구축해야 건강하고 행복한 중·장년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불안이 크니 과잉행동을 한다

어학연수, 토익, 학점 등 청년들의 ‘닥치고 스펙 쌓기’ 현상을 어떻게 보나.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는 과잉불안이다. 개인적으로 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안감을 느낀다. 늘 불안 속에 살다보니 이성적 사고가 많이 마비돼 있다. 불안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불안에 대처하려 한다. 사람마다 대처법이 다르지만, 공통된 특징은 과잉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뭔가 해야지 안심되는 거다. 자신에게 필요한 스펙과 필요 없는 스펙이 있는데,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성이 잡혀 있지 않고 불안이 너무 크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과잉행동을 하는 거다.

방송이나 신문의 상담 코너를 보면 ‘이 직장을 계속 다닐까요?’ ‘이 여자랑 연애를 할까요?’ ‘이 남자랑 결혼하는 게 맞을까요?’라는 질문이 많다. 이런 질문이 과거보다 늘어났나?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언을 구할 수 있겠지만 결국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에 별로 고민하지 않고, 고민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선택이나 결정에 의존하려는 이가 예전보다 늘었다. 사회는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 개인적 가치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다원화·개별화된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살려면 그럴 만한 교양이나 정신적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게 자율성이다. 현대인에게 선택의 기회나 권한이 많이 늘어났다. 그러나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능력 자체는 오히려 예전보다 후퇴했다. 선택 능력이 있는 사람은 선택할수록 점점 더 자신의 취향이나 가치를 이해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더 나은 선택을 한다. 경험을 통한 학습이 중요하지만 우리의 양육·교육 환경은 점점 과잉양육과 과잉보호를 함으로써 좀처럼 선택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과잉양육이 큰 문제라고 본다.


과잉양육이 심해진 이유는 뭔가.

미국에도 ‘헬리콥터맘’이 있듯 과잉양육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한국에서 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가진 불안 때문이다. 정말 훌륭한 아이로 키워야겠다는 마음으로 과잉양육을 하지만, ‘뒤처지면 안 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불안이나 생존적 위협 때문에 남보다 조금 앞에서 출발할 수 있게 과잉양육을 한다.

자기이해의 4가지 요소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왜 이렇게 심할까.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거친다. 개인의 정신세계를 놓고 볼 때 파충류에 머무른 사람, 포유류 단계에 있는 사람, 인간적 단계에 있는 사람이 있다. 파충류 단계에선 살아남는 것과 생존 자체가 중요한, 그래서 ‘생존 모드’만 작동한다. 포유류는 ‘관계 모드’다. 좀더 어울리고 보살피려는 사회성을 가진 단계다. 다음은 이성이나 도덕을 추구하는 인간적인 단계다. 인간의 뇌 발달은 생존에서 시작해 사회성·이성·인지 단계로 발달하는데, 성숙할수록 생존 모드가 줄어들고 이성이 발달한다. 그런데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입으면 생존 모드에 머물게 된다. 이는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로 확대할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세월호 등 국가적·집단적 트라우마를 거치면서 ‘나 자신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가 가족을 챙길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존 모드가 강해졌다. 그래서 부모들의 과잉양육도 트라우마 반응이다.

청년기에는 연애·취업·결혼 등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많은 사항 앞에서 선택을 두려워해 피하는 ‘선택 회피형’과 늘 타인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려는 ‘선택 의존형’이 있다. 선택을 회피하거나 선택을 의존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회피나 의존은 동전의 양면 같다. 둘 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다. 안 좋은 결과에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다. 우리 사회가 실패에 관용적이고 충분히 다시 시도할 기회를 주거나,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이 응원하고 지지한다면 선택의 결과에 따른 비난이나 부정적 평가, 손해에 덜 부담을 느낀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선택을 어려워한다.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이 사람과 연애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등은 결국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얘기가 아닐까.

본질적으로 그렇다. 결국 자기이해에 대한 문제에서 출발한다. 선택에는 우선순위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가격·품질·디자인 같은 것이 중요하더라도 수평적으로 나열돼 있으면 우선순위가 없어 판단하기 어렵다. 자기이해가 돼 있다는 것은, 자신의 기준이 수직 배열돼 있음을 뜻한다. 나에게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수직적으로 놓여야 선택할 수 있다.

자기이해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수평적 배치에서 수직적 배치로 전환하는 것인가.

그것은 한 부분이고 전부는 아니다. 네 가지 정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먼저, 자기이해는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즉 욕구를 아는 것이다. 둘째, 내가 뭘 잘하고 못하는지, 즉 나의 강점과 약점을 아는 것이다. 셋째, 나에게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가치와 중요도를 아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비판적 사고가 자기이해에 중요하다.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아는 것이 적다. 내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알려면, 자신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이해가 된다.

“행복은 좋은 경험 그 자체”

행복한 중·장년기를 위해 청년기에 준비하거나 거쳐야 할 것이 있나.

정답은 없지만, 자기이해가 중요하다. 행복에 이르는 수만 가지 길이 있기에 자신의 행복이 뭔지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게 자기이해다. 각자에게 행복의 기준과 조건이 있다. 자기이해가 잘된 사람이면 기준과 조건이 현실적이고 자기에게 맞는다. 자기이해가 안 된 사람들은 자기에게 안 맞거나 비현실적인 기준과 조건을 가졌다. 그래서 내가 어떤 기준과 조건을 가져야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내적 기준과 조건을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건 가만히 있어도 행복하다는 뜻이 아니다. 행복이란 무언가를 좋게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게 아니다. 행복은 좋은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 본질은 ‘의미’가 아니라 ‘좋은 경험’ 자체에 있다. 좋은 경험이란 내 행위의 보상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그 행위 자체가 즐거움과 기쁨을 주며, 이게 바로 내적 기쁨이자 행복이다. 그걸 라틴어로 ‘오티움’이라고 한다. 행위 자체로 기쁨을 느끼는 건 사람마다 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겐 동식물을 기르는 것이고, 어떤 사람에겐 암벽 등반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겐 시작(詩作)이나 신앙, 또는 공부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오티움이 뭔지 발견하는 사람은 자기세계를 가지는 것이다. 자기세계를 형성하면 삶의 고통이나 권태, 불행을 겪었을 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중년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이는 오티움을 찾은 사람이다. 오티움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진정한 내적 기쁨이 없다. 돈과 명예를 얻어도 중년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거나 중독, 외도, 우울증 등의 문제에 시달릴 수 있다.

돈이나 명예는 오티움이 될 순 없나.

그것은 하나의 보상이자 결과다. 사업 자체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은 오티움인데, 사업으로 돈을 벌면 좋지만 돈을 잃으면 불행하다고 느끼면 오티움이 아니다. 오티움은 보상과 결과 이전의 과정에서 느껴지는 기쁨을 얘기한다.

자율성은 본능이다

자율적으로 살면 책임이라는 짐이 뒤따른다. 자율성을 포기하는 대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욕구는 어떻게 보나.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율성은 인간의 근원적, 보편적 욕구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가진 욕구다. 예를 들어 잠을 자도 되고 안 자도 되는 게 아니라, 잠을 자는 게 본능적 욕구다. 자율성이 어느 정도 발달하고 충족되지 않으면 스스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어릴 때는 부모가 나를 책임지고 즐겁게 해주고 돌봐줄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그것이 불가능해진다. 동물은 이런 걸 아주 잘 지킨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둥지를 벗어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미가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본질이다. 앞서 말한 오티움도, 자기세계도 자율성을 뜻하는 표현이다. 오티움이 있어야 스스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자기세계를 만들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은 어릴 때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어른이 되면 가능하지 않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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