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입시생을 둔 부모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거울닦는 달팽이 2018. 9. 18.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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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는 공부하고 엄마는 기도하고 


오늘은 입시생을 둔 부모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애가 대학에 붙으려면 첫 번째는 공부를 잘해야지요. 아이가 공부를 잘하도록 엄마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만 낸다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는 엄마가 하는 게 아니고 아이가 하는 것입니다. 고3이면 나이가 열일곱에서 열아홉 사이입니다. 아이들의 사춘기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전후를 사춘기라 합니다. 사춘기는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변해가는 시기입니다. 신체적으로 변화가 오면서 성인으로 성장해갑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신체가 어른이 되면 어른으로 대우했습니다. 그래서 신체가 변하기 시작하는 열다섯 살이 되면 결혼을 시켰지요. 그러니까 몸이 어른이 될 때, 정신도 어른이라고 대우를 받는 겁니다. 때문에 옛날에는 지금처럼 청소년들이 겪는 갈등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몸은 어른이 됐는데 사회적인 조건에서는 어른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고뇌하지요. 이런 것부터 먼저 부모가 이해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어릴 때로 돌아가서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 마음이 어땠는지 견주어 보면서 ‘아, 맞아. 나도 그때 그런 고민이 있었어. 저만한 나이에는 그런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지.’ 이렇게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자랄 때와 지금 아이들이 자라는 이 시대는 환경이 달라졌다는 걸 명심하여 내가 살던 때의 눈으로, 그 기준으로 아이를 보지 않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의 나를 기준으로 해서 아이들을 봐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만한 나이 때 어땠느냐를 중심으로 해서 아이들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내 경험에 너무 사로잡혀 내 경험을 절대화시켜서 아이를 비판하는 쪽으로 가면 아이가 어긋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고 또 시대와 상황이 달라지면 성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아이들 머릿속에 늘 떠나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뭘까요? 첫째 친구 문제입니다. 친구 문제에서 대략 7, 80%가 이성 친구 문제이고, 나머지는 동성 친구들과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가족문제인데, 이 중에서도 부부갈등입니다. 엄마, 아빠가 갈등을 일으키면 그 때문에 아이들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그런데 부모는 아이의 정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과외선생에 학원비만 대주고 밥이나 해 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참 잘못된 생각이지요. 그런 상황에서는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이 시기 아이들은 심리가 늘 불안한 상태에 있습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안절부절 못 하는데 이것은 아이들의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대학은 가고 싶고 공부는 뜻대로 안 되고 날짜는 하루하루 가니 초조하지요. 초조하면 열흘에 할 수 있는 일을 열흘 다 불안 초조 속에서 보내버리게 됩니다. 부모들은 그 마음을 이해해 줘야 합니다. 심리가 불안하면 ‘이것만 끝나면 다른 일 해야지.’ 하는 생각이 더 많이 일어나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지금 해야 할 공부 생각보다는 끝난 뒤에 하고 싶은 일 공상하는 데 시간을 보냅니다. 이렇게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어떻게 안정시켜 줄 것인지 이게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 다음은 습관의 문제가 있습니다. 고3이니 더 일찍 일어나야 하지요, 다들 놀러 갈 때도 고3이니 못 가지요, 텔레비전도 고3이니까 못 봅니다. 습관적으로 지금까지 당연히 해 왔던 일들을 입시생이기 때문에 못 하게 되니까, 마치 담배 피던 사람이 담배 끊으려 할 때 온갖 번뇌가 생기고 반발 심리가 생겨 자기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개발하는 것처럼,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게 되지요. 이것도 아이들이 겪는 큰 문제입니다. 부모들은 먼저 아이들의 이런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모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이들만의 세계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아이를 이해하겠다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법문을 듣고 다짐을 해도 사람이라는 건 늘 자기 생각으로 보기 때문에 “네가 고3인데 지금 연애하게 생겼나? TV보게 생겼나?”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내 입장에서 보니까 그런 거지요. 아이들도 아이들 나름대로 그럴 필요가 있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하게 하면 몰래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얘기가 통하는 사람끼리 만나 쑥덕쑥덕 하게 되지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만났기 때문에 그 생각이 틀렸을 때 교정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딴 애도 같은 생각을 하니까 그들 사이에서 진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반항심이 더 강해지는 겁니다. 
정서도 아주 예민해서 조그만 일에도 눈물이 나고 동정심이 일어나고, 쉽게 휩쓸립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는 길도 열리고, 깡패가 되는 길도 열리고, 갑자기 자극을 받으면 자살충동을 느낍니다. 이렇게 청소년 시기에는 럭비공이 땅에 부딪히면 어느 쪽으로 튈지 예측 불가능한 것처럼 아이들의 심리가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감을 잡기가 어렵지요. 
이성 친구 문제도 부모들은 “네가 지금 그런 거 할 때냐?” 이러지만, 그런 거 할 때가 되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신체 구조상, 주위 여건상 그런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야단보다는 이해를 기초로 해야 아이를 대할 아이디어가 생기고 설득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한다 하면서도 자기 식대로 얘기하기 때문에 자식을 억압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낳아 기르면서도 아이를 설득하지 못하는 겁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집착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아이가 놀고 싶다면 놀 수도 있는 거고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할 수도 있다는 열린 입장이 되어서 대화하게 되거든요. 상대를 이해하면 설득도 더 쉽습니다. 그러니까 설득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첫째, 이해하면 내가 편하고 둘째, 상대를 이해하면 설득도 쉬워지는 이치입니다. 단순히 아이에게 이해한다고 말을 하는 것으로 잘못 알아들으시면 안 됩니다. 아이를 인정을 하라는 것이지, 아이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라는 건 아니지요. 아이 인생에 간섭도 하지 말고 특별히 애한테 뭘 해주려고도 하지 마세요.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아라. 그러나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야지 나한테 와서 뭘 해달라고 얘기하지 마라.”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아이가 대학 들어가면 등록금을 그냥 내주지 말고 차용증서를 쓴 다음에 내주세요. 그래야 아이가 고맙게 느끼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필요 없는 건 해 주면서 안 해야 할 간섭을 너무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실컷 도와주고도 인사는커녕 원망만 듣지요.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예요. 아내는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의 역할 이상을 남편한테 합니다. 해 달라고 하지도 않은 것까지 해 놓고 나중에 “내가 너한테 그렇게 했는데 너는 나한테 뭘 했나?” 이렇게 말하지요.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그건 상대를 속박하고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간이나 부모 자식간이나 가족 관계에서는 이러한 속박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분의 가장 큰 과제는 ‘이해’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으니까 속이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지요. 그러니까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하는 사람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아이들에게 억지로 공부를 시키니까 아이들은 부모를 위해서 공부를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자녀와 관계 설정을 좀 분명히 해야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제대로 못 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과 아이 생각이 다르면 대화가 필요하고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할 때에는 아이에 대한 집착을 놔야 합니다. 아이가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라고 말했을 때 동의할 수 없으면 “그럼 네가 알아서 살아라.” 이렇게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집착을 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간섭을 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또 외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 떨어지면 떨어져라.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이런 식으로 마음이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하루도 못 가지요. 이튿날 다시 집착하는 태도를 보이니 아이가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냥 잔소리로 듣습니다. 부모가 그 말대로 실행하면 아이들은 겁을 내거나 신뢰를 하는데, 자꾸 우왕좌왕하니까 신뢰를 안 하는 거예요. 이런 불안정한 관계를 맺는 것이 다 수행의 부족이고, 자기 인생을 잘 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로 인해 아이에게 스트레스만 가중시키고 아이 공부에 도움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이해하려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겠습니다.’ 하는 기도이고, 두 번째는 남편한테 참회기도를 해야 합니다. 남편한테 잘못했다는 기도를 하라는 게 아닙니다. 남편이 뭐라고 하든 ‘예’하는 태도를 가져서 집안이 화목해져야 합니다. 사업이 망했건, 남편이 좀 늦게 들어오건 공부하는 입시생을 두면서 그런 문제로 집안이 시끄러우면 안 됩니다. 남편이 새벽이 다 되어서 들어와도 아내는 “아이고, 오셨어요?” 하고 맞아들이면서 아이가 “아빠 왜 이제 왔대?” 이러면 “아빠 오늘 사업 때문에 늦게 오셨단다.” 대답하고, “왜 술 마시고 들어 왔대?” 이러면 “너도 나중에 커서 일해 봐라, 그렇게 되는 거야.” 이렇게 남편의 입장을 두둔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아빠는 좀 문제다.’ 생각했다가도 ‘별일이 아니구나.’ 여기게 됩니다. 그렇다고 남편에 대해서 입 꽉 다물고 무조건 참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아이들도 다 알거든요. 그러니까 형식적인 태도를 취해선 안 되고 수행으로 뉘우쳐야 합니다. ‘제가 부족 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말이나 표정에서 이 마음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감동하지요. 그래서 반드시 참회기도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남편이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아이가 공부 못하는 책임을 아내한테 떠넘깁니다. “당신 도대체 뭐해? 집에서 애 공부도 안 돌보고” 그러면서 꼭 남의 자식 보듯이 큰소리치지요. 수험생이 있으면 엄마도 주위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엄마도 심리적인 압박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 엄마 마음이 편해지고 부부 사이도 좋아지기 때문에 실제로 아이한테 도움이 되지요. 이렇게 수행정진하면 아이가 대학 원서를 내게 될 때 쓸데없이 욕심을 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다 좋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수행 정진하는 기도를 하면 아이한테도 도움이 되고, 아이를 위해서 부부간에 안 좋은 것도 ‘좋다, 좋다.’ 자꾸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부부 사이도 나중에 좋아집니다. 그러니 부부 사이가 좋아진 것은 아이의 공덕이지요. 그러면 아이가 대학에 떨어져도 ‘시험에 떨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부부 좋아진 것만 해도 나는 지난 일 년 동안에 많이 얻었다.’ 이렇게 될 수 있지요. 이렇게 수행을 하면 여러 정황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설령 하나가 안 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하나로부터 얻는 것이 많아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수행 한다는 것은 비가 내리면 비 내려서 좋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좋고, 나날이 좋은날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이 하는 기복 수행은 되면 좋고 안 되면 난리가 납니다. 재앙과 복이 계속 교차되는 식의 수행입니다. 그러니까 심리가 늘 들떠있고 흥분되어 있어요. 기도할 때에는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정진을 할 때에는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마음에서 의심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번뇌도 적게 일어나고 딱 몰두가 되는데,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서 계속 의심이 일어나면 번뇌가 많아지고 힘이 안 붙습니다. 그런데 ‘우리아이 대학에 걸리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면 번뇌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빈다고 되나?’ 하는 생각이 한편에서 일어나고,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도와줄 건 없으니 기도라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의심은 자꾸 드니까 이게 번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옛날 할머니들처럼 무조건 믿고 하면 되는데, 현대 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 합리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 무의식의 세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기도하는 게 굉장히 힘이 들지요. 하는 게 힘들면 힘들수록 아이한테 압박이 가지요. ‘내가 이렇게 하는데 너는 뭐 하냐?’ 이런 생각이 일어나게 되고, 남편한테도 불만이 생깁니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당신은 애가 고3인데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되겠느냐?” 이렇게 해서 기도가 도리어 화근이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니 아이가 공부할 때 여러분은 자신의 공부를 하세요. 아이는 방에서 공부하고 엄마는 옆에서 기도하고, 엄마가 기도하다 힘들면 아이도 공부하다 힘든 줄 알게 되지요. 그렇게 같이 하면, 아이가 공부하다 나와 봤을 때 엄마가 기도하고 있으면 아이가 자극을 받아 다시 공부합니다. 아이 공부시키려면 엄마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엄마도 수행하면서 공부를 해야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아이와 대화가 되고 편안해지지요. 그래서 아이에게 번뇌가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진을 하면 남편이 설령 어떻게 되더라도 또 집안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엄마가 버팀목이 되어주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아이를 이해하는 기도를 하세요.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이렇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엄마가 달래주어 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하려면 법문 들어서 되는 건 아니지요? 수행을 직접 해야지요.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자꾸 하면 조금씩 됩니다. 그래서 일단 하는 게 중요합니다. 또, 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가운데 남편에게 참회기도를 하세요. 과거에 대한 참회기도를 할 수도 있고 현재에 대한 참회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해하고 어떤 말을 하든지 “예, 예.” 그렇게 한번 해 보세요. 잘 안 될 겁니다. 담배피던 사람이 담배 끊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 것처럼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스님, 틀린 말을 하는데 어떻게 ‘예’ 합니까?” 여러분은 자꾸 이런 질문들을 하십니다. 그러나 틀리고 맞는 건 없습니다. 그냥 ‘예’ 하세요. 이 ‘예’는 내 맘에 들면 ‘예’가 되고 내 맘에 안 들면 ‘예’가 안 되지요? 그러나 제가 ‘예’ 하라는 것은 내 맘에 들 때 하라는 걸까요, 내 맘에 안 들 때 하라는 걸까요? 내 맘에 안 들 때 하라는 말입니다. 이게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조건 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탁 놔 버려야 합니다. 평생을 못 놓더라도 올 해 일 년만은, 애 시험 끝날 때까지는 무조건 놔 버리세요. 집을 판다고 그래도 “예.” 도로 산다고 해도 “예.” 여자 하나 얻는다고 해도 “예.” 집에 안 들어온다고 해도  “예.” 귀찮아서 그러라는 게 아니고 우선 ‘그렇소이다.’하는 연습을 하시라는 겁니다. 조건을 달지 마세요. 정말 억울하다 할 때 탁 놔 버려야 수행입니다. 자기가 머리를 굴려서 ‘이 정도면 놓아도 되겠다.’ 하는 것은 공부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억울함이 극치에 달했을 때 탁 놔 버려야 ‘일체가 유심조구나.’ 하는 걸 확연히 깨치게 됩니다. 그래서 ‘백척간두 진일보’란 말을 합니다. ‘백 척의 낭떠러지에서 한발 더 나아가라.’ 이 말은 ‘이거 아니다.’ 하는 끝 부분에서 한발 더 나아가라는 말이에요. 그래야 이 아상이 탁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면 해방이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로 기도를 쭉 해 나가고 마음을 안정 시켜서 아이와 함께 해 나가면 아이의 시험이 과제가 아니라 내 공부도 되고 십 년 받을 과보도 한꺼번에 해결하는 결과가 납니다. 빈 마음에서 소원을 빌어야 힘이 있습니다. 욕심으로 하면 애만 쓰게 되고 별로 힘이 없습니다. 딱 백일 동안 먼저 비우는 수행을 하세요. 소원을 빌더라도 욕심 없는 빈 마음에서 소원을 빌어야 힘이 있는 거지요.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서 해 보세요. 가장 행복한, 가장 보람 있는 일 년이 되도록, 자기 인생을 한번 만들어 가도록 해 봅시다. 
                          - 2006년 10월 정토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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