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펀글)명상을 대하는 자세

거울닦는 달팽이 2009. 9. 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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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는 몇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들어있다. 어떤 방편을 택하든지 간에 그 본질적인 요소는 필수적이다. 첫째는 릴랙스된 상태이다. 마음과 싸우지도 않고 마음을 다스리지도 않으며 집중도 없는 상태가 그것이다. 두번째는 릴랙스된 각성의 상태에서 주시하는 것이다. 마음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섭하지 말고 그냥 주시하라. 아무런 판단도 없이, 개선하려는 노력도 없이 고요하게 주시하라.


릴랙스, 주시, 판단없음, 이 세 가지가 핵심이다. 그러면 서서히 거대한 침묵이 그대를 감싸기 시작한다. 그대 내면의 모든 활동이 중지된다. 그대는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이 없다. 그저 순수한 공간이 있을 뿐이다. 명상에는 120가지의 방편이 있으며 나는 그 모두에 대해 말했다. 모든 방편은 구조가 제각각 다르지만 핵심적인 요소는 똑같다. 릴랙스, 주시, 판단없는 태도가 그것이다.


즐겁게 행하라.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놓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명상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명상은 매우 심각하고 침울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교회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요소가 들어있는 것 같다. 명상은 시체처럼 굳어있거나 거의 죽어있는 사람들, 우울하고 심각한 사람들, 유쾌함과 명랑함을 모르는 근엄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명상의 특성은 그와 정반대이다. 진정으로 명상적인 사람은 언제나 유쾌하다. 그에게 있어서 삶이란 흥겨운 놀이와 같다. 삶은 하나의 놀이이며 유희(leela)이다. 명상적인 사람은 삶을 철저하게 즐긴다. 그는 심각하지 않으며 릴랙스되어 있다.


인내하라.
서두르지 말라. 서두르기 때문에 지체되는 일이 많다. 목이 마른만큼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라. 기다림이 깊을수록 해갈의 때도 빨리 온다.
그대는 씨앗을 심었다. 그러니 이젠 나무 그늘 아래 편안하게 앉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 곧 씨앗의 껍질이 갈라지고 싹이 틀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앞당길 수는 없다. 만사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진인사대천명이라, 해야 할 일을 하되 그 결과는 신에게 맡겨라. 삶에서는 아무 것도 헛되이 낭비되지 않는다. 특히 진리를 향해 가는 과정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때로는 조바심이 일 것이다. 갈증과 더불어 조바심이 인다. 그러나 이 조바심이 장애물이다. 갈증은 그대로 유지하되 조바심을 버려라. 갈증과 조바심을 혼동하지 말라. 갈증은 열망이지 조바심이 아니다. 그러나 조바심이 있으면 갈증이 있을 뿐 열망이 없다. 열망이 있으면 기다림이 있는 것이지 바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바심을 내면 요구가 있을 뿐 기다림이 없다. 갈증이 있는 곳에 침묵의 눈물이 있다. 그러나 조바심이 있는 곳에는 쉴틈없는 갈등이 있을 뿐이다.
진리는 기습공격을 가해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투쟁이 아니라 굴복을 통해 얻어진다. 그것은 전적인 굴복의 결과로 얻어진다.


결과를 염두에 두지 말라.
에고는 결과를 염두에 둔다. 마음은 언제나 결과에 미련을 갖는다. 마음은 결코 행위 그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로지 결과를 중요하게 여길 뿐이다. 마음은 언제나 "내가 그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하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런 행위도 거치지 않고 결과를 얻을 수만 있다면 마음은 항상 지름길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교육받은 사람들이 매우 교활해진 이유이다. 그들은 지름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밀수나 도박 등의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정치 지도자, 수상, 대통령이 됨으로써 돈을 벌 수 있다면 그대는 온갖 편법을 동원해 지름길을 찾을 것이다. 교육받은 사람은 교활해진다. 그는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영민해질 뿐이다. 그는 너무 교활해진 나머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명상은 오로지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에게만 일어난다. 명상은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다.


깨어있지 못함을 편하게 받아들여라.
깨어있는 동안에는 깨어있음을 즐기고 깨어있지 못할 때에는 깨어있지 못함을 즐겨라.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깨어있지 못함은 휴식과 같다. 그런 휴식이 없다면 자각은 긴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만일 하루 이십사 시간 내내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다면 그대가 며칠이나 살 수 있겠는가? 음식을 먹지 않아도 석 달은 살 수 있다. 그러나 잠을 자지 않으면 3주일도 못가 그대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대는 자살해 버릴 것이다. 그대는 낮에는 깨어있고 밤에는 휴식을 취한다. 그 휴식은 그대로 하여금 낮에 더 또렷하게 깨어 있도록 돕는다. 그대는 다시 신선하게 깨어난다. 에너지는 휴식기를 통과하고 아침이 되면서 더 활발하게 되살아난다.


명상에 있어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얼마동안 그대는 완벽하게 깨어서 정상에 서 있다. 그 다음 순간에는 계곡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한다. 그대는 주시하는 것을 잊고 깨어있는 의식이 사라진다. 거기에 무슨 잘못된 점이 있는가?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무각성을 통해 다시 각성이 솟아오를 것이다. 신선하고 새로운 각성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만일 깨어있는 각성의 상태와 깨어있지 못한 무각성의 상태 둘다를 즐길 수 있다면 그대는 제 삼의 어떤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 지점을 이해해야 한다. 두가지 상태 를 모두 즐길 수 있다면, 그대가 각성도 아니고 무각성도 아닐 때 저 너머의 어떤 것이 그대를 찾아온다.


이것이 진정한 주시이다. 행복할 때에는 행복을 즐겨라.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행복이 가고 슬픔이 찾아온다해도 그 슬픔이 잘못된 것인가? 그 슬픔을 즐겨라. 슬픔을 즐길줄 알게 되면 그대는 이도 저도 아니다.
슬픔을 즐긴다면 그 슬픔에는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행복은 다소 얕은 감이 있다. 그러나 슬픔은 매우 깊다. 슬픔에는 깊이가 잇다. 슬픔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깊이를 가질 수 없다. 그는 표피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슬픔은 어둡고 깊은 밤과 같다. 어둠에는 침묵이 있다.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행복은 거품처럼 들끓는다. 거기엔 소리가 있다. 그것은 산중을 흐르는 계곡물과 같다. 물흐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계곡물은 결코 깊어지지 못한다. 게곡물은 항상 얕다. 그 물이 평원에 도달해 강이 되어서야 비로소 깊어진다. 하지만 그 때에는 소리가 사라진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인다. 이렇듯 슬픔에는 깊이가 있다.


왜 문제를 만드는가? 행복할 때는 행복하라. 그것을 즐기되 동일시되지 말라. 행복해지라고 말할 때 내 말은 그 행복을 즐기라는 뜻이다. 날씨가 바뀌게 그냥 내버려 두라. 아침은 낮이 되고 낮은 저녁이 되며 그 다음에는 밤이 온다. 그대를 둘러싼 분위기가 행복으로 가득차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분위기를 즐겨라. 그 다음에 슬픔이 몰려오면 그것 또한 즐겨라. 나는 즐거움을 가르친다. 어떤 경우가 오든 무조건 즐겨라. 조용하게 앉아 슬픔을 즐려라. 그러면 돌연 슬픔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그 슬픔은 오묘한 평화의 순간이 된다. 거기엔 아름다움이 있다. 아무 것도 잘못된 점이 없다.


이러할 때 궁극적인 연금술의 단계가 온다. 그대는 불현듯 자신이 행복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라는 것을 개닫는다. 그대는 다만 지켜보는 자이다. 그대는 정상을 지켜보고 계곡을 지켜본다. 그러나 그대는 정상도 아니고 계곡도 아니다. 일단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즐길 수 있다.


 

출처: http://lightearth.net/zboard/zboard.php?id=meditation&page=4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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