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달팽이

노무현 재단 상임이사 문재인 변호사

거울닦는 달팽이 2010. 5. 19.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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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탁이 만난 사람]노무현 재단 상임이사 문재인 변호사

 
ㆍ“노무현 전 대통령은 결코 현실에 굴하지 않는 이상주의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노무현 재단 상임이사인 문재인 변호사다. 검찰조사를 받던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는 사건 발표에서부터 엄청난 추모열기 속에 장례식을 치르기까지 일련의 사태 중심에 있으면서 시종 차분하고 냉정한 태도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측근이라 해도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초대형 사건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절제된 행동을 보일 수 있을까.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언론이 인터뷰를 한다면 그래서 그는 당연히 1순위다. 대통령 노무현, 인간 노무현이 누구이며, 그가 추구했던 가치와 정신은 무엇인지, 사후 1년은 어떤 시간이었는지를 말해줄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이종탁이 만난 사람’이 부산 거제동에 있는 문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것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다. 그는 이곳에서 법무법인 부산의 대표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지난 13일 서류더미가 수북이 쌓인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문재인 변호사가 부산의 자기 사무실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부산|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 이곳이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곳인가요.

“물리적으론 이사를 했지만 문패로 본다면 맞습니다. 2002년 노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제가 이곳 대표변호사였고, 대통령은 한 구성원이었죠. 노 변호사와는 원래 합동사무소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법무법인이 되었습니다.”

‘구성원’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 그는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처음 본 기자와 막 수인사를 나눈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농담조의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고보니 TV에서 보던 매서운 눈매가 누그러진 것 같다.

- 노 전 대통령 사후 1년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늘 상중(喪中)의 기분이었어요. 재단 만들고 추모사업 계획하면서 다 보냈습니다.”

- 노 전 대통령을 회고하면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하시겠습니까.

“결코 현실에 굴하지 않는 위대한 이상주의자,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 예의 극찬이네요. 그런 분을 잃었을 때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뇨,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앞이 캄캄했고 경황이 없었던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죠. 다만 당장 병원에 가 의학적 절차도 밟고, 빈소도 만들고 하는 등 여러가지 판단과 결정이 필요한데 나까지 감정에 휩싸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책임감이 저를 지탱해주었습니다.”

- 당시 추모열기가 예상밖이었습니다.

500만 추모인파를 보고 저도 놀랐습니다. 바로 그전까지 비난일색이던 여론은 뭐였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언론도 서거 전후 보도가 너무 달라 이게 같은 신문인가 싶을 정도였죠. 외진 봉하마을까지 아이들 데리고 와 몇시간씩 줄 서서 기다리다 잠깐 분향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을 들여다보고 싶더군요. 아마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그 무엇, 가치랄까 정신이랄까 서민적인 모습, 이런 것들을 아쉬워하고 지켜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1년 사이 많이 가라앉은 느낌인데요.

“지난해에 비하면 추모 분위기가 차분해진 게 사실입니다.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하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마음속에는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정신이 내재화, 내면화되어 있는 거죠. 당장 지난해 서거 후 있은 선거에서 참여도가 높아지고 선택하는 경향도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지난해 10월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높은 투표율 속에 여당이 참패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분석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다. 그가 노무현 정권의 핵심실세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번 지방선거에 대한 견해를 묻자 대뜸 천안함 얘기부터 꺼냈다. 천안함 사건이 여권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 국정을 다뤄본 경험자로서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짚이는 데가 있습니까.

“아뇨, 미스터리입니다. 다만 정부가 정확한 물증이나 과학적 검증 없이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습니다. 북한이 한·미합동훈련기간 중에, 그처럼 깊숙이 침투해, 감쪽같이 공격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쉬 믿기지 않습니다. 만약 근거가 박약한데도 어설프게 발표하면 국제사회의 불신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거와 관련해서는 “사람들이 참여정부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정부 실정(失政)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됐다”는 말로 대신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재인식이 현 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해 표로 나타날 것이란 기대 섞인 관측이다. ‘친노(親盧)’가 부각되면 될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보는 보수 여당 쪽 인식과 큰 차이를 보인다. 어느 쪽이 민심을 정확하게 보고 있는지는 6월2일이 지나야 확인될 것이다. 분명한 건 문 변호사가 불출마 공언을 지켰다는 점이다. “정치 같은 건 절대 안 한다”고 큰소리치다가도 정당에서 한자리를 준다고 하면 어느새 달려가는 여느 공직자들과 뚜렷이 대비된다. 문 변호사는 이번 선거에서 부산시장에 출마하라는 요구를, 지난해에는 경남 양산의 재보선 국회의원에 출마하라는 요구를 거절한 바 있다. 지난해에는 부산지역 민주화운동 원로인사들이 천막농성을 하며 종용했는데도 뿌리쳤다. 그에게 ‘대쪽 같은 선비’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 정치를 거부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정치는 우리 삶을 좌우합니다. 정말 중요하죠. 하지만 누구나 다 정치를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해야지요. 저는 정치 체질이 아닙니다.”

여기서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이 최근 공개한 비화를 상기해보자. 정 전 수석은 청와대 근무할 때 당시 문 수석과 자신이 출신지역을 바꿔 광주와 부산에서 교차출마하는 방안이 논의된 적 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 말을 들은 노 전 대통령이 그러면 진정한 지역주의 극복이 되겠다며 좋아했는데 탄핵 때문에 물건너갔다는 것이다.

- 그때는 출마할 생각 있었던 거 아닙니까.

“당시 당으로부터 출마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노 대통령도 저의 출마를 바라는 기색이었죠. 하지만 저는 청와대 들어갈 때 대통령으로부터 다짐받아 놓은 게 있었습니다. ‘민정수석으로 끝낸다, 나에게 정치하라고 하지 마시라’ 두 가지였죠. 그러니 노 대통령이 저보고 출마하란 말을 꺼낼 수 없었어요. 이런 분위기를 알고 정 수석이 아이디어를 내 본 것일 뿐입니다.”

- 당시 정 수석에게 ‘나는 광주에 나가도 당선되겠지만 당신은 부산에서 어려울 것이다’고 했다면서요.

“광주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높으니까요. 부산은 보수적이잖아요.”

- 끝까지 출마하지 않은 거, 후회하지 않습니까.

“후회라뇨, 왜 그런 단어를 쓰죠? 지금은 내 이미지가 좋아 당선 가능성이 높아보이니까 나오라고들 하지만, 현실 정치는 한 번 발 디디면 쉽게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평생 묻어야 합니다. 그건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 이번 선거에 노무현 정부 사람들이 상당수 나갔는데요, 도와달라는 요구를 받지 않습니까.

“그게 참 어려운 건데요… 돕고 싶다는 생각, 잘됐으면 하는 생각은 있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재단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내가 맡은 일 잘하는 게 나름대로 돕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명숙·유시민 후보는 주변에 도울 사람도 많아요. 다만 김정길 부산시장 후보의 경우가 좀 다릅니다. 그는 진보신당까지 포함한 야 5당의 단일후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명예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런다고 상근하거나 유세에 나서거나 하지는 않지만요.”

- 실제로는 이름만 걸어두는 셈이네요.

“….”


- 현 정부의 실정을 언급했는데, 잘못을 지적한다면 어떤 게 있습니까.

“굉장히 많은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가장 큰 부분이 남북관계입니다.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은 그래도 나중에 회복하면 됩니다. 역사는 일직선으로만 가는 게 아니고 때로는 갈지자를 그리기도 하는 거거든요. 하지만 남북관계는 한 번 삐끗하면 상처가 너무 커서 회복이 어렵습니다. 현 정부는 ‘지난 10년 정권’ 운운하지만 사실 남북관계는 그 이전, 그러니까 노태우 정권 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발전해왔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 6·15 선언으로 획기적 진전을 이룬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이룬 성과를 지금 정부가 한목에 다 털어먹고 있습니다.”

- 털어먹는다는 것은 무얼 뜻하는 건지요.

남북관계의 질적 비약이 가능한 토대가 정상 간 합의에 의해 마련됐거든요. 그걸 이 정부는 무시하고 부정한 겁니다. 금강산 관광만 해도 그래요. 이념을 떠나 다들 좋아했는데 그걸 파탄냈잖습니까.”

- 노무현 정부도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총선 참패 뒤 ‘폐족’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재임 기간만 보면 참여정부도 민심을 얻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국민과 소통하면서 함께 가야 하는데 실패했어요. 그 결과 정치지향을 같이하는 쪽에 다음 정부를 넘겨주지 못했죠. 선거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참여정부의 가치를 국민들에게 평가받지 못하고 외면당한 것은 참담한 생각입니다.”

- 억울하다고 느끼시는군요.

참여정부의 성과나 업적은 아니로니컬하게도 이명박 정부가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권위주의 청산이나 권력기관의 정치중립 같은 게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금 정부와 대비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거죠. 그때는 도덕적 결함이 좀 있어도 경제만 살리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땠습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민주주의라는 게 취약해서 조금만 방심하면 퇴행한다는 것, 정부의 의지가 있지 않으면 위태롭기 짝이 없다는 것, 그걸 국민이 절감하게 되었죠. 그 극적 대전환을 이룬 계기가 노 대통령의 서거였고요.”

- 그렇다면 참여정부 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요.

“우리 쪽 잘못이 컸습니다. 조급하게 서두르려고 했죠. 사심이 없다며 교만해하기도 했고요. 더디더라도 동의를 얻어가는 게 정답인데, 언론 환경이 워낙 나빴습니다. 오죽하면 국정브리핑을 만들어 국민과 직접 소통하려 했겠습니까. 또 진보개혁 진영의 분열도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말이 뚝 끊어졌다. 한동안 입을 떼지 않다가 재차 묻자 “설명이 필요합니까? 보십시다”라며 그제서야 이어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보수 쪽은 저변도 넓은데 조·중·동이 똘똘 뭉쳐 방어까지 합니다. 그런데 진보 쪽은 소수인데도 헤게모니 싸움을 벌입니다. 우리 쪽 정당조차 유지하지 못했어요. 앞에 계신데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요, 경향신문도 우리를 참 아프게 했습니다. 검찰 수사 때 보도는 정말 심했고요, 재임 중에도 사이비 진보라는 프레임으로 계속 비판했습니다. 저쪽은 단결돼 있는데 힘을 모아주지 않았습니다.”

- 말씀을 들으니 이른바 진영논리 같습니다. 하지만 언론은 본연의 사명, 원칙이 있습니다. 그 기본이 권력비판이죠.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걸 다 감안한 것입니다.”

기자의 반론에 지지 않겠다는 태세다. 경향신문 기자를 만나면 꼭 한 번 말해야겠다고 작심한 듯하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는 게 낫겠다.

- 양산의 산골로 이사를 갔다고 하던데요, 지금도 렉스턴 차량을 운전하며 출퇴근합니까.

“그렇죠. 청와대 있을 때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서 건강을 위해 그곳으로 갔어요. 좀 더 쉬고 싶었는데 먹고 살아야겠기에 사무실에 나오게 됐습니다.”

- 사건 수임은 잘되나요.

“현 정부가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판을 듣는데, 그 때문인지 국민들에게 일종의 공포기제를 심어주는 데 성공했어요. 노무현 재단을 후원하면 불이익을 받을 것이란 염려, 문재인을 도우면 뒤탈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을 심어준 거죠. 그런 분위기에서도 후원금이 적지 않게 들어와 감사할 따름입니다.”

- 장례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던 모습의 사진이 생각납니다. 이번 1주기 행사에 현 정부도 참가하나요.

“장의위원이었던 분에게는 모두 초청장이 간 걸로 압니다. 당연히 청와대에도 갔을 거고요. 하지만 참석 여부에 대해 제가 들은 바는 없습니다. 추도식 사회는 김제동씨가 보기로 했습니다.”

듣고보니 아차 싶었다. 경향신문에 연재되는 ‘김제동의 똑똑똑’에서 문 변호사를 섭외하려다 나와 선약이 돼 있다는 것을 알고 단념했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문 변호사로서는 유명인과 멋지게 대담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나 때문에 날아가버린 것이다.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됐다”고 말하자 문 변호사는 다소 엉뚱하게 대답했다.

“김제동씨가 또 한 번 밥줄이 끊어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말을 이 자리를 빌어 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걸 꼭 써주세요.”

문재인은

문재인 변호사(57)는 경희대 재학시절 유신반대시위로 구속돼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시험 합격소식을 들었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임용에서 탈락하자 부산으로 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노무현 변호사와 인연을 맺으면서 오늘날 ‘노무현의 남자’가 되는 길을 걸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선 직전 어느 자리에서 문 변호사를 소개하면서 “사람은 친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극찬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지내다 건강악화로 1년 만에 그만두었으나 네팔 산행 중 대통령 탄핵 소식을 듣고 달려와 변호에 나섰다. 2005년 청와대에 다시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거치면서 ‘왕수석’으로 불렸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 부인의 백화점 출입을 못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에 강제징집됐을 때 특전사에 배치돼 수중폭파훈련을 받은 이색 전력도 있다. 등산과 바둑이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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