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술

(펌)<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울닦는 달팽이 2011. 11. 2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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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QUESTION】 사랑하는 오쇼,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OSHO】 쁘렘 까비르,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해서는 안된다.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체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만약 그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게 된다면, 그대는 단지 그대의 에고

(自我 Ego)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이 아니며, 그대의 허위의 개성

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개성을 사랑한다. 누구나 자신의 에고를 사랑한다.

아무리 못생긴 여자라도 만약 그대가 『당신은 정말로 아름답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두 노인이 어느 길모퉁이에서 만났다.

 

『지난 여덟달 동안 어디에 있었나?』

 

다른 노인이 말했다.

 

『감옥에 있었지.』

 

노인이 말했다.

 

『감옥에? 어쩌다가…?』

 

여덟달 전쯤에 내가 길모퉁이에 서 있었는데, 아름다운 젊은 여자가 경찰과 함께 달려 오더니 이렇게 말했어.

<이자가 바로 저를 덮쳤던 사람이예요!>라고….

그리고 자네도 알지?

나는 너무 우쭐해져서 그만 <그렇다!>라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네! (^^)』

 

 

이처럼 그대가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진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대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성실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우며, 정직하다고 말한다.

그대는 거부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 나는 그대가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대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두 번 째이고, 명상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대가 명상을 하고, 천천히 에고로부터, 그대의 개성으로부터 빠져

나와서 진정한 자아를 깨닫게 되면, 사랑은 저절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연스런 개화(開花), 즉 <꽃 피어남>이다.

 

그러나 꽃이란 특정한 기후에서만 피어나며, 그 기후를, 나는 <명상>이라고 부른다.

 

침묵으로부터, 무념(無念)으로부터, 내면적 혼란의 소멸로부터, 절대적인 명료함으로부터, 평화와 침묵으로부터, 수천 송이의 꽃들이 개화 (開花)되는 것을 그대는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향기가 바로 <사랑>이다.

 

자연히 그대는 먼저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첫번째 만남>이 되기 때문이다.

 

먼저 그대는 그대 안에서 일어나는 향기를,

그대 안에서 탄생한 빛을,

그대에게 쏟아지는 지복(至福)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그대의 본성(本性)이 될 것이다.

그 때에 그대는 많은 것들 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사랑할 것이다.

 

 

무지(無知) 속에서는 우리는 사랑을 <관계(Relationship)>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진실을 자각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관계> 정도가 아니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그대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우주의 전 존재는 어쩌란 말인가? 그대의 사랑이 좁을수록 그것은 갇혀버린다.

그 날개는 잘려진다. 그 사랑은 태양을 가로질러 하늘을 날수 없다. 그것은 자유가 없다.

그것은 <황금빛 새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황금빛 새장>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새장 속의 새는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던 그대가 평소에 보던 새와 전혀 다르다.

 

사랑은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넓어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그대의 질(質), 그대의 본성(本性), 그대의 존재, 그대의 빛이 되어야 한다.

 

태양이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듯이,

명상이 비추는 사랑은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처음에 그것은 자기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로 퍼져 나간다.

그 때에는 그대는 단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새도 사랑하게 된다.

그대는 단순히 사랑할 뿐이다.

그대 자체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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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두 번 째이고 명상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그대가 명상을 하고 천천히 에고로부터, 그대의 개성으로 부터 빠져 나와

진정한 자아를 깨닫게 되면 사랑은 저절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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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쁘렘 까비르, 그대는 지금 묻고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명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은, 그 보상으로서 사랑을 가져다 줄 것이다.

 

성직자들의 말을 새겨 듣지 마라. 전혀 신경 쓰지 마라.

그들은 <사랑의 적(敵)>이다. 그들은 세계를 향해 자신을 부정하라고, 세상을 부정하라고 가르쳐 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대가 태어난 것이 죄(罪)라며, <원죄(原罪)>라고 말한다.

혹은 그대가 이 삶에서 고통 받는 것은 전생(前生)의 악한 행동의 결과,

즉 <업(業 Karma)>때문이라며 가르쳐 왔다.

이처럼 어떤 종교도 이 삶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랑? 그들로 인해 그대는 사랑에 대해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

사랑이란 그대가 받을 자격이 없는, 그대가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대에게 주어진 상(賞)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대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먼저 성직자들을 멀리하라.

그들은 그대에게 삶을 부정적인 가치로 가르쳐 왔다.

그리고 나의 노력은 삶을 긍정적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죄인이 아닌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대가 자신을 단지 죄로 가득 찬, 또는 수백만 생(生)에 걸친

<과거의 악행이 누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대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을 증오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대의 성직자들이 말해 왔던 것이다.

 

 

 

『이 삶을 거부하라. 이 삶을 버려라.

기쁨을, 행복을 거부하라! 모든 것을 다 버려라.

다 불필요한 부질없는 것들이다. 인생은 미완성의 부질없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면, 혹은 깨닫고 싶다면, 이 삶의 모든 것을 깨끗이 버려라! 거부하라!』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어디에도 천국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인생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깨달은 자>가 아니라 <금욕주의자>이다.

 

약 2천5백 년 전 붓다는 고행(苦幸)과 금욕(禁慾)을 했다.

그러나 아무런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붓다는 보리수 나무아래서의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덧없는 논쟁이었을 뿐이다.

 

자연스런 삶을 살아라.

평화스런 삶을 살아라.

내적인 삶을 살아라.

그대 자신에게 조금만 더 혼자 있는 시간, 침묵하는 시간,

그대 마음 안의 내면의 광경을 지켜보는 시간을 주어라.

천천히 생각은, 잡념은, 사념은 사라질 것이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어느 날, 마음은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마치 마음이 거기에 없는 것처럼…….

 

바로 이 침묵…….

이 순간 그대는 여기에 있지 않다.

마치 붓다-홀(오쇼가 강의하고 있는 명상 홀) 전체가 비어있는 것처럼…….

그대 안의 이 침묵 안에서 그대는 삶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차원에서 탐욕은 존재하지 않는다.

섹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노는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없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그대의 명예(honour)가,  그대에게 주어진 훈장(medal)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침묵 속에는, 마음을 넘어선 사랑이 존재하는,  순수하고, 어떠한 생물학적 충동에 의한 오염도 없는

전혀 새로운 차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아무 이유도 없는 자비(慈悲)가 있다.

그것은 천국에서 보상을 받으려는 목적이 없는 자비(慈悲)이다.

왜냐하면 자비(慈悲)는 그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 안에는 그대가 발견한 보물들을 나누고 싶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깊은 열망이 생겨난다.

 

 

『당신들은 가난하지 않다. 천국은, 깨달음은 그대들 안에 있다.

그대들은 거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대들은 황제로 태어난 것이다.』

 

 

 

그대는 단지 그대의 황제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대의 황제는 외부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는 그대 내면의 본성(本性)이다.

그것은 그대 안에서 그대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사랑은 올 것이다.

풍요함 속에 올 것이다.

너무나 많아 그대가 전부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그것은 넘쳐 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방향으로 향한다.

단지 그대의 숨겨진 빛을 발견하라.

인생은 단순한 하나의 노래, 기쁨의 노래가 될 수 있다.

인생은 단순한 하나의 춤, 축제, 끝없는 축제가 될 수 있다.

 

그대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인생을 긍정하는 삶의 방식>이다.

 

나는 인생을 긍정하는 사람만을 <종교적 인간>이라 부른다.

인생을 부정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다.

그들의 <슬픔>이 그것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유머감각>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우주이고, 우리의 집이다.

우리는 고아들(orphans)이 아니다.

이 땅이 우리의 어머니이다.

이 하늘이 우리의 아버지이다.

이 우주 전체가 우리를 위해 있고, 우리가 이 우주를 위해 존재한다.

사실은 우리와 전체 사이에 구분조차도 없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의 오스트라 악단에서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담당하는 멤버들이다.

 

이 음악을 느끼는 것만이 내가 진정한 것으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이다.

그것은 경전(經典)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神)의 조각상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가설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숭배할 것이 아니라, 고요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침묵으로부터 감사와 기도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전 존재는 신성한 것으로 변한다.

 

 

인격으로서의 신(神)은 없다.

신(神)은 모든 곳에 퍼져 있다.

나무에, 새들 속에, 동물들 속에, 인간성 안에,

 

현명한 사람들 속에, 그리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 속에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그 날개를 펼 준비가 된, 자유 속으로 날아갈,

의식의 궁극적인 자유 속으로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신성(神性)일 뿐이다.

 

그렇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전 우주 또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출처: 오쇼 타임즈 (한국어판) 1997년 9 & 10월호 / 제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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