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달팽이

[스크랩] [정치]정치에 관심 가졌다가 허덕이는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

거울닦는 달팽이 2012. 2. 10. 01:00
반응형

http://www.ddanzi.com/blog/archives/64094

[정치]정치에 관심 가졌다가 허덕이는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

2012. 02. 08. 수요일
춘심애비

 


지치지. 약간 짜증나지. 살짝 그만두고 싶지.

필자, 그맘 안다.

필자가 지지난 기사에서 얘기한 바 있다. 전국민의 전국민에 대한 힘겨루기. 물이 끓기 전에 나는 굉음. 정신 없게 만드는 그 시끄러운 소리.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이 힘겨루기는 총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어쩌면 그 후로도 꽤나 긴 시간 동안 지속될 것 같다.


<대충 이런 간지>


트위터를 하는 딴지스라면, 아마 타임라인이 둘중 하나일거다.

그냥 1) 평화롭고 평온하거나,

아니면 2) 각종 정치소식 RT와, 정치적 소견과, 그에 대한 RT와, 멘션싸움, 그리고 그 멘션싸움의 RT.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너도나도 서로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냐’는 투로 싸워대는 가운데, 정봉주 수감 이후 진중권 나댐, 덩달아 변듣보르잡 나댐, 이준석 신흥 듣보르잡 엿셔틀, 전녀오크 엿셔틀, 박그네 엿셔틀, 돈봉투 엿셔틀, 민주통합당 대표선거,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특검 삽질, 부러진 화살 논쟁, 또 진중권 나댐, 또 덩달아 변듣보르잡 나댐, 석패니 독일식이니 선거제 논쟁, 이 와중에 가카의 삽질, 비키니 응원 논란, 새나라당 당명확정 등등… 메인스트림 정치권과 재야에서 끝없이 소재를 쏴줘대니,간만에 10대, 20대들까지 대거 정치에 관심을 갖게된 이 상황에,그 정치적 관심을 기울일 각종 재료 투척이 자행되고 있는 셈.

안 그래도 정치적 사안에 대한 내성이 약한 우리 정치관심 초심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겠다. 나도 그렇다. 정치관심 초심자로서 스트레스를 받긴 받는다.

그 스트레스의 요인은 뭘까.

 

 

1. 휴리스틱과 석호필

 

한시대를 풍미했던, 프리즌뷁의 석호필. 기억하시는가.

 

시즌2부터 병맛이 시작됐기 때문에, 많은 딴지스들이 시즌1까지는 보았을 것이다. 시즌1에서 석호필이 왜 그렇게 남다르게 명석한지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석호필의 주치의였던 정신과 의사는 이런 용어를 쓴다.

<Low Latent Inhibition>

번역하자면 <잠재능력 억제 부족>정도 되겠다. 이 증상으로 인해 석호필은 남들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그 방대한 정보들을 모두 처리할만큼의 능력이 되는 두뇌를 갖고있기 때문에, 졸라 말도 안되는 초천재적 활동을 할 수 있다… 뭐 이런 설정.

일반적으로 인간들은 머리를 쓰는 과정을 피로하게 느끼고, 일상적으로 머리를 쓸 수 있는 <용량>이라는 게 각자 나름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생존에 보다 더 관련된 사실에 그 용량을 할당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에서는 그 용량을 아껴둔다. 이게 <인지적 구두쇠>의 특성을 갖게하는 이유.

그리고 머리 쓰는 능력을 아끼려는 이 특성으로 인해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휴리스틱>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머리 쓰는걸 아끼기 위해 우리는 덩치 큰 흑인은 위험하고, 까무잡잡한 동남아계 남자는 가난한 이주노동자라고 멋대로 생각한다. 사실여부와 무관하게. 그냥 그게 덜 피로하니까.

 (‘휴리스틱’에 관한 필자 춘심애비 님의 참조 기사 : ‘나꼼수 죽이기 – 우리와 그들의 깔때기 싸움’ [링크 클릭] / 편집부 주)

 

이러한 면을 좀 더 디테일한 차원에서 정의한 말이 <잠재능력 억제(latent inhibitation)>인데, 이건 말하자면 우리는 신호등의 색깔과, 신호등이 달려있는 기둥의 색깔을 똑같이 처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나, 보행자 입장에서 신호등에 들어와있는 불의 색깔은 생명과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 그래서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우리는 지금 신호등 색이 무슨색인지 정확히 인지한다. 하지만 그 신호등이 달려있는 기둥의 색깔은, 분명 시각자극이라는 사실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궁금하면 한번 밖에 나가서 신호등이 달려있는 기둥들을 유의 깊게 보시라. 생각보다 존나 다채롭다.

<휴리스틱>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에서, 두뇌활동의 용량을 아끼기 위해 활용하는 도구라면, <잠재능력 억제>는 그보다 좀 더 말초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차원에서 두뇌활동을 용량을 아끼기 위해 사용되는 시스템이다. 소위 <신경쓰는> 것과 <신경쓰지 않는> 것의 차이인 셈인데, 신경쓰지 않는 자극들은 뇌에서 알아서 그냥 스킵을 해주는 것.

지금 한 번 주변 아무 데나 둘러보시라. 그리고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을 기억하거나 판단하려고 노력해본다면, 벽면의 무늬, 색깔, 집기들 각각의 색깔과 재질, 프린트돼있는 모양이나 글씨들, 그 글씨들의 폰트 스타일, 광원들의 색깔과 그림자들의 방향 등등… 파고들려면 존나 끝도 없이 파고들 수 있을 정도로 정보량이 엄청나게 많다.

게다가 소리까지 신경쓰려고 노력해보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계음의 정체, 그 기계에서 그런 소리가 나게 되는 원리, 외부의 자동차 소리와 그로 인해 추측할 수 있는 차의 종류, 사람들의 말소리와 그 사람의 감정상태, 목소리 톤, 말투의 특성 등등…

여기에 후각과 온몸의 촉각을 모두 기억하고 판단하려 하면, 아주 짧은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정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24시간, 1440분, 86400초 동안 우리 몸에서 접수하는 이 모든 정보를 100% 수용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존나 깝깝하고 토나올 거 같다. 그 와중에 갑자기 지진이 나서 어디론가 대피해야한다고 치자. 어디로 대피할지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정보를 100% 수용한다면?

그건 가능/불가능을 떠나서 존나 위험하다. 자칫 대피시간이 늦어져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신경쓸 게 워낙 많으니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대피하게 될 수도 있고 말이다.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 뇌는 우리가 <신경쓰지 않는> 수많은 정보들을 알아서 스킵해주고 있다.

바로 이 기능을 <잠재능력 억제>라고 하는 거고, 석호필은 그 기능이 고장나서 수많은 정보를 죄다 기억하고 판단하는 거다. 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가 안 나올 정도로 머리가 좋다는 거고.



2. 피로의 이유


이 얘기를 왜 이리 장황하게 하느냐.

얼마 전까지 우리 초심자들은 <정치>에 <신경쓰지 않았다>. 누가 무슨 당의 원내대표가 된다, 이번 국회에서 무슨 법을 통과시키더라, 대통령 후보가 무슨 문제가 있다더라 등등. 신경을 안 썼던 거고 그래서 우리 뇌는 알아서 그 정보들을 스킵했다.

왜냐하면, 그 정보들보다 훨씬 중요한 정보들이 있었으니까. 올해 연봉인상률, 물가, 학교 등록금, 그러니까 나와 우리 가족의 <생존>에 대한 문제 말이다. (일부는 여자꼬시기, 술, 방탕한 삶이 더 중요했을지도.)

암튼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신경쓰기 위해 정치에 신경쓰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미국산 소고기, FTA, 나꼼수 등등을 통해, <정치>가 <생존>과 갖는 연관성을 깨달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도 <신경쓰게> 됐다. 더 이상 잠재능력이 정치적 사안에 대한 판단을 억제하지 않는다.

이제 그냥 길거리를 걷다가 전광판의 뉴스속보에 <FTA 재협상>이라는 말이 뜨거나, <한나다랑 비대위>라는 글자가 불현듯 스쳐지나가면 그 뉴스를 바라보게 된 거다. 몇 달 전만해도 그런 글자는 그냥 무시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변했던 거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피로감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된 것.

인간의 뇌 용량은 한계가 있는데, 처리해야 할 정보가 늘었으니 피로감을 느낄 수 밖에.

근데 함 생각해보자.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은 제한돼있다.

-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정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우리가 최근 동의한 바다.

- 그로 인해 우리가 피로하다.

–> 그래서 우리는 평생 동안 이렇게 피로하게 살아야한다?

 

 

그래 뭐 운동을 하면 근육이 늘듯, 계속 이렇게 살다 보면 익숙해지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소 엄두가 안 나는 부분도 분명 있지 않은가.

여기서 필자는 이런 추정을 해본다. 우리가 초심자이기 때문에, 혹시 우리의 방식이 잘못된 부분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치에 대한 우리의 초보적 관심이, 의욕이 넘친 바람에 일부분 너무 과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는가.

마치, 처음으로 헬스장에 간 스무 살 짜리 청년이 갑빠와 초콜렛 복근에 경도된 나머지 분에 넘치는 무게의 덤벨로 운동을 하다가 늑막염이나 근육파열에 걸리게 생긴 건 아니냐… 하는 점검이 필요하진 않은가 말이다.

 

 

3. 착한놈 vs. 나쁜놈

 

<이걸 알면 당신은 기성세대>


지난 글 중 ‘대표성 휴리스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우리는 어떤 개념에 대해 <전형성>이라는 것을 함께 만들어둔다. 그래서 그 전형성에 가까운 것이, 대체로 그 대상에 더 잘 부합할 거라고 생각한다.

(‘대표성 휴리스틱’에 대해서는 필자 춘심애비 님의 기사 ‘나꼼수 죽이기 – 우리와 그들의 깔때기 싸움’ 참조 [링크 클릭] / 편집부 주)

 

말이 좀 복잡한데… 예를 들어 때 지난 광고 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김태원이 출연했던 핫쵸코 광고. 포니테일로 묶은 긴 머리를 하고 분홍색 스키복을 입은 뒷모습을 본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성이라고 생각할 거다. 묶을 수 있을 정도의 긴 생머리와 분홍색 옷. 한국 현대사회에서 여성의 전형성과 가깝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은 여성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두뇌 용량을 상당히 절약시킨다. 단지 2개 정보만으로 성별을 판단할 수 있는데 적중할 확률이 통계적으로 꽤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습관적 사고패턴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정말 많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를 함 생각해보자.

당신이 밤늦은 시간에 괴한을 만나서 각목으로 존나 두드려맞았다. 지갑, 핸드폰, 손목시계, 장신구 등 값나가는 물건을 죄다 털렸다. 피를 철철 흘리는 상태로 기어가다시피 하던 중 교회 예배당 같아 보이는 곳의 문이 열려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몇명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당신은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사람들은 당신에게 헐레벌떡 다가와 부축해줬고 긴장해서 목이 탈텐데 마시라며 음료수를 하나 주었다.

이걸 안 마실 사람이 있을까.

반면, 당신이 배낭여행을 갔는데 머리 감은지 한 3년은 돼보이는 40대 집시 남자가 당신에게 와서, <나 한쿡사람 조아해여> 뭐 이딴 소리 하면서 음료수를 준다.

이걸 누가 마실까.

하나만 더 생각해보자.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어떤 아저씨가 존나 무거워보이는 짐을 들고 지하철 역 계단을 힘들게 내려가는 걸 보았다. 당신은 호의를 베풀어 그를 도와줬다. 그가 고맙다며 당신에게 음료수 한 병을 <직접 까서> 주었다.

당신은 그걸 마실텐가.

 

차이는 뭘까.

1번 사례의 예배당 사람들은 당신을 도와줄 사람들이고

2번 사례는 사기꾼의 전형성을 보이고 있으며

3번 사례는 뭔가 애매하다.

 

초 단순화시키면

1번은 착한 사람들

2번은 나쁜 놈

3번은 모르는 놈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약간 곁다리이다만…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자. <착한놈>이라는 말과 <나쁜놈>이라는 말이 갖는 상징성, 아마 많은 딴지스들이 공감하리라 믿는다.

 

A : “야 너는 드래곤볼에서 누가 좋냐?”

B : “나는 피콜로”

A : “너 왜 나쁜놈 좋아해”

B : “야 걔 나메크성에서 착한놈 됐어”

 

슈퍼맨, 배트맨, 후레시맨, 홍길동은 착한놈이고 조우커, 파란해골13호, 프리더, 셀은 나쁜놈이다.

선악에 대한 전형성. 가장 말초적인 대인 인지 체계인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체계는 <경제적>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 선악 구분을 그대로 놓고 가면 머리를 하얗게 비우고도 스토리를 따라가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용 영화나 만화는 항상 선악이 일관적이고, 성인용이라 할지라도 액션 블록버스터는 그 구도를 명확히 유지하는 것이다. 머리 식히러 극장와서 공부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가 착한놈이고 나쁜놈인지를 잘 모르겠는 상태에서는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게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도 정신이 없고 신경쓸 게 많은 상황에서는 착한놈/나쁜놈 구도를 더 안일하게 사용한다. 그래서 장례식이나 결혼식 관련한 바가지나 사기가 많은 것.

이 쯤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평소 신경 안 쓰던 정치적 사안에 대해 신경쓰다 보니 급작스러운 정보량 증가에 대응해야 하기도 하고, 원채 잘 모르던 분야다 보니 하나하나 파악하기에 남들보다 갑절의 노력을 들여야 하는 문제도 있어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착한놈/나쁜놈 구도를 사용하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나꼼수, 존나 좋아, 착한놈.

나꼼수가 박원순 밀었어, 박원순 착한놈.

그러니까 나경원은 나쁜놈.

변희재, 강용석이 박원순 까네? 변희재 강용석 나쁜놈.

자, 대략 이런 구도. 구 한나라당 나쁜놈에 나머지는 착한놈 구도, 또는 가카 나쁜놈에 안티가카 착한놈 구도는 2011년, 2012년 한국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크게 틀리지 않기 때문에 매우 경제적일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런 착한놈/나쁜놈 구도는 최소한 정치적 사안에 적용시키기에는 궁극적으로 두뇌용량 절약에 방해가 되는, 모순적인 도구이다.

일단 한 번 돌이켜 보아 주길 바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귀하께서, 정치적 관심에 대한 초심자가 맞다면 저 착한놈/나쁜놈 구도에 빠져있지는 않았는지.

아니라면 뭐 다행이다.

맞다면, 좀 더 파고들어보자. 뭐가 문제인지.

 

 

4. 단순화의 자기모순성

 

착한놈/나쁜놈 구도는 사태를 단순화시킴으로써 처리해야 할 정보량을 절약하려는 기제이다. 그 기제가 자기모순적인 상황이 있다면, 그건 그 휴리스틱으로 인해 오히려 머리를 더 많이 써야 하는 상황일 게다.

실제로 착한놈/나쁜놈 구도로 2012년 한국 정치사안을 보면, 부드럽게 넘어갈 수 없는 걸림돌들이 있다.

진중권. 수구진영 까니까 착한놈인 줄 알았는데 나꼼수 까니까 나쁜놈인가. 한미 FTA 찬성하면 나쁜놈인 줄 알았는데, 착한놈인 노무현, 문재인,한명숙이 통과시켰었으니까 그들은 나쁜놈인가. 여성을 성욕해소의 대상으로 취급하면 나쁜놈인데, 나꼼수가 비키니 응원 유도했으니 나쁜놈인가.

세상에는 수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역할과 책임, 사상, 가치관, 세계관을 가진 채 각각 다른 환경 속을 살아간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각자 나름의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노요코나 스티비원더 같은 사람은 이제 삶에 있어서 디테일하게 더이상 필요로 하는 게 아마도 매우 적을 거다. 그들의 상실(영웅적 배우자의 죽음, 시각장애)은 원천적으로 복구 불가능한 것이고, 그 이외 생활에 있어서 그들이 궁핍을 느낄만한 일이 없지 않겠는가. 돈이 얼마나 많을 텐데… 게다가 더 많은 돈 욕심을 부릴 성격도 아니고… 그리하여 그들은 아프리카 기아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걱정할 거다.

반면, 그 아프리카 기아들은 과연 다른 나라의 기아들을 진심으로 걱정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 유지, 가족들의 안전하고 안락한 삶을 신경써야만 한다.

극단적인 두 예의 중간쯤에서 우리는 각자의 위치를 지니고 살아간다. 어릴 때부터 가난에는 치를 떨며 살았던 사람, 성차별 때문에 집안이 휘청거렸던 사람, 할아버지의 정치적 행보 때문에 차별 받았던 사람, 동성애자, 성폭력 피해자, 금융사기 피해자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

이 사람들이 과연 <착한놈>과 <나쁜놈>이라는 두가지 범주로만 구분될 수 있겠나. 이건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다.

진중권. 그는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기본적인 합리성과 상식으로 지탱이 되는 사회를 욕망한다. 독일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지 그는 예술적 차원의 ‘감성’과 말초적인 ‘감정’을 철저히 구분하며 논리학적으로 비상식, 비합리에 해당하는 부조리에 대해서는 피아 구분 없이 비판한다.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기본적 합리성과 상식보다는 한명한명이 느낄 감정이 더 중요할 거다. 아주 미묘한 차원에서라도 조금이라도 덜 기분나쁘고 더 행복한 것들이 모여 좋은 세상을 만든다고 진심으로 믿는 누군가가 있을 거란 말이다.

한미 FTA. 각종 계층적, 계급적 주체들의 첨예한 대립점이다. 한국 농민들은 목숨을 걸고 반대할 일이고, 한국의 금융투자자들은 목숨을 걸고 찬성할 일이다. 이 외에도 조기 유학가서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은 결사 찬성할 일이고, 국내 지방대 의대 학생들은 반대할 일.

이렇듯 복합적인 차원에서 복합적인 사안들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이 우리 삶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인지처리의 경제성을 위한 단순한 차원의 사고방식은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세상의 모든 색깔을 검정과 하양의 기준에서만 나눈다고 하자. 말하자면 명도만으로 모든 색을 구분하는 것, 즉, 흑백으로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면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엄청나게 줄어든다. 예컨데 옷 하나를 사더라도 미묘한 색감 같은 것 신경쓸 필요 없이 어둡고 밝은 정도만 정하면 되는거다. 실제로 이 세상이 흑백이라면 이런 정보처리 방식은 매우 유용하다.

그런데, 현실세계는 RGB 삼원색으로 온갖 총천연색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에서 흑백으로만 색체계를 처리하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예컨데 명도가 동일한 빨간 계열 색과 파란 계열 색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사물의 온도나 상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 만약 강제로 모든 사물의 색을 흑백으로만 나눈다고 치면 위에서 예를 든 신호등 같은 경우 밝기의 차이만으로 빨간불 파란불을 대체해야 하기 때문에 존나 미묘한 차이를 정하는 과정에서 결정이 어려울 뿐더러, 무엇보다도 위험하다.

즉, 지나치게 단순화된 <전형성>을 부여할 경우, 오히려 복잡다단한 현실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추가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 노력이 단순화 기제를 통해 절약된 노력을 넘어선다면 단순화의 자기 모순이 시작된다.

정확한 예는 아니지만, 만물을 0과 1의 조합으로 재구성한 디지털화를 보자. 이진법의 마법을 통해 우리는 현실과 거의 유사한 가상의 세계를 효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됐다. 그 예로, 기존의 LP판보다 CD를 제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공정을 가능케 하여 더 싼 가격으로 더 오랜 시간 동안 동일한 음질의 음악을 즐기게 됐다.

그런데, 음악이란 걸 파고들다 보니 CD를 통해 진보된 영역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것이 발견됐다. CD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차가운 느낌 말이다. 게다가 그것이 mp3로 옮겨오면서 그 한계가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차이는 선형과 비선형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없기에, 최근 유럽, 미국, 일본 등에서는 다시 LP레코드 제작이 시작되고 있다. 이로 인해 최소한 그 LP를 구매할 사람들에게 있어서 요 근래 30년간 벌어졌던 LP-CD-mp3의 시장변화는 오히려 비효율적인 과정이 된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LP 공장이 없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퀄리티의 LP를 오히려 비싼 값을 주고 구매하게 됐으니까.

협소하게나마 이 과정만을 본다면, 디지털화 기술은 오히려 전체적인 효용을 줄여버린 셈이고, 그 기술 자체는 효용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시작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모순적인 존재가 된다.

뭐 어쩌란 얘기냐고?



5. 있는 그대로

 

 

재차 확인해보자.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재미있어서? 김어준 총수가 너무 좋아서?

가카가 존나게 못생겨서?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나의 삶을 더 좋아지게 할 것 같아서>다.

즉, 나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 것이 목표다. 그러니까 여기에 위배되는 건 모순적이다.

하지만 일면의 양보나 타협이 필요할 수 있다. 그건 바로 나의 행복한 삶과, 다른 누군가의 행복한 삶이서로 상충되는 경우, 양립할 수 없는 경우이다. 그 때 우리는 싸워서 이기거나, 대화와 화합으로 절충안을 찾는다.

정치라는건 기본적으로 이러한 과정이다. 대화와 화합을 시도하고, 그게 안 통하면 싸워서 이겨내고.

이러한 전제 하에, 최근 정치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진 건, 가카와 그 일당의 짓거리들의 이득이 우리의 행복과 너무나도 대치되는데 저 새끼들이 대화는 커녕 더 악랄한 짓을 남몰래 각종 꼼수로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대화와 화합이 불가하다고 판단됐고, 오히려 힘으로 누르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힘으로 싸우려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연대>라는 단어가 키워드가 되는 것.

적이 명확해보이기 때문에 저쪽은 나쁜놈, 그 반대는 착한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한 구분이 적용되기에 우리네 삶은 훨씬 복잡하다는 얘기를 위에서 한 거다.

<나쁜놈>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워낙 크기 때문에 사실은 나쁜놈이 아닌 상대를 나쁜놈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 서로의 반감이 더 큰 갈등으로 확장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착한놈/나쁜놈 단순화 제기제의 모순 속에서 허덕거리는 상황을 맞게 되는 바.

저 단순화 기제 속에서는, 일단 <나>는 착한놈일 게다. 내가 나쁜놈인 건 여러가지로 너무 불편하니까. 최소한 착하진 않더라도 옳다는 생각들은 하고 있을 거다. 그러므로 그 단순화기제 속에서는 <나와 다른 것들>은 나쁜놈이 되어버린다. 그 순간 우리는 나 이외의 모두와 싸워야 하는 극심한 피로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런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자.

내가 딸이 있다. 그 딸래미가 집에 오는 길에 어떤 놈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런데 그 성추행 가해자는 정신지체장애인이다. 아무런 악의 없이 본능적이고 순진무구하게 그냥 자기 성기를 꺼내서 내 딸래미 앞에서 마구 휘둘러댔다. 내 딸래미는 그 충격으로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자살 시도까지 한다. 그런데 가해자는 정말로 순진무구하고 착한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누가 착한놈이고 누가 나쁜놈인가.

저 정신지체 장애인이 엄중히 처벌받으면 내 딸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무죄로 판결받는다고 해서 저 정신지체 장애인이 앞으로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되지도 않는다.

그러면 정신지체 장애인 전원에게 성욕 감퇴제를 투여하는 법이라도 만들거나, 모두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시켜야하는 건가.

내가 다른 딸들의 모든 아버지들과 연합하여 남성 정신지체인들을 모두 잠재적인 성추행 가능 대상으로 규정하고 법적인 제도를 통해 그들이 길거리에서 여성들과 우연히 마주칠 기회를 박탈해내는 것이 착한일이고 정신지체인의 입장에 서서, 범죄 동기와 범죄사실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죄를 물을 수 없다고 변호하는 변호인이 나쁜놈이 되어야 하는가. 그 구도가 과연 옳은 것일까.

반대로, 오래 기다려서 겨우 얻은 아들래미가 정신지체를 갖고 태어난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아들래미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내가 존나 나쁜놈일 거다. 하지만 또한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착한놈인가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건 현실세계에서 거의 없다. 초 단순하게, 착한놈/나쁜놈으로 구분할 수 있는 상황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거다. 그냥 서로의 욕망과 서로의 행복이 상충되는 상황이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다른가, 나와 같은 사람들은 또 어떻게 같은가를 생각해야 할 게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정신지체인의 성적 충동과 내 딸래미의 안전 사이의 적절한 타협점이 어느 지점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거고, 그리고 그 타협점 자체가 계속해서 보완되어 나갈 수 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최근 비키니 응원 논쟁, 전반적으로 존나 잘 터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착한놈/나쁜놈 구도로 나눠놓고, 김총수 나쁜놈, 정봉주 나쁜놈, 미권스 남자 나쁜놈, 이런 식으로 나가는건 졸라 소모적이다만.

성에 있어서의 마초이즘과 정치적 진보성의 관계라던가, 성적 수치심에 있어서의 자발성과 폭력성의 역학관계, 페미니즘 내부에서의 역폭력 발생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최소한 수구진영 내에서는 단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는 졸라 발전적인 논의이다. 생각해보라. 이 논의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하다못해 회사 내 체육대회에서 응원단을 꾸릴 때 여성과 남성 비율을 정한다거나, 응원단의 의상을 선별할 때 수구꼴통들보다는 훨씬 바람직한 선택을 하지 않겠는가.

연대를 위한 준비자세라는 글에서 얘기했듯, 연대라는건 기본적으로 <싫은 놈>들이랑 <안싸우기로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의 이익이나 행복과 반대되는 사람들, 그들은 <나쁜놈>이 아니라 그냥 그들이다. 그들을 그들의 존재 자체로 인식하고, 거리를 확인하고, 타협점을 찾아내는 과정. 그 과정에 바로 우리가 초심자로서 새로 시작한 관심이 지속돼야 할 길인 게다.

비록 속터지고 울분을 못참겠는 과정들이 다소간 계속 되더라도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서있는 위치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때 <우리>라는 표현이 성립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춘심애비

출처 : 나는 꼼수다
글쓴이 : [운영진]쩔고있슴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