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달팽이

유시민 정계 은퇴 뒤 첫 인터뷰

거울닦는 달팽이 2013. 3. 16.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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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편안해 보여서 참 좋다...

 

미국 한 구석에 홀로 떨어져 하루하루 아이들 키우며  일상의 비루함과 외로움에 젖어 살던 나에게 이 블로그를 열게했던 장본인. 유시민씨..

 

어느날, 그의 글쓰기에 관한 강연을 인터넷으로 접한 이후, 난 내 삶을 돌아보며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내 삶의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

 

이 블로그를 하는 동안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2008년도부터였으니...

그 사이, 노무현대통령을 잃었고, 그토록 비분강개하게 만들던 MB정권은 제대로 응징되지도 않고

다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있는 우리나라...

...

그 시간 동안, 나도 개인적으로 참 힘들었지...

경제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나 자신에 대한 관점의 변화...등등...

...

그래..

지금의 나...는 블로그에 열정을 쏟지 못한다.

내 얘기를 한다는 것, 혹은 작은 사명감으로 사회와 세상의 있는 그대로를 알리려했던 시도, 행복을 향한 내 개인적인 여정들도 결국 내 생각에 사로잡힌 몸짓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누구나 다 그렇긴하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그와 나의 공통점을 알았다. ^^:

겁은 엄청 많으면서도, 또 고집은 엄청 세다는 것...흑...ㅠ.ㅠ( 그리고 다혈질..ㅠ.ㅠ.)

 

하지만,

참 좋았고 지금도 좋다..^^

이 블로그를 통해 만난 인연들이 가장 감사하고, 바다에 배 지나듯 흘러가는 세월 중에서도 이렇게 내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도...

 

이젠 쉬면서 쉬엄쉬엄 가고 싶은 것이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면 되고, 달팽이스럽게 천천히... 포기하지 않고  그냥 가면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유시민씨...가족 같은 마음인가...나 또한  너무나 아쉬우면서도 편안한 그의 표정을 보며 반기는 마음이 드는 이유는....

 

열심히 치열하게 잘 사셨다. 적절한 시기에 정계 은퇴선언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그의 새 책 제목...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는 세대들에게 좋은 화두이다.

 

 

 

 

뷰파인더 속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지난 8일 저녁 <한겨레>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인터뷰팀을 맞아 경기도 파주출판단지 내 자신의 서재에서 원두커피를 내리는 그의 표정이 환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유시민
분재가 되어가는 소나무의 슬픔
“내가 졌다”

“힘들어도 전망이 보이면 계속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졌어요. 정당 혁신, 참여민주주의, 정책 경쟁이 일어나는 정치를 목표로 10년을 했어요. 그런데 안 됐고, 될 가능성도 안 보이니까, ‘저는 졌습니다!’ 인정하는 거예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직접 밝힌 ‘정계 은퇴의 이유’다. 2월19일 트위터를 통해 정계 은퇴를 선언한 유 전 장관은 지난 8일 저녁 <한겨레>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인터뷰에서 “현실정치 10년을 한 다음 내가 졌다고 인정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패배’를 거듭 강조했다. 김두식 경북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가 진행한 이날 인터뷰는 경기도 파주출판단지 내 출판사 ‘아름다운 사람들’에 있는 유 전 장관의 서재에서 약 4시간 동안 이뤄졌다.

 

유 전 장관은 2002년 개혁국민정당 창당과 함께 정치를 시작했다. 2003년 4월 국회의원 보궐선거(경기도 고양시 덕양갑)에서 당선한 뒤 국회 본회의장을 찾아 선서할 때 흰색에 가까운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어 논란을 빚은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빽바지’(민주당 진보·개혁파를 빗댄 말)의 원조가 됐다.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6년 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이후 대통합민주신당(2007년), 국민참여당(2009년),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이상 2012년) 창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유 전 장관은 10여년의 정치 인생을 돌이키며 ‘정치의 비루함’을 말했다. 각종 선거를 앞두고 정당 내부에서 빚어지는 줄 세우기, 금품 제공, 값비싼 식사와 향응 제공 행태 등을 예로 든 그는 “시궁창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순간이 무지하게 많았다. 분열주의자, 이적행위자…, (정당) 내부 문제를 지적하고 혁신하자고 하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나쁜 놈’(the bad)과 ‘이상한 놈’(the ugly) 사이에서 ‘착한 놈’(the good)이 나타나기 어려운 프레임(구조)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또 그는 최근 4·24 국회의원 보궐선거(서울 노원병) 출마를 선언한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에 대해 “그가 어떤 힘으로 이 프레임을 부술 수 있을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 전 장관이 다시 정치에 뛰어드는 일은 없을까. 그는 “유권자, 시민으로서 국가권력의 운용에 대한 의견이 있기 마련이니, 투표·정당 참여·1인시위·촛불시위·글쓰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를 하겠지. 다만 그걸 직업으로 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인생이 80쪽짜리 논문이라면
65쪽 이후는 결론이고
본론은 열쪽 남았잖아요
정치를 오래 했지만, 안 됐고
될 가능성도 안 보이니까
이제 졌다고 인정한 거예요

분열주의자, 싸가지 없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무서워요
계속 똑같은 질문만 하는
언론인들이 무서워요
‘노빠’ ‘유빠’한테만
왜 그렇게 가혹하죠?
정치할 땐 애써 웃었지만
이젠 성질 좀 내기로 했어요

 

 

유시민, 파주 출판단지 내 도서출판 아름다운사람들 건물 4층에 위치한 자신의 집필실에서 김두식의 고백 인터뷰를 하고 있다.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고백건대, 제 마음에 남아 있는 가장 ‘유시민다운 유시민’은 2003년 4월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면바지에 재킷을 입고 선서를 위해 등원하던 산뜻한 모습의 그입니다. 보수적인 의원들뿐만 아니라 진보언론한테도 ‘지나치다’고 비판받은 행동이었지만 그날의 유시민이 제게는 참 멋져 보였습니다. 2013년 2월19일 유시민 전 장관은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짧은 글을 트위터에 남겼습니다.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찾고 싶어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납니다. 지난 10년 동안 정치인 유시민을 성원해주셨던 시민여러분, 고맙습니다. 열에 하나도 보답하지 못한 채 떠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담백한 문장을 읽고 오랜만에 면바지 자유주의자 유시민을 되찾은 것 같아 유쾌했습니다. “정치적 자기 검열 없이” 글 쓰는 사람으로 돌아온 그의 심경을 듣고자 파주출판단지의 집필실을 찾는 저의 발걸음도 가벼웠습니다. 손님을 맞이한 그는 “며칠 전 급성위염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면서도 핸드드립 커피를 대접하겠다며 원두부터 갈기 시작했습니다.

 

“입의 요구와 몸의 형편 사이의 부조화죠.(웃음) 커피 자체보다는 카페인이 위산 분비를 촉진한대요. 오늘 아침까지 카페인의 대항마인 약을 투입했으니 지금은 좀 마셔도 돼요.(웃음)”

 

 

대선 끝난 뒤 책 제목을 바꾸다

 

-새 책은 벌써 베스트셀러가 됐더군요, 책 때문에 바쁘시지요?

 

“하루 종일 사인을 했어요. 제가 정치하면서 신세 진 분들이 많은데, 이제 정치로는 보답을 못하니 책이라도 보내드려야죠.”

 

-책 제목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지만, 실제 내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가깝더군요.

 

“그렇게 보셨어요? 원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제목을 정하고 대선 전에 초고를 완성했어요. 그런데 대선 결과가 나오고 분위기가 너무 침침해졌어요. 실망한 분들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내놓으면 감당이 안 될 것 같더군요. 대선 다음날부터 사무실에 나와 완전히 새로 썼어요.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분리되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갑작스런 정계은퇴 선언은 책을 팔기 위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요.

 

“정치를 그만두려니 당에 얘기하기가 너무 미안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차일피일 미루다가 더이상은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됐죠. 삼일절 연휴 때문에 배본에 문제가 생겨서 출간 일정이 갑자기 앞당겨졌거든요. 책 내용을 보고 (정계은퇴 사실을) 알도록 할 수는 없잖아요. 틀림없이 그런 지적이 나올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은퇴를 더 늦추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제 인생이 80쪽짜리 논문이라면 65쪽 이후는 결론, 후주, 요약이 들어갈 거고, 막상 본론은 열쪽밖에 안 남았잖아요. 5년 더 정치하고 나면 은퇴해봐야 의미도 없을 것 같더라고요.”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둔다는 의미는?

 

“유권자, 시민으로서 국가권력의 운용에 대한 의견이 있기 마련이니 투표, 정당참여, 일인시위, 촛불시위, 글쓰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를 하겠죠. 다만 그걸 직업으로 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예요.”

 

-상황이 바뀌어도 절대로 안 한다는 뜻인가요?

 

“그 질문에 대해 정치적 자기 검열을 하면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가 현명한 대답이에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표현하죠. 다시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의지가 담긴 표현이군요.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껴 떠나는 건가요?

 

“왜 환멸을 느끼겠어요? 정치는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활동이에요. 드라마, 신파, 영화적, 소설적 요소가 다 있죠. 매우 중요한 영역이고 훌륭한 분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이미 많이 했어요. 현실정치 10년을 한 다음 제가 졌다고 인정하는 거예요. 힘들어도 전망이 보이면 계속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졌어요. 지역 구도를 혁파하는 정당 혁신, 참여 민주주의, 정책경쟁이 일어나는 정치를 목표로 10년을 했어요. 그런데 안 됐고, 될 가능성도 안 보이니까, 목표는 올바르더라도 대중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 목표를 이룰 사람으로 저를 받아주지 않으니까, 이제 졌다! 내가 가진 모든 걸 갖고 할 만큼 해봤는데 저는 졌습니다! 인정하는 거예요.”

 

-‘유빠’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은 없나요?

 

“제가 트위터에 올린 글 마지막 문장에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유 선생님을 좋아하는 저도 가끔 극렬 ‘유빠’들에게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요.

 

“민주당 지지층 중에는 상대방을 영남패권주의자라고 대드는 사람이 없나요? 박근혜 지지자 중에는 상대방을 종북좌파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나요? 박사모나 일베에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고 누가 박근혜를 욕하나요? 어떤 정치인 지지자나 그중에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사람도 있고, 아주 공격적인 사람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유독 노무현, 유시민 지지자들에게만 왜 그렇게 가혹하죠? 왜 우리만 손가락질하느냐고요.”

 

-애고, 오늘 기자들이 적어준 질문에는 ‘합리적인 진보개혁 진영에서도 당신을 밉상으로 보는 이유’를 묻는 것도 있네요.(웃음)

 

“정치하면서 노상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비겁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저는 저녁이 되면 체질상 눈이 무조건 충혈되거든요. 밤 12시에 만나고 제가 권력에 눈이 벌게서 어떻다는 식의 기사를 쓰는 데야 어쩌겠어요? 제가 정치할 때는 그런 질문 받아도 애써 웃으며 답했는데, 솔직히 그런 질문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많은 비열한 질문을 받아서 이제는 성질을 좀 내기로 했어요.(웃음)”

 

 

나쁜 놈과 이상한 놈 있는데, 왜 착한 놈은 없는가

 

-“안철수 박사가 과연 권력투쟁으로서의 정치가 내포한 비루함과 야수성을 인내하고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적으셨더군요. 정치의 비루함은 어떤 건가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볼까요? 제가 술을 못 마셔요. 소주 석잔이면 얼굴이 빨개져요. 그런데 5월이면 지역구에서 마을마다 효도잔치가 열리고 어른들이 소주를 따라주세요. 안 받으면 싸가지 없는 놈이 되고, 받아 마시면 두 군데 돌고 제가 뻗어버려요. 그런 때 ‘이걸 왜 해야 하나’ 비참해져요. 10월이면 지역구 학교들부터 제 모교까지 온갖 체육대회가 열려요. 10시 개회식에 가면 벌써 삼겹살 굽고 소주잔이 돌고 있어요. 모교 체육대회를 가니 기수별로 천막이 40개예요. 정말 꾹꾹 참으면서 술을 받아먹는데 우리 기수까지 겨우 돌고 뻗었어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그냥 정치가 그런 거예요. 당내 선거 때도 비참해요. 전당대회를 오후 2시에 하니까 아침에 차 타고 올라오면 되잖아요. 그런데 꼭 그 전날 온다고요. 저를 아끼는 선배가 ‘어느 지역 대의원들이 여의도 중국음식점에 모여 있다, 어디 호텔에 있다’면서 방마다 돌래요. 인사라도 해야지 아니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가보면 요리접시, 빈 양주병이 굴러다니고 50~60대 대의원들이 벌겋게 취해서 ‘어이, 이제 왔어?’ 바로 반말을 해요. 제가 40대 중반의 당의장 후보일 때요. 도대체 그 요리값, 호텔비는 누가 냈는지 몰라요. 거기서 고개 숙이고… 물론 좋은 정치를 만들려면 그것도 참아야죠. 그러나 시궁창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어요. 비루한 거죠. 그런 순간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제가 민주당을 특정했다고 적지는 마세요. 분열주의자, 이적행위자란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저는 무서워요. 제1야당의 내부 문제를 지적하고 혁신하자고 하면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6월항쟁 이후 25년 동안 계속된 프레임이에요.”

 

-어떤 프레임이죠?

 

“비유하자면 되게 힘센 나쁜 놈(the bad)이 있어요. 객관적인 나쁜 놈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생각할 때 나쁜 놈이죠. 그리고 가끔은 착하기도 못나기도 한 이상한 애(the ugly)가 있어요. 이상한 애는 힘이 좀 있어서 나쁜 놈이 나쁜 짓 하는 걸 막아주기도 하는데 자기도 가끔 나쁜 일을 해요. 서부영화로 치면 우리는 더 굿이 없는 정치예요. 여기서 착한 애(the good)가 좋은 일을 할 힘을 얻으려면 시간이 걸려요. 영화 보는 사람들이 진짜 우리 편으로 믿고 박수 쳐 줄 수 있는 배역, 즉 더 굿을 만드는 게 우리 정치의 과제예요. 그런데 착한 애가 나타나면 나쁜 놈과 이상한 애가 각각 총을 쏴요. 이상한 애는 총을 쏘면서도 착한 애한테 ‘내 말대로 해야 착한 사람이 된다’고 조언해요. 그 말을 따르면 절대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어요. 하지만 시킨 대로 안 하면 ‘분열주의자’라고 낙인이 찍혀요. 이런 프레임이 87년 체제의 본질이에요. 지난 10년간 이 프레임을 깨려고 도전했지만 제가 진 거예요.”

 

-통합진보당에 참여한 것도 그런 도전의 일환이었나요?

 

“통합진보당에서 마지막 가능성을 봤던 거예요. 문제도 많고 경직되어 있지만, 이 프레임을 깨는 데 힘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좌에서 우로 왔다 갔다 한 게 아니에요. 더 굿의 포지션을 차지할 수 있는 제법 강력한 세력을 하나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경선 부정 문제를 제기했지만, 결과적으로 구 민주노동당계의 의회 진출을 도왔고, 진보정당 분열의 책임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제가 한 말들을 찾아보라고 하세요. 더이상은 할 말이 없어요. 끝없이 얘기해도 계속 같은 질문만 하는 언론인들이 무서워요.(웃음)”

 

-안철수 박사가 비루함을 이겨내고 더 굿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요?

 

“알아서 자기 길을 열어가겠죠. 그가 어떤 힘으로 이 프레임을 부술 수 있을지 저는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어요.”

 

-안 박사를 만난 적이 있나요?

 

“전혀. 나 같은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고 많이들 조언했을 거예요. 저는 정치를 그만둔 뒤에도 공격받을 거예요. 무책임한, 싸가지 없는. 이미 붙여놓은 딱지들이 계속 따라다닐 거라고 봐요. 이 얘기는 여기까지!”

 

-왜 이렇게 안티가 많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행실이 나빠서 그렇겠죠. 달리 뭐라고 설명하겠습니까.”

 

-저는 정치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정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억지로 부름받아 나온 사람들이 정치하는 건 지켜보기도 피곤하거든요. 유 선생님도 사람 만나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시죠?

 

“국가적 이슈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지적 활동도 열심히 하지 않고, 작은 정책 개선에 보람을 느끼며 지역구를 지켜내는 정치인도 물론 필요해요. 그러나 사람 만나는 걸 게을리하고 싫어하지만 큰 어젠다 중심으로 가는 사람도 있어야 정당도 정치도 돌아가요. 어느 한 유형의 사람들만 정치를 하면 안 돼요. 제 스타일이 우리 정치 풍토에서 살아나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요.”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니는 내 살았을 때 정치하지 마래이”

 

1959년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1978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유시민은 1980년 5월17일 “다 도망가서 텅 빈 학교를 계엄군에게 넘겨주기는 좀 그렇다”고 홀로 자리를 지키다가 경찰청 특수수사대에 붙잡혀 두 달 동안 말 못할 고초를 겪었습니다. 엄청나게 얻어맞으며 하루 세끼 똑같은 아욱된장국만 먹다가 어느 날 냉면 대접에 고기를 많이 넣은 소고기무국이 나오자 모두들 겁에 질려 ‘갑자기 왜 이럴까? 우리를 모두 죽이려는 걸까?’ 떨어야 했던 살벌한 시절이었습니다. 군사재판을 받고 바로 강제 징집된 그는 꼬박 32개월을 전방 소총수로 복무합니다. 이등병 때는 반파쇼학우투쟁선언문이 발단이 된 무림사건이 터져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말년에는 ‘녹화사업’(관제 프락치 공작) 공작 대상으로 보안사에 엉터리 보고서까지 제출해야 했습니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군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에 1983년 5월의 제대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제대하는 날 화천에서 춘천까지 버스로 데려다 주는데, 정말 몸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어요. 정말 진짜 제대하는구나. 제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날이었어요. 구름을 타면 이런 기분일 거야! 제대하고는 보안사 퇴계로 진양분실에서 진행되던 녹화사업을 야당 의원들에게 폭로했어요. 그런데 국회 가서 제대로 질문도 안 하더라고요.”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과 관련해)폭행범으로 몰린 상태에서 10시간 만에 홀로 작성한 1985년 5월26일자 항소이유서는 시대의 명문으로 꼽힙니다. 글 쓰는 재주는 그때 처음 자각했나요?

 

“네. 당시 애인이던 아내는 ‘글을 써서 먹고살 수도 있겠다’는 제 편지를 받고 ‘이 사람이 감옥에 들어앉아서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대요.(웃음)”

 

-그 시절을 죽지 않고 살아남게 한 힘은 ‘거리감’이었다고 적었더군요. 세상과 타인, 심지어 자신과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한다는 얘기를 읽고, 깊은 허무를 느꼈습니다.

 

“살면서 너무 많은 사람을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관계망에도 최대치가 있는 거죠. 그리고 제가 약간 데카당(decadent)해요. 어릴 때부터 저한테 그런 게 있어요.”

 

-어떤 아이였나요?

 

“겁 많고 고집은 엄청 센 울보. 아침식사 때 4녀2남에게 꽁치를 나눠주는데 저에게 작은 걸 주면 큰 걸 달라고 하지는 않고 그냥 ‘안 먹어’ 하고 잉잉 울었대요. 그래서 아버지가 벽장에 넣고 문을 닫았더니, 큰누이가 학교 다녀와 꺼내줄 때까지 나오지 않고 계속 이불에 기대 울고 있더라는.(웃음) 어머니한테 맞을 때도 절대 ‘잘못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말하기는 싫었어요. 그 기억이 나요.”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죠. ‘기집년들 글 가르쳐놓으면 친정에 편지질이나 한다’고 아버지(유시민의 외할아버지)께서 학교를 안 보내주니까,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머무는 사랑채 옆방에 드러누워 3일 동안 벽을 차며 울었대요. 일곱 살짜리 여자애가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아따, 그년 지독하다. 학교 보내라’고 해서 어머니부터는 여자도 학교를 다녔다고 하죠. 자존심과 강단이 있는 분인데 저하고는 사이클이 잘 맞아요. 대화를 안 해도 금방 알아요. 지난 설에 오셔서는 갑자기 ‘야야. 니는 내 살았을 때 정치하지 마래이’ 하시더라고요. 제가 금방 알아들었어요. ‘니는 순하고 착한데 그렇게 나쁜 놈처럼 욕먹고 비난받는 걸 내가 더는 못 보겠다. 죽고 나서는 해도 되는데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하지 마라’는 뜻이죠. 그 말씀이 제 부담을 덜어준 면이 있어요.”

 

-수줍음이 많은데 학생운동과 정치에 뛰어들어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건가요?

 

“데카당하고 조용하고 수줍은 건 사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면이 있어요. 2002년에 그게 한번 불붙어 10년간 싸운 거예요. 그러다가 힘이 다 빠진 거죠. 사람은 누구나 양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양면, 삼면, 심지어 사면이 있죠.”

 

 

유시민, 파주 출판단지 내 도서출판 아름다운사람들 건물 4층에 위치한 자신의 집필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수액자를 뒤에 두고 있다.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남을 의식 안한 건 교만이었어요

 

-시사평론가, <100분 토론> 진행자로 이름을 날렸는데 기회가 오면 다시 해 볼 마음이 있나요?

 

“그럴 생각은 별로 없어요. 방송 진행을 맡기지도 않겠지만. 아버지 박통 시절에 도망 다녔는데, 딸 박 대통령 밑에서 잡혀가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예요? 지난 30여년간 대한민국이 그만큼은 좋아진 거죠.”

 

-면바지 등원을 좋아했던 제게는, 리버럴 유시민의 색깔이 계속 옅어진 아쉬움이 남는데.

 

“그런 면이 있죠. 분재가 되어가는 소나무의 슬픔. 저는 분재를 싫어해요. 분재는 뻗어가는 생명을 묶어놓고 모양을 만드는 거잖아요. 반자연적인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정치환경과 관련이 있어요. 우리 정치는 51%를 얻어야 생존이 가능하잖아요. 독일은 5%만 받아도 생존해요. 태양과 반대쪽으로 잎을 뻗고 싶어 하는 놈도 5%만 받으면 살아남아요. 우리 선거제도에서는 다양성이 꽃필 수가 없어요. 노 대통령의 대연정은 권력의 절반을 한나라당에 내주더라도 선거제도만 바꾸면 이런 다양한 정당들이 자기 색깔을 유지한 채로 꽃밭처럼 흐드러질 수 있다는 얘기였어요. 저도 거기 백프로 공감했고요.”

 

-서울대 출신에 정치인, 작가로도 성공했고 행복한 가정까지, 너무 많은 걸 가진 인생 아닌가요?

 

“사실이에요. 2003년 보궐선거 나온 때부터 국회의원, 최고위원, 장관에다가 대통령의 오른팔이니 왼팔이니 하는 얘기까지 들으면서 제가 무지하게 조심하고 몸을 낮췄어야 하는데 주관적으로 그런 의식이 없었어요. 예전과 똑같이 살았어요. 노 대통령과는 공적인 관계인데 인간적으로 서로 좋아했어요. 대통령 측근도 아니고, 측근 모임에서 나를 부른 적도 없고. 나는 그냥 일 있으면 대통령에게 가서 이야기했어요. 나는 나대로 사는 거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했어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 시각으로 나를 보지, 있는 그대로 나를 봐주는 게 아니에요. 타인의 눈으로 나를 봤어야 하는데 그 생각을 못한 거예요. 지금은 남의 시선을 의식 안 하고 산 것 자체가 교만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참 잘못했어요.”

 

-정치 그만둔다니 집에서는 좋아하죠?

 

“주변에서 위로를 받지만 가족들은 오히려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관리하느라 힘들대요. 어머니는 봄날 종달새처럼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셨어요. 제가 정치를 계속했어야 한다고 믿는 분들에게 죄송해서 이런 표현도 막 할 수는 없죠.”

 

-정치인을 그만두는 마당에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치인을 무작정 싫어하거나 기피하시면 안 된다. 모든 정치인이 나쁜 사람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저질도 아니에요. 정치인을 그렇게 보이게 하는 구조가 있는데 그 구조가 바뀌기 전에는 정치가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수없이 그를 촬영했다는 강재훈 기자는 오늘 뷰파인더 속의 유시민이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패배를 선언한 ‘겁 많고 고집 센 울보’에게는 여유가 넘쳤습니다. 기분 좋은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려는데 뒤에서 불쑥 혼잣말이 들렸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에 괴상한 놈이 하나 왔다 갔다 했다고 보면 되지 뭐.” 자조적인 한마디를 들으니 슬며시 웃음이 나오면서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겉은 편안해 보였지만, 급성위염에 걸린 그의 속까지 편치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그는 누가 굳이 괴롭히지 않아도 혼자 충분히 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말과 글을 무기로 홀로 싸워나갈 그의 앞길은 좀더 평안하기를.

 

 

 

그만의 패배인가, 시민들의 패배인가

 

유시민의 정치 10년사

 

“망가지긴 해도 죽기야 하겠나”
2002년 개혁국민정당으로 입문
노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며
데뷔와 함께 전성시대 누려

 

자유주의자로 자처하면서
거침없는 발언들을 쏟아냈고
정치 개혁을 명분 삼아
탈당과 분당, 창당도 반복했다
하지만 결과는 뼈아픈 수식어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2년 8월29일 ‘정치 혁명과 국민 통합을 위한 개혁적 국민 정당’(이후 개혁국민정당이란 이름으로 창당) 공보 담당 기획위원을 맡으며 10여년 정치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그는 문화방송(MBC) <100분 토론>의 ‘잘나가는’ 사회자로,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경제학 카페> 등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런 그가 ‘절필 선언’과 함께 “지금 나는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뛰어드는 심정”이라며 정치에 뛰어든 ‘사건’은 대선 국면에서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 뒤 이어진 말은 이랬다.

 

“옛날 (학생운동 시절) 을지로에서 유인물을 만들고, 화염병 던지고 그럴 때…. 정말 하기 싫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의 유신 치하, 5공화국 때 그런 일조차 하지 않고 그 시대를 통과하면 너무너무 후회할 것 같았다. 지금이 딱 그런 심정이다. 칼럼니스트는 사실 괜찮은 일이다. 그런데 다 집어던지고 (이런 일을) 굳이 해야 되느냐는 생각이 안 든 것도 아니지만,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좀 망가지기는 하겠지만, 죽기야 하겠느냐.”(2002년 7월31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유 전 장관이 정치에 뛰어들 무렵, 여당인 민주당 일부 의원은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뽑은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자 ‘노무현 흔들기’를 일삼았다. 유 전 장관이 영화배우 문성근씨 등과 함께 개혁국민정당을 만들 때 ‘정치 개혁’을 목표로 내걸고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 참여민주주의 도입 등 ‘정당 개혁’을 제시한 데에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대선 승리라는 ‘목표’를 앞세워 국민경선, 공직후보자 상향식 공천이라는 민주적 절차, 곧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그를 ‘노무현 지킴이’라고 불렀다.

 

유 전 장관에게 정치적 전성기가 있었다면, 그건 바로 정치를 처음 시작할 무렵이었다. ‘개미들의 유쾌한 정치반란’ ‘고래를 삼킨 새우’를 구호로 내건 개혁국민정당은 2002년 10월 창당과 함께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했고, 일반 시민의 폭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며 그의 당선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유 전 장관의 오랜 지인은 당시를 떠올리며 “개혁국민정당 창당부터 대통령 당선까지가 (유 전 장관이) 오히려 가장 자유롭고 빛나던 순간이었다. 그때는 우리 모두 정치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듬해인 2003년 4월 유 전 장관은 개혁국민정당 후보로 국회의원 보궐선거(경기도 고양시 덕양갑)에 나와 당선하며 국회의원 생활을 시작했다.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 자신의 책 <와이 낫>(WHY NOT, 2000년 2월 출간)에서 “자유주의자는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며, 집단의 위세 앞에 주눅 들지 않는다. 술자리 안줏감으로 씹히고 괘씸죄에 걸려도 어쩔 수가 없다. 어느 시대든 신조를 지키는 데는 비용이 따르는 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를 하면서도 이런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2003년 4월29일 국회의원 선서를 위해 처음 출근한 국회 본회의장에서 ‘일하기 편한 옷’이라며 ‘빽바지’를 입고 간 것이 논란을 빚기도 했고, 같은 해 5월 대학신문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애국은 내면적 가치인데 주권자로 하여금 공개 장소에서 국가 상징물에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것은 민주공화국에서 상상할 수 없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파시즘과 일제의 잔재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해 거센 논란을 빚기도 했다.

 

‘불관용’과 ‘관용’도 유 전 장관을 설명하는 주요 열쇳말이었다. 그는 빽바지 등원 다음날인 2003년 4월30일 국회에서 “제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것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관용과 존중이다. 나와 다른 것을 배제하고 말살하려는 불관용 말고는 모두 관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의도와 달리, 그의 존재가 도드라진 지점은 불관용, 혹은 불관용의 대상과 만났을 때였다.

 

그는 정치를 시작하며 자신이 관용할 수 없는 상대라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베고 찔렀다. 논리정연한 말과 글이 그의 최대 무기였다. 지난 10여년간 그의 말과 글 앞에 숱한 정치인이 얼굴을 붉혔지만 정작 상처 입은 쪽은 유 전 장관 본인이었다. 2002년 정치를 시작할 때 그가 했던 말을 빌리자면, ‘죽지 않을 만큼 망가졌다’.

 

유 전 장관은 과거 칼럼니스트 시절부터 한국 정치를 영화 <석양의 무법자>의 원제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의 구도로 설명해왔다. 한나라당 시절부터 새누리당은 줄곧 그에게 ‘나쁜 놈’(the bad), 곧 불관용의 대상이었다. 2004년 2월 불법대선자금 등에 관한 청문회 때 “나는 한나라당 박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보수언론에 대해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불관용 분위기를 선동하는 독극물과 같은 존재”(2005년 11월 서울대 특강 내용)라는 표현을 썼다.

 

서로 관용할 수 없는 ‘나쁜 놈’과의 싸움에서 상처 입는 것은 당연했고 아프지도 않았다. 유 전 장관이 시도한 것은 ‘이상한 놈’, 곧 민주당(열린우리당 포함)의 ‘교화’(정당 개혁)였다. 여기서 그는 스스로 “내가 졌다”를 선언한 것이다. 지난 8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그는 “착한 애가 나타나면 나쁜 놈과 이상한 애가 각각 총을 쏜다. 이상한 애는 총을 쏘면서도 착한 애한테 ‘내 말대로 해야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 말에 따르면 절대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시킨 대로 안 하면 ‘분열주의자’라고 낙인찍힌다”고 말했다.

 

유 전 장관이 ‘분열주의자’ 혹은 ‘분파주의자’라는 비판을 듣게 된 계기는 2005년 4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였다. 그는 2003년 11월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 때 개혁국민정당을 이끌고 여기에 합류했다.

 

당시 전당대회를 앞두고 그는 “정동영계는 용서할 수 없고, 김근태계와는 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 정동영, 친 김근태’ 발언 이후 정동영계는 물론 김영춘, 송영길, 임종석 등 열린우리당 내 386 의원들까지 그를 ‘분파주의자’로 몰았다. 전당대회에서 그는 4위로 상임중앙위원에 당선했다. 훗날 그는 전당대회를 치르며 열린우리당의 붕괴를 예감했다고 말했다. “전당대회를 코앞에 두고 당원과 대의원 자격에 관한 당헌과 당규를 고쳤다. 그 결과…, 일부 후보들은 안타깝게도 대의원 줄세우기, 금품 제공, 값비싼 식사와 향응 제공 등의 구태를 저질렀다.”(유시민, <후불제 민주주의>, 248쪽)

 

유 전 장관에게 가장 아픈 수식어는 ‘정당 브레이커’(당 깨기 전문가) 혹은 ‘창당 기술자’일 것이다. 그보다 심한 비판으로는 ‘말바꾸기의 달인’이 있다. 언론인 고종석씨는 그를 가리켜 지난 2월26일 자신의 트위터에서 “증오마케팅과 분열주의의 프로페셔널이자 말바꾸기의 달인이자 착한 약자 코스프레의 종결자”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개혁국민정당과 열린우리당을 빼더라도 대통합민주신당(2007년), 국민참여당(2009년),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이상 2012년) 등의 창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를 ‘정치 공학’의 결과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2008년 4월 제18대 총선 때 대구 수성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대구에서 계속 정치를 하겠다는 뜻을 비쳤는데,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야당 단일 경기지사 후보로 출마해 낙선한 것을 두고 신뢰를 많이 잃었다는 평가도 있다.

 

유 전 장관은 지난 2월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정치를 시작하기 전 그의 직업이었던 ‘지식소매상’ 자리로 돌아갔다. 유 전 장관이 지난 10여년의 정치 인생을 돌아보며 스스로 “내가 졌다”고 밝혔듯, 외부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그의 정치를 “실패”로 규정했다.

 

“그가 시민의 참여가 바탕이 되는 정당 개혁과 정치 개혁을 많이 강조했는데, 그가 만든 개혁국민정당이든 열린우리당이든 이들 정당 모델이 한국 정치에 제대로 착근됐다고 보기 어렵다. 당장 어떤 실체로 남아 있는 것도 없고, 기존 정당이 그 영향을 받아 바뀐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혹독한 평가를 받는 지점은 통합진보당 창당과 분당이다. 이 소장은 “국민참여당과 민주노동당을 합친 통합진보당은 정치 공학의 극치였다. 전혀 이질적인 두 세력의 결합이었기에 분당이라는 결과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유 전 장관이 자신의 정치를 그렇게 끝낸 것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유 전 장관은 이번 인터뷰에서 “내가 졌다”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했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되는 정당을 만들어 한국 정치를 바꾸겠다고 했던 ‘유시민 정치’의 몰락은 과연 ‘유시민’의 패배일까, 아니면 시민의 패배일까. “내가 졌다”는 짧은 문장이 남기는 긴 여운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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