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오랜 세월 검증된 아름다움을 갖고 싶다면 -오드리 햅번

거울닦는 달팽이 2015. 9. 17.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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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와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며,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에 있는 손을 사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오드리 헵번이 아들에게)

-샘 레벤슨(Sam Levenson)이 지은 <Time Tested Beauty Tips>라는 시






타락할 수 없는 마음을 지닌 연약한 여인, 다치기 쉬워 보이나 섬세한 우아함을 지닌 여인, 멍해질 만큼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나는 여인, 패션 아이콘, 영원한 박애주의자, 청춘과 청순 그 자체. 오드리 헵번에 따라다니는 평판이다. 벨기에,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미국의 언론들은 헵번이 각기 자기 나라의 스타임을 강조한다. 1990년에 네덜란드에서는 튤립의 한 품종을 '오드리 헵번'이라 이름 짓기도 했다. 
20세기 최고의 미녀라 불리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많았다. 자신은 너무 말라서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한 절친했던 친구에게는 "이런 얼굴로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며 "나는 피부도 좋지 않아 화장을 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얼굴이 각졌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고…"라고 고백했다.
글래머 여배우들이 인기를 끌던 시절에 호리호리하고 지적이며 고전적인 미인이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칭송되었으며, 지금도 영원한 미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헵번의 사진은 휴대폰 광고에도 쓰이고 있다. 

오드리 헵번의 탄생

헵번은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아버지인 영국의 은행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 남작 부인의 딸로 태어났다. 후에 헵번의 아버지는 나치에 동조한다.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으로 태어나 아버지가 성에 헵번을 붙이고 나서 오드리 헵번 러스턴(Audrey Hepburn-Ruston)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두 명의 배다른 형제자매가 있으며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기도 하다. 캐서린 헵번, 험프리 보가트, 모나코의 레니에 3세와도 먼 친척 관계이다.
4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5살부터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여,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에 코러스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몇 개의 영국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는 모델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헵번은 5개 국어(영어, 불어, 벨기에어, 폴란드어, 네덜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10대에는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 키가 너무 커져(170cm) 포기했다. 연기 활동으로 1950년대 들어와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오드리 헵번을 스타로 만든 영화
오드리 헵번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영화는 <로마의 휴일>이다. 
원래 이 영화의 감독을 맡기로 했던 프랑크 카프라는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발탁하려 했다. 사정이 안 맞아 조지 스티븐슨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갔고, 스티븐슨도 거절하여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을 맡게 되었다. 
와일러는 앤 공주를 진 시몬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줄이 안 맞았다. 예산도 축소되어 신인 여배우를 캐스팅할 수밖에 없었다. 하룻밤에 찍는다는 설정도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연극 <지지>에 출연한 헵번을 지켜봤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로마의 휴일>에 신인 여배우인 헵번을 앤 공주 역으로 캐스팅한다. 
이 영화가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그레고리 펙은 자기 이름만 크게 나온 영화 포스터를 보고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라며 그녀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으라고 제작사인 파라마운트사에 요청했다. 그의 예상대로 헵번은 195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골든 글로브상, BAFTA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헵번이 24살 때의 일이다. 영화배우로 이름을 알린 후에도 헵번은 영화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로드웨이 연극 <운디네>에 출연하여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4년작인 <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인 사브리나 페어차일드(Sabrina Fairchild)역을 훌륭하게 소화하여 제27회 아카데미상 여우주연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주인공을 맡은 오드리는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문 리버'를 직접 어쿠스틱 기타로 치면서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뮤지컬 영화 <퍼니 페이스>와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했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의 노래 장면은 다른 가수의 더빙이었다. <왕과 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에서 노래 더빙을 한 마니 닉슨이다. 
평생 15번의 배역을 맡은 햅번은 60년대 후반부터는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 곁에(원제: Always)>를 마지막으로 영화에선 은퇴했다. 리처드 드레이퓌스는 스필버그에게 "그런데 누가 천사를 연기할 거지?"라고 물었다. 스필버그가 "오드리 헵번"이라고 대답하자, 드레이퓨스는 "그래, 그녀말고 누가 천사를 맡을 수 있을까!"라고 감탄했다. 

오드리 헵번의 진정한 아름다움

오드리 헵번의 아름다움은 영화배우로서 은퇴 후에 나타난다.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인도주의적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봉사 활동에서 미소 짓는 노년의 헵번은 젊을 적보다 아름다웠다. 1981년 두번째 이혼 뒤에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홍보대사가 되어 아프리카와 남미, 동남아를 돌아다니며 굶주린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92년에는 대장암에 결려 암투병중임에도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했다. 
세계인이었던 그녀는 국제적 외교사절이란 직업을 인류에게 강렬하게 심어주었다. 유엔은 2004년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 이 상을 받으면 '유엔의 친구'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첫 해의 수상자는 여배우 드류 배리모아이다.
햅번은 샘 레벤슨(Sam Levenson)이 지은 <Time Tested Beauty Tips>라는 시를 좋아했으며,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11993년 1월 20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1년 전에 아들인 셥 헵번 퍼러에게 암송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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