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중년, 누구에게나 가을은 온다 (펌)

거울닦는 달팽이 2016. 4. 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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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이상하게 예민해졌어요. 툭하면 화내고, 삐치기도 잘 한다니까요."
"괜히 울적해지기도 하고, 남편이 무심코 한 말이 가슴에 맺혀서 눈물이 왈칵 날 때가 있어요. 한 번씩 열도 올라오고... 갱년기라 그런 것이겠지요?"

50대를 전후한 분들과 상담하다보면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부부가 같이 오면 남편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 난 괜찮다'는 표정을 하고 아내는 '내가 당신 때문에 이렇게 힘들다'는 표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서로 같은 상황을 이야기하는데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을 때도 있지요. 그럴 때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이해하는 게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하겠구나(아마도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여하튼 중년의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몸과 마음의 상태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듣습니다. 일정한 궤도를 유지하며 날아왔던 삶이 다시 한 번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중년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많은 변화들은 호르몬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성호르몬의 변화가 가장 큰 영향을 준다고 하지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한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은 "여성은 49세가 되면 임맥이 허해지고 태충맥이 약해져서 천계(天癸)가 다하고 지도(地道)가 통하지 않게 되어 몸이 상하고 자식을 가질 수 없다"고 하고, "남성은 48세가 되면 상부에서 양기가 약해져서 얼굴이 마르고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다가 56세가 되면 간장의 기운이 약해져서 근력이 떨어지고 천계(天癸)가 다해서 정(精)이 적어지며 신장의 기운이 쇠해서 몸이 약해진다"고 표현합니다. 

중년 남녀의 신체적 변화에서 등장하는 천계(天癸, 직역하면 하늘의 물 정도겠지요)란 단어를 성호르몬에 의해 직접 영향을 받는 월경과 정액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해석합니다. 성별과 유전과 생활습관에 의한 개인 차이는 있겠지만, 50대를 전후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10대 중반에 시작된 남성과 여성으로의 신체적 삶의 색이 조금 연해지고, 이제 성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완성해 가는 단계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진료를 하다보면 이 변화를 거부하거나 혼란스러워 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각종 요법을 동원해서 신체적 나이를 되돌리려는 분도 많고, 여러 방식으로 자신의 청춘을 확인하거나 과시하는 분도 있지요. 갱년기는 계절로 치면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환절기 같은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절기가 되면 마음도 왠지 싱숭생숭하고 몸도 괜히 찌뿌듯하고 잔병치레도 하는 것처럼, 갱년기가 되면 몸과 마음에 몸살이 납니다. 증상이 심하거나 이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면 치료를 통해 연착륙을 유도하는 것이 좋고, 그렇지 않다면 호흡을 고르면서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지요. 이것이 삶의 정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봄에 싹터서 여름에 무성하게 자란 인생을 두고 그 동안 살아온 삶의 지혜로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어 보다 효율적으로 나를 성장시켜 나가는 것이지요. 불필요한 힘과 과장된 동작 없는 무술의 고수처럼 삶을 운영해 나가는 것입니다. 

중년 이후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몸의 건강만큼이나 마음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특히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중년은 사회적으로 청춘을 강요받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도 한참 많은 일을 해야 하고, 기대수명의 연장으로 앞으로 남은 시간에 대한 불안 또한 커졌습니다. 그런데 몸은 <황제내경>의 시대와 별반 다름없이 변화합니다. 이 차이를 인식하고 잘 조절하지 못하면, 자칫 언제나 청춘인 줄 알고 열심히 달렸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과 영혼이 지치고 피폐해져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속빈 강정이나 쭉정이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내적인 불만이나 불안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해서 자신은 물론 가족이나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런데 중년에 나타나는 몸과 마음의 불안정성은 변화의 시기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것을 잘 다루면 삶을 한 단계 성장시킬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첨예한 갈증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그가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뜻이다. 내적인 모순에 의한 갈등이 없는 인생은 반쪽짜리 인생이거나 하늘 위의 천사에게나 가능한 초월적인 삶이다. (중략) 만약 그 사람에게 드러난 문제가 없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탐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중년의 위기를 겪는 사람들은 개성화 과정을 밟아야 하는 내적인 필요성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를 발견하는 여행을 시작해야만 한다." <융, 중년을 말하다> 대릴 샤프 지음, 류가미 옮김, 북북서 펴냄.

불안이나 갈증이 없다면 우리는 현실에 안주합니다. 그랬다면 인류의 역사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겠지요. 병을 잘 다루면 건강을 유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중년에 일어나는 신체적·심리적 변화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이해하면(잘못하거나 방치하면 고집쟁이가 되어 스스로를 고립해 소싯적 이야기를 자주 하거나 사춘기적 일탈로 빠지기도 하지요), 삶의 궤도를 한 단계 위로 끌어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융이 말한 개성화 과정을 잘 이루면 남은 인생은 물론 건강(이 연령대 많은 질환의 기저에는 이러한 내적 갈등이 내재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잘 다룰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년의 위기는 다 컸다고 생각하는 어른에게 찾아오는 또 한 번의 성장통인 셈이지요.

누구에게나 인생의 가을은 찾아옵니다. 봄과 여름은 화려하고 강렬하지만 가을에는 또 그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그 동안 쌓아온 삶의 경험을 힘으로 내적인 침잠을 통해 진짜 자신의 씨앗을 찾아 낼 수 있다면, 가을은 인생의 또 다른 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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