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법륜 스님 즉문즉설 중...편한 삶이 허하게 느껴져요..

거울닦는 달팽이 2016. 1. 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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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편안한데도 가끔씩 허한 느낌을 갖는 나에게

좋은 법문이 되었기에 올려 놓는다.

 

보시, 봉사, 취미 생활등을 하면서 살아가는데도왠지 허한 기분이 들곤했는데.....

'아직 습의 중독성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구나...'

 

 

저는 40대 초반의 직장 여성입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있었어요. 커서는 대학원에 가는 것이 목표였고, 직장에서는 자격증 시험을 목표로 공부했고, 회사생활을 하면서 이만하면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0대 중반이 되면서부터 '내가 뭘 위해 정신없이 이렇게 달려왔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3년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2년 동안 일본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며 놀면서 스트레스 없이 지내다가 지금은 미국으로 돌아와 월급은 적지만 스트레스 없는 직업을 선택하여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별한 목표도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네,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게 잘 사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또 그렇게 미친듯이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그런 삶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놓아 버렸으면 이제 편하게 살면 되죠. 그렇게 살아도 되는지 물으시니 저는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지구를 생각해도 문제없고, 미국을 생각해도 문제없고, 질문자 개인을 생각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마음이 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미친 듯이 살았던 그 관성, 중독성이 아직 덜 빠져서 그렇습니다. 그 습성이 아직 무의식 세계에 남아 있어서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허송세월 보내는 것 같은 심리적 불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담배에 중독이 되었다면 더 좋은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 것과 같고, 술에 중독이 되었다면 더 좋은 술을 먹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담배를 피운다고 해도 안 피우는 것보다는 못하고, 아무리 좋은 술을 먹는다고 해도 안 먹는 것보다는 못하지요. 탁 내려놓고 안 먹는 쪽으로 가버리면 아무 일 안해도 되는데, 확연히 깨닫지 않으면 좋은 술과 담배를 보면 마음이 끄달리게 됩니다.

좋은 술과 담배를 먹는 친구들을 보고 '내가 세상에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면 아직도 옛날의 중독성의 잔재가 나한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술, 담배를 안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더 좋은 술, 더 좋은 담배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 것처럼 아무리 사람들이 돈을 태산같이 쌓고 지위를 높여가도 그것이 내가 가야 할 해옥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보고 불안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달음질치며 쫓아가더라도 그 끝이 낭떠러지라면 거기에 내가 휩쓸려 따라갈 필요가 없지요. 그런 것처럼 질문자에게는 아직도 옛날의 그 잔재가 남아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카르마에도 관성의 법칙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습성에 의해서 현재 살아갑니다. 아직 과거의 습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으로는 아무리 '안 되겠다'고 결정해도 무의식 세계에서는 계속 그 쪽으로 나아가려고 해서 심리적 갈등이 생기니 불안한 것입니다. 조금 더 놀면서 기다리면 곧 괜찮아집니다.(웃음)

​예전에는 너무 욕심으로 살았던 것 같고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사는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사는 것은 좋은데 게으르게 살면 안 되지요. 시간을 많이 낼 수 있다면, 뉴욕에도 밥을 못 먹어서 굶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식사를 제공하는 봉사단체에 가서 봉사를 해도 되지요. 주위를 둘러보면 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왜 방 안에만 가만히 있으려고 해요? 명상을 해도 되고 요가를 해도 되고 봉사를 해도 됩니다. 할 일은 늘 있습니다.

'내가 재벌이 되겠다'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욕심은 내가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때 하는 말입니다. 좋은 대학을 가고 싶은데 공부는 하기 싫다, 실력은 안 되는데 성적은 잘 받고 싶다, 이런 것이 욕심입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욕심인지 욕심이 아닌지의 기준은 간단합니다. 그 목표가 달성되지 않았을 때 좌절하고 절망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러나 안 되었을 때 '이래서 안 되네. 저렇게 해볼까?, '어, 이것도 안 되네. 요렇게 해볼까?' 이렇게 탐구하면 아무리 큰 목표를 세워도 그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대부분 욕심 때문입니다. 학생들도 공부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자기 실력 이상으로 평가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도 자기 실력 이상으로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죠. 그냥 자기 실력껏 하면 됩니다. 대충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되 평가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은 사람이 하고 뜻은 하늘이 이룬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늘이 전부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삶이 훨씬 더 편안해지고 행복해집니다.

그럼 그냥 큰 목표 없이 지금 다니는 직장에 편안하게 다니면 되겠네요.

다람쥐가 무슨 목표를 향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목표가 있는지 다람쥐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원래 인생에는 그런 뚜렷한 목표란 것이 없습니다. 그냥 밥 먹고 사는 겁니다. 밥 먹고 살면서 여유가 있으면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을 하고 살면 좋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너무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인생살이가 짐승보다 못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이 얼마나 하찮으면 나는 새를 부러워합니까? 그만큼 인생이 고달프다는 얘기지요. 그것은 인생에서 너무 과다한 목표를 정해서 그래요.

가볍게 살아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타인에게 보시도 하고,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생기면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활동도 하고, 이렇게 살아가면 저절로 내 재능을 어디에 쓸 것인지 목표가 생겨납니다. 지금처럼 돈 번다는 개념이 아닌 쪽으로 목표가 저절로 생겨납니다. 그러니 지금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은 과거의 중독성이 더 빠져야 하니 그동안에는 방황을 좀 하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자기 삶의 여유를 갖고 편안한 상태에서 봉사도 하고 보시도 하면서 살면 자기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그 외 법륜 스님의 최근 책 야단법석 중에서 ....

 

아무리 자식이라 하더라도 부부 싸움에는 절대로 끼어들면 안 됩니다. 내버려 둬야 합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이혼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성년이기 때문에 내가 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내가 교훈으로 삼아서 '부부는 누구나 이렇게 싸우고 살긴 하는데, 나도 남편과 이렇게 싸우면 우리 아이들이 참 힘들겠구나'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른끼리는 싸울 수 있지만, 애들을 위해서는 안 싸우는 게 좋겠구나'하고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교훈으로 얻어야지 두 부부의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질문자가 능력이 있어서 부모님의 성질을 고칠 수 있다면 고치세요. 그럴 능력이 있으면 문제 있는 정치인들도 좀 고쳐주지 그래요? 정치인들이 저렇게 싸우는 것도 놔두고 살면서 엄마 아빠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그것을 고치려고 그래요? 별 문제 없어요.

부모님이 저렇게 싸우면서도 그동안 나를 안 버리고 키워준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나게 고마운 일이에요. 그러니 두 분에 대해서는 항상 '어머니 고맙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 전화가 오면 "네네, 알았어요. 오늘도 싸우셨어요? 이번엔 누가 이겼어요?" 이렇게 웃으면서 받아주고 마음을 즐겁게 가지세요. 그러면 어머니도 처음에는 성질을 내다가 나중에는 웃고 말아요.

그런데 질문자가 중재를 선다고 엄마 편이 되어서 아빠에게 이야기해 주려 하거나, 아빠 편이 되어 엄마에게 이야기해 주려 하면 안 됩니다. 엄마의 이야기에 내 감정이 자꾸 빠져 들어간다면, 엄마에게 전화가 오면 귀에다 먼저 이어폰을 꽂아 놓고 계속 입으로만 "네네, 어머니 그러셨군요" 해도 죄가 안 됩니다. 어머니는 답답하니까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지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만 줘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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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이 작은 통 속에 살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찾아가서 "도움이 필요하냐?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하니까 "비켜라. 햇빛 가리지 마라"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남을 도울 때 '그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자칫하면 도와주고 도리어 내가 상처를 입을 수가 있어요.

제가 인도에 구호활동을 하기 전에도 인도의 아이들은 다 잘 살았어요. 그런데 제가 가서 초등과정 공부를 시키니까 그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낸 것입니다. 제가 만약에 초등과정 공부를 안 시켰으면 그 아이들이 중학교에 갈 생각은 안 했겠죠. 중학교에 가고 싶은데 안 보내주면 섭섭하죠.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대학에 안 보내주면 섭섭하죠. 섭섭하니까 원수가 돼요. 우리가 도와주면 나중에 과보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래서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후회하게 되어 노후가 힘들어요. '내가 도와주었다' 이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도와주면 원수 되기가 쉽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면 "내 보따리 내놔라" 이렇게 하기가 쉽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도 왜 돕느냐? 아이들은 공부가 필요해요. 비록 원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도울 것은 도와야 합니다. "내 보따리 내놔라"하더라도 죽어가는 생명은 건져야 합니다. 칭찬받으려고 어떤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길 가는 사람과 원수 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다 좋은 관계들이 원수가 되는 이유는 기대 심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기대 심리를 버리는 것을 '무주상보시'라고 합니다. 기대 심리를 갖는 것을 '상을 짓는다'고 하고, 기대 심리 없이 베푸는 것을 상이 없이 베푼다고 해서​ '무주상보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한다고 반드시 좋은 과보가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남을 돕고도 기대가 크면 실망이 커지는 법입니다.

 

​다음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암환자와의 즉문즉설 중 일부.

 

​그러면 아직 어린 제 아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건 자기 문제지요. 아들이 스무 살이 안 됐으면 내가 보호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지만, 스무 살이 넘었다면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어요. 지금 아들이 스무 살이 안 됐다 하더라도 질문자가 죽으면 그 책임은 면해져요. 죽으면 빚도 면해져요. 왜냐하면 갚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엄마가 죽거나 엄마를 잃어버렸거나 실종됐거나 하면, 이 아이는 보호자가 필요하잖아요. 그럼 누군가가 보호자가 되어줄 거예요. 그건 질문자가 죽고 난 뒤의 문제예요. 가톨릭 신자이니 주님을 믿으세요. 주님께서 다 알아서 돌볼 사람을 보내주실 거예요.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편안히 행복하게 잘 사세요. 우리의 명이라는 것은 저 하늘에서 보면 찰나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에요.​ 마흔 살에 죽으면 어떻고, 쉰 살에 죽으면 어떻고, 백 살에 죽으면 어떻습니까. 오래 사는 게 무슨 복입니까. 그게 복이면 주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백 살까지 살게 하지 왜 서른세 살에 죽게 해요? 질문자가 섬기는 주님이 서른세 살에 죽었는데 질문자는 서른세 살보다 더 살았으니 행운이지요. 그런데 뭘 그걸 가지고 울고 그럽니까. 생글생글 웃어요.

바로 이 순간이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기회란 말이에요. 왜 질문자에게 주어진 기회를 박찹니까? 그러니까 노력하면 안 돼요. 노력한다는 건 하기 싫다 이 말 아니에요? '믿어야지' 이 말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 아니에요? 뭘 믿으려고 노력해요. 그냥 믿어야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해보세요. 아침에 눈 떠서 살아있다는 것만 감사해야지 내일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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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40대 전업 주부입니다. 2~3년 전부터 애들이 크면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이 자꾸 듭니다. 아이들이 작년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시간적으로 여유가 굉장히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내가 왜 행복하지 않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제 꿈을 잃고 살고 있더라구요. 이제 마흔 살인데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정말 내가 원하는 꿈을 향해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 곧 재앙이 닥치는 일이 있습니다. 재앙이 닥치면 이 문제는 금방 해결이 됩니다. 남편이 돌아가신다든지 직장을 잃는다든지 아이가 중병에 든다든지 자기가 암에 걸린다든지 이런 생각지도 못한 재앙이 닥치면 이 고민은 금방 해결이 됩니다. 그때 질문자는 재앙이 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재앙이 닥쳤을 때 '아, 재앙이 오니까 이 고민이 해결이 되네, 신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지금 질문자가 고민하는 것을 해결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계신다면 재앙을 줄 겁니다. 이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기도입니다. 재앙이 와야 이 문제가 금방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기셔서 재앙을 안 주면 질문자는 이 문제로 계속 고민하면서 살 겁니다. 육체는 편안한데 정신적으로 계속 괴로워 하면서 살 거구요. 반면 재앙이 닥치면 육체적으로 생활하는 게 엄청나게 힘들어지겠지만 정신적인 이 문제는 사라져버려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어요? 그래도 두 번째가 낫겠지요. 물론 이 두 가지 다 본인은 바라지 않겠지요.

그러면 세 번째, 앞의 두 가지 길을 벗어난 제 3의 길이 있습니다. 우선 주님께 내가 살아있음에 대해 감사 기도를 해야 해요. "주님의 은총으로 오늘도 저는 살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밥도 잘 먹었고 남편도 직장을 잘 나갔고 아이들도 건강한 것에 대해서 먼저 감사 기도를 하세요. 그럼 감사한 마음이 들면 은혜를 갚아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럼 은혜를 갚기 위해 주님께 무엇을 해드려야 할까요? 주님은 온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주님은 뭐라고 했느냐.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은 곧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니라." 나에게 하고 싶으면 가장 작은 자들인 이 사람들에게 하라고 다섯가지를 얘기했어요. 질문자가 만약에 이렇게 좋은 조건에서 살고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주님의 은혜를 갚는 길은 다섯 부류의 사람들을 도우면 됩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병든 자에게 약을, 나그네 된 난민들을 보살피고, 감옥에 갇힌 양심수들을 뒷바라지 하고, 이렇게 해서 주님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 나가야 해요. 이렇게 은혜를 갚으면 이 행복이 계속 유지가 되는 겁니다. 물을 퍼내면 계속 새 물이 나오듯이요.

그러니 질문자가 앞으로 복된 삶을 살려면, 돈 몇 푼 더 벌려고 하기보다 성당 같은 곳에 가서 같이 밥도 짓고, 청소도 하고, 배고픈 사람들 점심 주는 데에서 봉사를 하든지 이렇게 한번 해보세요. 그러면 자기 마음 속에 생기가 돋아나고 기쁨이 생길 것입니다. 남편한테 맨날 일찍 들어오라고 잔소리하고 아이 보고 공부하라고 야단치던 게 싹 없어지고 그냥 자기 삶을 기쁘게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소소한 것들 갖고 시비가 안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 원천을 마련해준 남편이 항상 고마운 겁니다. 그래서 밥 한 끼도 좀 더 따뜻하게 차려주게 됩니다. ​

이런 제3의 길인 은혜를 갚는 길로 갈래요, 재앙을 받아서 내일부터라도 정신없이 사는 길로 갈래요, 재앙을 안 주면 그런 고민을 계속 하면서 자학하고 우울증 걸려서 사는 그런 길로 갈래요, 어느 쪽으로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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