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평론가 신현준(성공회대 교수)은 가사 속에 ‘시간’이 많이 보인다며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인간의 존재와 시공간 사이의 대면이 이보다 진지했던 적은 없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조동진은 푸른곰팡이의 동료 뮤지션과 함께 ‘꿈의 작업 2017-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라는 제목의 연합 공연을 다음달 16일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열 예정이었다. 좌석은 이미 매진됐다. 그러나 조동진은 끝내 이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됐다.
1966년 미8군 밴드에서 음악을 시작한 조동진은 록그룹 쉐그린과 동방의 빛에서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수만과 서유석이 부른 ‘다시 부르는 노래’와 양희은의 ‘작은 배’를 작곡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79년 솔로 1집 앨범을 발표했다. ‘행복한 사람’과 ‘겨울비’가 수록된 이 앨범은 훗날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 발표한 2집 앨범 수록곡 ‘나뭇잎 사이로’와 1985년 3집 앨범에 실린 ‘제비꽃’은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조동진은 시적 가사와 서정적 멜로디로 ‘한국의 밥 딜런’에 비유됐다. 후배 뮤지션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조동익 사단’을 이뤘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레이블인 동아기획을 이끌었고 1990년대엔 동생인 조동익ㆍ조동희 남매와 장필순, 이규호 등과 함께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을 꾸려서 활동했다. 현 소속사 푸른곰팡이는 하나음악의 후신이다.
조동진은 대중음악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주의’ 대중음악인으로 평가 받는다. 1994년 예술의 전당은 한국 대중가수 최초로 조동진에게 공연장 문을 열어 그를 예우했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조동진은 한국 대중음악계 모더니즘의 창시자”라며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대중음악의 세련미를 완성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김작가는 “선구적이면서도 특유의 감성을 녹여내 동시대와 호흡하는 그의 음악 세계는 유재하와 장필순으로 이어지며 한국 대중음악의 한 조류를 형성했다”며 “1980~1990년대 대중음악계는 조동진을 빼고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동진은 1996년 5집 앨범 발표 이후 제주에서 칩거해 왔다. 2001년 ‘하나 옴니버스’와 2015년 ‘푸른곰팡이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했을 뿐 음악 활동을 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20년 만에 새 앨범 ‘나무가 되어’를 발표하며 가요계로 돌아왔다. 당시 그는 “어둡고 가려진 곳에서 고단한 하루를 이어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은, 내 오랜 노래 벗들에게 이 나직한 마음을 전해봅니다”라고 담담히 소회를 밝혔다. 이 앨범은 올해 2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다. 이후 조동진은 1~5집 앨범 리마스터링 작업에 몰두했다.
다음달 열리는 공연은 13년 만의 무대이자 ‘조동진 사단’이 1998년 이후 19년 만에 모두 모이는 자리가 될 예정이었다. 공연기획사 모스트핏의 김웅 대표는 “우선 장례를 잘 치른 뒤 가족 및 동료 뮤지션들과 공연 방향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2남(조범구, 조승구)이 있다. 발인은 30일 오전 7시. 빈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 9호실이고, 장지는 경기 벽제 승화원이다.
포크음악 거목 조동진 별세 38년동안 6장 음반 남겨 적지만 긴 생명 주옥같은 노래들 ‘행복한 사람’‘제비꽃’
다음달 후배들과 예정된 무대 ‘꿈의 작업’ 미완으로 끝나나
한국 포크음악의 거목 조동진이 28일 세상을 떠났다. 푸른 곰팡이 제공.
한국 포크음악을 상징하는 거목 조동진이 28일 새벽 3시43분 별세했다. 향년 70. 고인은 방광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고 있었다. 수술을 앞두고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겼지만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20년 만에 새 앨범 <나무가 되어>를 발표하고, 오는 9월16일 12년 만에 공식적으로 무대에 서며 지속적인 활동을 예고하던 상황이어서 아쉬움은 더 크다. 고인은 푸른곰팡이 후배들과 함께 ‘꿈의 작업 2017 ?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포크계의 대부’란 수식어처럼 그는 한국 포크음악을 대표하며 수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음악뿐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에서 귀감이 되었다. 1979년 1집을 발표하고 38년 동안 6장의 앨범만을 발표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적시려면 우선 자신의 잔을 넘쳐흐르게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내면이 음악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다렸다.“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마음속에 그릇이 있다면 선배님은 서두르지 않고 그 안에 물이 가득 차서 넘치려고 할 때 작업을 하시는 것 같다”(장필순)거나 “호숫가에 돌을 던져서 파장을 일으키려면 그 호수가 잔잔해야 하듯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박용준) 같은 후배 음악가들의 증언처럼 침묵조차도 그에겐 음악 행위의 일부였다.수많은 후배들이 평소 고인을 따랐다. ‘거목’이란 수식어처럼 후배들이 조동진이라는 큰 나무 아래 모여들었다. 조동익, 장필순, 한동준, 이병우, 정원영, 윤영배, 고찬용, 유희열 등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이름들이 그와 함께했고, ‘조동진 사단’이란 말이 생겨났다. 고인은 1992년 후배들과 함께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을 출범했다. 레이블이나 소속사의 개념이 아닌 말 그대로의 공동체였다. 함께 음악을 고민하고 이야기하며 대중음악의 한 영역을 구축했다. 80년대 동아기획의 뒤를 이으며 시작한 하나음악은 지금은 푸른곰팡이로 이름을 바꿔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대중에게도 많은 노래를 남겼다. 1979년 발표한 첫 앨범에서 ‘행복한 사람’이 큰 인기를 얻었다. 2집에서 ‘나뭇잎 사이로’, 3집에서 ‘제비꽃’ 같은 노래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티브이에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공연 위주로 활동하며 언더그라운드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자리했다. 과작이었지만 그의 호흡처럼 노래들은 긴 생명력을 지녔다. 라디오에선 여전히 그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많은 후배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새롭게 다시 부르고 있다.그의 음악은 흔히 ‘서정적’이란 말로 표현됐지만 그 서정을 연출해내기 위해 구도자처럼 치열하게 음악에 집중했다. 조동진이란 이름에는 도식적으로 포크란 장르가 따르지만 그는 늘 다양한 사운드를 실험했다. 2집에 실린 ‘어둠 속에서’나 5집의 ‘새벽안개’는 대담하고 진보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었고, 작년에 나온 <나무가 되어> 안에는 포크, 록, 팝, 일렉트로닉 같은 음악들이 한데 어우러져 엄청난 기운을 뿜어냈다. 그 치열하게 쌓아올린 사운드 위에서 조동진은 관조하듯 시를 쓰고 낮고 유장하게 노래했다.음악평론가 신현준은 조동진의 음악에 대해 “그의 음악은 세상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감각해야 하는지, 경험해야 하는지를 아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던 많은 사람들이 조동진을 ‘짝사랑’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후배 음악가 윤영배 역시 “이런 노랫말, 이런 언어가 이 세상 그 어떤 선언적인, 그 어떤 가파르게 내뱉는 구호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고 말했다.<한겨레>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준비하고 있던 공연에 대해 “새로운 노래들이 중심이 되겠지만 오래된 노래들을 다르게 풀어보는 것도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노래들은 이제 불릴 수 없게 됐다. 푸른곰팡이 관계자는 장례가 끝나는 대로 예정된 공연을 추모공연 성격으로 바꿀지 취소할지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빈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30일 새벽 5시30분이다.김학선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