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 사망한 ‘스페인 독감’에서 코로나19를 읽는다

 이수경의 책에서 만나는 환경 이야기 <독감>
기후변화로 감염병 증가 불가피…공동체 의식 회복으로 맞서
세계적으로 대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1918년 미국 캔자스주의 한 야전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미군들 모습. 미국에서만 50만 명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숨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세계적으로 대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1918년 미국 캔자스주의 한 야전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미군들 모습. 미국에서만 50만 명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숨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이 발생해 기피대상이었던 우리나라가 최근에는 방역 성공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투명한 정보공개로 사재기와 같은 사회 기반 시스템의 붕괴를 막았고 적극적인 진단 검사로 코로나19의 확산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켜 코로나19 방역의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3월11일 세계보건기구(WHO)가 미루고 미루던 전염경보 6단계 중 최고 단계인 ‘세계적인 전염병 대유행(팬데믹)’을 선언하면서 유럽과 미국 등 비아시아권 국가에서도 코로나19에 비상등이 켜졌다. 해마다 찾아오는 흔한 질병인 줄 알았던 독감이 공포의 대상이 된 건 코로나19의 사망률(감염자 중 사망자)과 전염력 때문이다.

일반적인 독감의 사망률이 0.1%인데 코로나19의 사망률은 3~4%로 30~40배에 달한다.(▶▶코로나19, 독감과 6가지가 다르다) 게다가 코로나19의 전염력은 일반적인 독감에 비해 강해 “효과적인 통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전 세계 성인의 40~70%가 신종 코로나에 감염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꾸준히 방역을 해오던 우리 눈에는 한없이 코로나19 대응에 미적거리는 것처럼 보이던 세계보건기구와 미국, 유럽이 3월 중순 이후 태도를 바꿨다. 우리나라는 물론 먼저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중국, 홍콩, 싱가포르에서 효과가 있었다고 여겨지는 모든 방역대책을 시행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국경과 도시, 직장과 학교 등 사람이 모이는 모든 곳을 봉쇄하고 있다. 코로나19의 발병사태가 심각하기도 하지만 코로나19가 미국과 유럽이 갖고 있던 오랜 트라우마인 ‘스페인 독감’에 대한 공포를 깨웠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 수용을 위해 임시병원으로 탈바꿈한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한 대학 경기장에 30일(현지시각) 병상들이 들어서 있다. 필라델피아 AP=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 수용을 위해 임시병원으로 탈바꿈한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한 대학 경기장에 30일(현지시각) 병상들이 들어서 있다. 필라델피아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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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만 명이 죽은 ‘스페인 독감’ 트라우마

1918년, 전 세계 인구는 4억5000만에서 3억5000만 명으로 1억명이 줄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고려하더라도 인구가 한 해에 1억명이나 줄어든 것은 이 해에 전 세계적으로 스페인 독감이 대유행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전 세계 사망자의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2000만∼5000만 명, 많게는 1억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에게 가장 두려웠던 전염병인 흑사병이 기승을 부렸던 1347~1351년의 5년 동안 2500만 명이 사망한 것과 비교해도 스페인 독감을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것에 이의를 달 수 없다. 어떤 전염병이나 전쟁, 기아도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예가 없었다.

‘독감’(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사이언스 북스) 표지.
‘독감’(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사이언스 북스) 표지.
코로나19 방역에서 최우선 과제라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느라고 심심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면, 혹은 가을에 다시 찾아올지도 모를 코로나19에 대비하고 싶다면 스페인 독감의 미스터리를 파헤친 ‘독감’(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3)이라는 추리소설 형식의 과학교양서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은 발행된 지 좀 오래되었기는 하지만 내용이 유익하고 교양서로서는 드물게 재미있다. 아니 웬만한 추리소설은 따라올 수도 없을 만큼 재미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18년 봄, 스페인 독감이 첫 번째로 엄습했다. 전쟁의 와중이라 다른 나라에서는 질병의 궤적을 추적하지 않아 특별한 보도를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군인들이 하도 독감에 걸려 전투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었다는 군대의 기록은 다수 발견된다. 단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던 스페인만이 신문기사를 검열하지 않아 독감의 상황이 고스란히 언론에 드러났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800만 명이 독감에 걸리고 국왕이었던 알폰소 13세도 독감에 걸렸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다른 국가들이 언론통제로 독감을 숨기고 있을 때 중립국이어서 이 질병에 주목할 여력이 있었던 스페인만이 독감을 보도했고, 발병 원인이나 피해 정도와는 무관하게 결국 역사에는 스페인 독감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적극적인 검사로 우리나라가 코로나19의 문제 지역으로 지목되었던 것과 유사한 이유다.(그러게..스페인은 억울하겠다. 나도 이름만으로 스페인에서 된 바이러스인 줄 알았다.)

1918년 시애틀의 한 전차 승무원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승객의 탑승을 거부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1918년 시애틀의 한 전차 승무원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승객의 탑승을 거부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스페인독감이 처음 발병했던 봄에는 전쟁의 와중이기도 했고 사망률이 크게 높지 않은 상태로 곧 여름을 맞아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가을, 다시 찾아온 스페인 독감은 매우 강한 전염성을 띠고 특히 젊고 건강한 청년들에게서 높은 사망률이 나타나면서 살인 독감으로 불리게 되었다.

스페인 독감은 미국의 평균수명을 무려 50년 전 수준으로 돌려놓았다. 1917년과 1919년 미국인의 평균수명이 51세였던 데 반해, 스페인 독감이 유행한 1918년에는 39세로, 10년 이상 낮아졌다. 스페인 독감으로 미국에서만 50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뉴욕에서는 1만 9000명이 사망했다. 더구나 연령이 높아지면 사망률도 높아지는 독감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스페인 독감은 젊고 건강한 청년들의 사망률이 높아 더욱 두렵게 여겨졌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의 연령대별 사망률. 20∼30대 사망률이 가장 높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1918년 스페인 독감의 연령대별 사망률. 20∼30대 사망률이 가장 높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이 책에서는 해마다 발생하는 독감이 왜 1918년에는 그토록 큰 피해를 끼쳤는지, 젊은이들이 주로 피해의 대상이 된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스페인 독감에 대한 역사적 사실, 이를 규명하기 위한 과학자들 간의 경쟁, 스페인 독감의 여파로 벌어진 돼지독감 백신을 둘러싼 소동과 홍콩 독감까지 스페인 독감은 물론 그것이 남긴 영향까지도 흥미진진하게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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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코로나19의 위기에서 벗어날 기술적 방법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혹시 찾아올 가을의 코로나19 대유행에서 우리를 구제할 과학적 방법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지금은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는 방역대책도 지나봐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나라 방역대책의 기술적 성공이 위안이 되지도 불안을 사라지게 하지도 않는다.

이 시기에 이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이 책에서는 하지 않은 이야기, 기술이나 과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전염병을 둘러싼 소동과 미담과 같은 사회 공동체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다.

“결핵과 같은 질병들은 인구가 밀집한 도시지역에서 떠나지 않았고 런던과 같은 도시에서는 전염성 질병에 의한 사망률이 하도 높아서 1900년 이전까지는 꾸준한 인구의 유입이 없이는 도시의 인구를 유지 할 수가 없었다. 20세기 초반에 전염병의 원인이 밝혀지면서 5천년 전, 도시가 생겨난 이후 처음으로 도시를 유지할 인구를 스스로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67쪽)

14세기에는 흑사병이 발생하자 도시의 귀족들이 오염된 환경을 피해 도시를 비우면서 도시가 기능을 잃었지만, 21세기에는 코로나19가 발생하자 공황에 빠진 도시민들의 사재기와 국제적인 물류시스템의 순환에 문제가 생기면서 도시가 기능을 상실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어느 작은 지역의 문제로도 전 세계 도시의 기능이 정상 작동을 멈출 수 있다는 세계화를 전 세계 시민들이 피부로 실감하고 있다.

도시가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고 우리나라는 무려 80% 이상의 인구가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그림 참조) 도시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인구밀도가 높고 주로 2, 3차산업이 밀집한 지역을 도시라고 부른다. 따라서 도시는 밀집한 인구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하기 쉽고 생필품을 외부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기 때문에 전염병과 같은 재해가 발생하면 도시를 운영하는 시스템이 오작동을 일으킨다. 코로나19로 드러난 위기는 그래서 전염병의 위기이기도 하고 도시의 위기이기도 하다.

*자료: UN, World Urbanization Prospects, the 2018 Revision, 2018. 8 *도시화율은 전체인구 중에서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비율
*자료: UN, World Urbanization Prospects, the 2018 Revision, 2018. 8 *도시화율은 전체인구 중에서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비율
앞으로도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은 더 자주 더 파괴적으로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기후변화로 콜레라, 홍역과 같이 이미 인류가 정복했다고 믿어왔던 질병이 다시 위협이 되고 기온의 상승으로 뎅기열이나 에볼라와 같이 열대와 아열대에서만 나타나던 질병이 더 넓은 지역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어떤 전염병이 더 발생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전염병의 발생지역과 시기가 증가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뿐 아니라 외부충격에 취약한 도시에서는 언제든 작은 시스템의 오작동이 거대한 폭동으로 변할 수 있다. 자원이 부족하기도 전에 자원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지는 건 국가 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코로나19로 드러난 인종차별, 지역 차별, 세대 차별은 기후변화로 인한 외부충격에서도 언제든 자연적 재난보다 먼저 온다.

재난은 요양병원, 정신병원, 장애인, 홀몸노인, 이주노동자 등 우리 사회 시스템에서 소외되었던 약자가 누구였는지를 드러내게도 하고, 의료, 구급노동뿐 아니라 택배, 청소, 돌봄노동 등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우리 사회 시스템을 순환시켜왔던 노동의 가치를 실감하게 하기도 한다.

메르스의 경험, 코로나19 방역 초기의 실수를 신속하게 교정해나가면서 오히려 우리나라의 코로나19 방역은 성공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세계에서 요청이 쇄도한다는 진단키트나 너나없이 도입한다는 승차진료(드라이브 스루)가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이번 우리나라의 방역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기술적인 성공이 아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사재기로 인한 혼란이 없었던 우리나라의 사례는 투명한 정보공개와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의 합작품이다. 지역갈등의 대표지역으로 불리던 광주와 대구가 보여준 협력, 유일하게 부족했던 자원인 마스크를 오히려 이웃과 나누었던 마스크 나누기, 격리된 코로나 확진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나선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 등, 우리 사회는 코로나19를 통해 혐오가 아니라 성숙한 공동체 의식을 키웠다.

코로나19로 드러난 도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도시탈출이 아니라 도시에서 부족한 것으로 여겨졌던 공동체 의식의 회복이다. 우리가 자랑스러워도 되는 건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성공이다. 위기를 기술로만 해결할 수는 없다. 공동체의 선택은 위기를 기회로도 재앙으로도 만든다.

이수경/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