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달팽이

Haiti 지진참사에 울어버리다..ㅠ.ㅠ

거울닦는 달팽이 2010. 1. 1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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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약자는 보지마세요..ㅠ.ㅠ

 

 

삶은 고통이다.

죽음이 바로 곁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고 살아간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냐고 울부짖는 아이의 절규에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지고 만다..ㅠ.ㅠ

 

아래의 사진들은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stop 버튼을 누른다.ㅠ.ㅠ

잠들기 전에 컴에 앉는 상태라서 악몽이 두려운 것이다..ㅠ.ㅠ

 

수많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죽어나갈 수 있는 것일까...

현기증이 밀려오고, 정말 가위눌리는 악몽속을 헤매는 느낌이다.

 

아이야.. 

어찌 알 수 있겠니...?

우리가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

이토록 가혹한 재앙이 인간에게 닥치는 이유를...ㅠ.ㅠ

우리, 죽은 후에 신에게 가서 이유를 명확히 말해 보라고 다그치자..

그때엔 지금보다 더 큰 소리로 따지고 화내자꾸나!!!..ㅠ.ㅠ

 

내가 읽은 <신과 나눈 이야기>에선

천재지변을 당해 함께 죽음으로 떠나는 영혼들은

전생에서부터 그렇게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한 영혼들의 그룹이라고 하더라만,

어찌 우리가 알수 있을까..ㅠ.ㅠ

 

오로지

 이런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타인의 아픔을 바라보는 순간

그들의 고통이 내 아픔인것처럼 느껴져

울컥 함께 울어버리게 되는 현상....ㅠ.ㅠ

 우리는 남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같다...

 

 

 

U2의 one 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결국 하나라는 사실...

그것을 알며 느끼게 된다면

이 지상에서의 인간끼리의 죽고 죽이는 전쟁도 없어질 뿐더러,

먼나라에서 일어나는 이토록 가혹한 천재지변에

내 일처럼 아파 도우려는 마음이 간절히 생길 것 같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떤 경로로든

이들을 도우려는 손길이 많아지고,

복구작업이 원활이 이루어져

이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빨리

덜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할 뿐...ㅠ.ㅠ

 

그리고,

한끼 식사값이라도 아껴서 도네이션 하는 것도...

 

현재 미국의 뉴스를 접하면

공화,민주할 것없이

이 엄청난 비극에 대해서 도움의 손길을 아낌없이 보내고 있음이 느껴진다.

공항이나 항만 도로등이 파괴되어

구호작업이 원활하지 못해서 더욱 문제라고 하고...

 

하지만

남편을 통해 들은 우리나라 정부의 아이티 지원금의 액수를 듣고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정부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다시 한번 실망을 하게 된다.ㅠ.ㅠ

(미국인들은 아이티를 해이리 라고 발음한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가슴이 꽉 막힌 듯 아파온다.

 

오로지

나약하고 불완전한 우리 인간은 

재앙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려달라는

 해답없는 질문을 반복하기보단,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재앙앞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되어 그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것이

신이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만이 들 뿐이다.ㅠ.ㅠ

 

 

 

 


 
미국 탐욕이 키운 ‘비운의 아이티’
군사개입·점령 반복, 빈곤 불러와
언론 “미, 구호 적극…새 기회 될 것”
한겨레 정의길 기자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UNOCHA)의 엘리자베스 비르 대변인은 16일 아이티 지진은 유엔이 겪은 최악의 지진이라고 말했다. 아이티의 빈민층 어린이들이 먹는 ‘진흙 쿠키’와 지진 발생 뒤 대통령이 이틀이나 모습을 감추었던 사건에서 보여지는 아이티의 빈곤과 정부 기능 마비 때문이다.

미주 대륙에서는 미국에 이어 두번째 공화국으로 1804년 독립한 아이티가 독립투쟁사와는 어울리지 않게 대표적으로 ‘실패한 국가’로 전락한 원인은 서구 열강의 탐욕스런 침탈, 특히 20세기 이후 군사개입과 점령을 반복하며 오락가락했던 미국의 정책 때문으로 지목된다. 독립 이후 34번의 쿠데타를 겪은 아이티는 최근에는 허리케인 피해까지 반복되는 환경재앙까지 겹쳐 정치·사회·경제 인프라는 사실상 붕괴했다.

흑인 노예들의 국가라는 이유로 국가 승인을 거부했던 미국은 19세기말부터 개입으로 정책을 바꿔 1888년 미 해병대가 군부 반란을 지원했다. 미국은 1915년 결국 아이티를 점령해, 1934년까지 통치했다. 2차대전 이후 아이티가 겪은 참상은 더욱 끔찍했다. 1957년부터 1971년까지 ‘파파 독’이라고 불린 프랑수아 두발리에 대통령 독재 치하에서 3만명이 살해됐다. 그의 사후에도 19살 아들인 ‘베이비 독’ 장클로드 두발리에가 세습해, 아버지의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아이티에 군사·경제적 지원을 하던 미국은 결국 1986년 레이건 행정부 시절 베이비 독에 압력을 넣어 하야시켰다.

1990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취임 몇달만에 쿠데타로 망명에 올랐고, 이 와중에서 1500명이 살해됐다. 미국으로 보트를 타고 가는 대규모 망명사태가 벌어져, 미국 정부가 봉쇄령을 내리기도 했다. 결국 미국의 주도하에 다국적군이 파견돼 군사정부를 축출하고 아리스티드를 다시 복위시켰다. 1년만인 2004년 다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수도로 진격하는데도, 미국은 아리스티드의 실각을 묵인했다. 빌 클린턴 시절 복위시켰던 아리스티드를 조지 부시 정권은 퇴짜를 놓은 것이다.

이런 정치혼란 속에 두 차례 허리케인이 강타해 각각 1600명, 3천명이 죽는 연속 대재앙에 시달렸다. 2008년에도 한달만에 4차례의 허리케인으로 아이티 국토 전역을 폐허로 변했다. 이는 산림의 98%가 남벌되고, 지표층이 쓸려나간 환경파괴로 더욱 악화됐다. 곡물가가 세계적으로 급등한 식량위기가 더해져, 아이티 주민들은 대통령궁으로 난입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워싱턴포스트>는 “아이티에 대해서는 지속적이고 훌륭한 친선 정책의 역사가 없었다”는 폴 파머 주아이티 부대사를 인용하며, 미국이 구호에 손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이번 지진이 아이티의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의길 기자 Egil@hani.co.kr

 

 


 

통곡의 땅 아이티 역사

 

아이티가 울고 있다

무너져 버린것은 건물뿐만 아니라 그들의 미래와  그리고 인간으로서 인간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자존심 마져 헌 걸레가 되어버린 것이 아이티의 지금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어를 쓰는 독립 공화국이며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노예 50만명의 피 값으로 만들어진 노예의 나라다.

 


아이티에 비극은

토착 인디언인 아라와크족의 땅을 점령한 스페인에 의해 16세기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점령은 곧 인디언의 몰살을 가져왔고 그로인해 멸종에 이르게 된다.

당시 스페인 정착촌은 대개 섬 동쪽 끝부분에만 드문드문 있었고. 케이맨 제도에 기지를 둔 프랑스 해적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섬의 서쪽 끝부분을 장악해서 농장을 세워 노예착취로 상당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791년 8월 투생루베르튀르, 데살린, 페숑 등의 흑인지도자 아래 뭉쳐 12년 동안 노예 소유주들이 끌어 모은 무장 세력들, 스페인 침략군, 영국군 6만 명(한때 7일 동안 일곱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다)을 잇따라 물리쳤고, 마침내 대규모 프랑스 원정대도 물리침과 동시에 1804년 원래 아라와크어인 아이티라는 국호 아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노예 소유주였던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아이티를 고립시키는 운동에 앞장선다. 승리한 노예들은 식인종으로 매도당했다. 아이티와의 무역은 제품 구매를 거부당하거나 미국 상인들의 이익에 맞게 조작됐다. 아이티 독립 승인은 62년 동안 거부당했다.

한편, 아이티인들은 그들의 피만이 아니라 현금으로도 독립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프랑스는 독립의 대가로 1억 5천만 금화 프랑(오늘날 금액으로는 약 2백10억 달러)을 요구했다. 노예 소유주들과 그 상속인들에 대한 보상금이라는 것이었다.

첫번째 분할 지급액 2천4백만 프랑의 지급 기일이 도래하자, 아이티(프랑스 해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는 그 돈을 프랑스에서 빌려 오지 않으면 안 됐고, 이 때문에 아이티 경제는 옛 식민지 주인들이 주무르게 됐다.

아이티에 대한 프랑스의 금융 지배는 1915년 미국이 아이티를 침공해 봉기를 분쇄할 때까지 계속됐다.

 

1956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파파 독”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미국은 “공산주의” 쿠바에 대항하기 위해 뒤발리에 정권을 지원했고, 뒤발리에는 통통 마쿠트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파파 독”의 뒤를 이어 “베이비 독”이 1971년부터 1986년까지 통치한 뒤발리에 독재 정권은 수만 명의 아이티인들을 학살하고, 국고에서 수억 달러를 도둑질하는 등 정권은 오직 그들만의 영화와 그들의 안위를 위해 존재해 왔다.


포르토 프랭스[아이티의 수도] 빈민가에서 해방신학을 설파하던 가톨릭 사제인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1990년 선거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집권한다.


그러나 그의 개혁조처는 외세의 개입에 부딪혀 좌절했다. 통화 가치는 절반으로 떨어졌고 실업이 증가했으며 빈곤이 심화했다.

그도 결국 미국이 훈련시킨 군인들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집권 7개월 만에 쫓겨났다.

3년 뒤인 1994년 9월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자신이 아이티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아리스티드가 권좌에 복귀할 수 있도록 2만 명의 군대를 파병한다고 공표했다.

“민주주의 회복 작전”의 배후 동기는 클린턴이 주장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첫째, 클린턴은 미국 해안으로  몰려드는 수천 명의 아이티 “보트 피플”에 대한 미국 국내의 적대감에 직면해 있었다. 이것은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하면 해결하겠다고 공약한 “위기”였다.

둘째, 이제 막 소말리아에서 치욕을 당한 미국에게는 군사적 성공 사례가 필요했다.

셋째, 미국 당국은 아이티의 군대가 머지않아 민중 반란으로 타도당할까 봐 두려워했다.

넷째. 결정적 요인은 아리스티드 자신이 미국의 볼모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아리스티드는 자신이 권좌에 복귀하는 대가로 국제 자본이 아이티 경제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데 동의했다. 1993년에 그는 저임금 유지, 국유기업 민영화, 관세와 기타 수입 규제 조처 폐지 등을 요구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원조는 가장 중요한 국유기업 아홉 개를 민영화하겠다는 아리스티드의 동의와 노골적으로 연계돼 있었다.


아리스티드 정부가 추진한 이런 정책들은 당연히 빈곤과 불평등 심화를 초래했다.

애초 공약을 지키지 못해 인기가 폭락한 아리스티드 정부는 지금 경찰 폭력과 시위 진압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은 야당 세력을 후원하고 경제의 숨통을 죔으로써 민주주의를 계속 훼손하고 있다. 복수는 계속되고 있다


아이티는 1949년 9월 한국을 승인하고 1962년 9월 22일 수교를 맺었다.

현재 북한과는 외교가 없다. 1970년 4월 7일 주 아이티 공관이 설치되었고 양국간에 무역협정(1978. 4. 27)이 체결되어 있다. 한국 정부는 아이티 기술연수생 초청, 무상원조 등으로 협력관계를 강화해왔다. 의류, 철강 등이 한국의 주요수출품목이다. 1990년 11월말 대한수입액은 862만 달러이고 대한수출액은 10만 달러이다

 

글 출처:http://blog.daum.net/kimji9711/11764204?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kimji9711%2F11764204

 

 


 아이티 대재앙, 미국과 국제사회가 책임져라"

[해외시각] "경제파탄·정치불안 씨 뿌린 외세, 긴급구호 만으론 부족해"

기사입력 2010-01-14 오후 8:49:03

 

 대지진으로 최대 수십 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으로 보이는 아이티에 대한 국제사회의 구호 노력이 발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미국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의 해외 순방 일정까지 취소하며 아이티 구호에 팔을 걷어붙였다. 클린턴 장관의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유엔의 아이티 담당 특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악의 재난을 당한 나라에 구원의 손길을 뻗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티라는 나라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마음씀씀이가 혹여 '악어의 눈물'이 아니냐는 시선이 존재한다.

아이티는 1804년 노예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한 중남미 최초의 독립국가라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졌다.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 덕분에 한때 카리브해의 부국(富國)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 전 아이티를 지배했던 프랑스와 1915년부터 20년 동안 이 나라를 또 다시 식민 지배했던 미국이 개입이 계속되면서 만성화된 정치 불안과 잇단 자연 재해로 '서반구의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흑인 인구가 중남미에서 가장 높은 비중(90%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아이티의 고통에 대한 주변국들의 무관심을 설명하는 하나의 요소다.

이에 더해 1970년대 이후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 바람 때문에 아이티의
사탕산업은 해외 자본의 손에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농촌에서 도시로 쫓겨난 농민들은 슬럼가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이번 지진으로 초토화된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이재민 다수는 그렇게 도시로 유입된 빈민들이다.

영국의 <가디언>이 13일자
칼럼에서 이번 재앙을 국제사회에 의한 인재(人災)라고 규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칼럼은 "1915년 미국이 아이티를 침공해 점령한 이후부터 절대적 빈곤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아이티 민중들의 노력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의해 폭력적이고 계획적으로 봉쇄됐다"며 "국제사회는 아이티가 겪고 있는 고통만큼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이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원문보기)

한편, 한국 정부는 지진 구호를 위해 인력 35명과 긴급 인도적 지원금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현지로 보내기로 했다. 이에 대해 '
글로벌 코리아'를 지향하고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나라가 최악의 피해를 당한 나라에 쓰는 돈 치고는 너무 인색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 ⓒ로이터=뉴시스

아이티의 고통 앞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12일 오후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강타한 규모의 지진이라면 세계 어느 대도시든 커다란 피해를 입기 마련이지만, 포르토프랭스처럼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티에서 일어난 이 끔찍한 재앙은 그 나라의 길고 처절했던 역사가 낳은 인재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아이티 사람들은 그간 유난히 많은 재앙을 겪어 왔다. 포르토프랭스에서는 1770년 6월 지진으로 수백 명이 사망했고, 1842년 5월 대지진 때는 북부 도시 캡 아이티안에서만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허리케인은 거의 정기적으로 아이티를 파괴한다. 최근에는 2004년과 2008년에 허리케인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 특히 2008년 9월 허리케인으로 고나이브시가 물에 잠겼고, 그나마 있는 기반시설들은 떠내려갔으며,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고 수천 채의 집이 파괴됐다.

아이티는 흔히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불린다. 아이티의 빈곤은 인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무지막지했을 식민지 착취 구조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한 것이며,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조직적인 억압구조가 더해져 초래된 것이다.

앞 다퉈 아이티 구호에 나서고 있는 저 숭고한 '국제사회'는 그 나라가 겪고 있는 고통만큼의 책임이 있다. 1915년 미국이 아이티를 침공해 점령한 이후부터 "절대적 빈곤 상황에서 탈출하려는"(from absolute misery to a dignified poverty) 아이티 민중들의 노력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봉쇄됐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 정부(75%의 지지로 당선)가 외세의 개입에 의해 무너졌던 일이다. 아리스티드 정부는 2004년 국제적으로 지원을 받은 쿠데타에 의해 붕괴됐다. 쿠데타 세력은 수천 명의 주민들을 살해했다. 그 후 유엔은 (2004년부터) 매우 비싼
비용을 들이며 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아이티의 인구 약 75%는 하루 2달러 이하의 돈으로, 56%는 1달러 이하로 살아가고 있다. 수십 년간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adjustment)과 신식민주의적 개입으로 인해 아이티 정부는 국민들을 위해 자금을 투자하고 자국의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국제
무역금융 체제는 아이티 정부의 그러한 빈곤과 무능력을 구조적인 것으로 남겨 놓을 것이다.

포르토프랭스의 지진 피해도 그렇게 설명된다. 1970년대 후반 이래 아이티의 농업은 신자유주의의 가차 없는 공세에 밀렸다. 그에 따라 수만 명의 영세농들은 인구가 밀집된 도시 슬럼가로 쫓겨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입된 포르토프랭스 주민 수만 명은 현재 집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아이티 정의·평화연구소'의 브라이언 컨캐넌
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도시 빈민들은 농촌지역에서 계획적으로 밀려난 사람들인데, 도시 빈민의 인구를 늘려 착취가 쉬운 노동력을 창출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원조·무역 정책에 의해 도시로 오게 됐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집을 지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2004년 쿠데타 이후 국제사회는 아이티를 실질적으로
다스려왔다. 그러나 이번 지진 피해에 대해 긴급 구호를 해주려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바로 그 나라들은 유엔의 신탁통치 기간을 연장하는 문제에 대해 지난 5년 동안 늘 반대표를 던져 왔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농업을 개발하는 쪽으로 투자를 돌려야 한다는 제안들은 늘 반대에 부딪혔다.

2008년 아이티를 강타한 허리케인은 쿠바에도 상륙했지만 거기서는 단 4명의 사망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쿠바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부터 빗겨나 있었고 쿠바 정부는 재난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이번 사태를 통해 아이티를 돕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생각하고자 한다면 쿠바와 아이티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비교해 봐야 한다. 우리는 구호의 손길을 긴급하게 보내기도 해야겠지만, 아이티 국민들과 공공 기관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진정으로 그들을 돕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이티 정부를 통제하려고 한다거나, 주민들의 열망을 억누르려 한다거나, 그 나라의 경제를 착취하려는 시도를 그만 두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저질러 놓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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