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법륜스님 법문 89 : 삼귀의

거울닦는 달팽이 2010. 3. 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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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귀의는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뜻이고 삼보는 불자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보배로써 불법승(佛法僧)을 말합니다. 우리가 불자로서 어떤 모임을 갖거나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삼귀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삶의 목적이 부처님처럼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는 것, 즉 성불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불의 의미는 내가 괴로움이 없는 사람,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자기가 괴롭다면 그것은 중생놀음에 불과합니다.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수행의 가장 기본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든 정진을 하든 무엇을 하든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의 기본이 되는 것을 놓치고 다른 것을 잘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바로 자기가 자기 운명의 주인인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인 사람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지금은 비록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고, 하는 일마다 넘어지더라도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 새로이 시작합니다. 땅에 엎어졌을 때 일으켜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은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이 어린 마음이 어리석은 마음이고 어리석은 사람이 곧 중생입니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집니다. ‘이 정도의 사건이라면 다른 사람을 탓할 수밖에 없어.’라고 변명을 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수행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다 내 마음이 짓는다.’는 전제에 털끝만큼이라도 예외를 둔다면 그것은 벌써 수행에서 어긋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꼭 갚겠다면서 돈을 빌려가서는 갚지 않는다면, 그럴 때도 수행자는 상대를 탓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돈을 빌려준 내가 어리석었다.’고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상대를 원망하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상대를 원망하면 우선 자기가 괴롭고, 돈도 잃고, 사람도 잃어버립니다. ‘돈을 빌려준 내가 어리석었구나. 그냥 주지는 못할망정 받으려고 하는 내가 어리석구나.’ 하고 생각하면, 돈은 잃어도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니 사람까지 잃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는 돈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돈을 못 받으면 아마 내가 전생에 그에게 빚이 있는가 보다고 가볍게 생각하면 됩니다. 지나간 것을 계산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내가 희생되었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사회에서는 의로운 일을 하다가 죽은 사람에게 ‘순교했다, 순직했다’고 말 할 수 있지만 수행자에게는 ‘순교’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나 수행을 재미삼아 잘하다가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수행자는 일시적으로 자기에게 사로잡혀서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할 수는 있지만 그 마음이 오래가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수행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이 쌓여 상처가 되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수행은 탓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삼보에 귀의하면 내 운명의 주인이 내가 되고 온 우주의 주인이 내가 됩니다. 천하 누구도 내 인생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만약 어떤 분이 나에게 무엇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처음에는 내가 바빠서 안 된다고 거절했다고 합시다. 그런데도 그분이 계속 조금만 도와달라고 사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도와주러 가다가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내가 못 간다고 했는데 네가 자꾸 부탁을 하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원망이 계속되면 안 되는 거예요. 또 결혼을 해서 남편이 죽든, 바람을 피우든, 이혼을 하자고 하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상대를 원망하면 내 운명의 주인이 내가 아닙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증오하면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매여 버립니다. 만약 남편이 갑자기 이혼을 하자고 할 때에도 “그래요. 당신과 그동안 잘 지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 남편에게 아무런 원망심이 남지 않는 경지라야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인 것이지요.

  오늘 우리들은 내가 주인 되는 이치를 모르고 내 운명의 밧줄을 늘 다른 사람에게 주고 삽니다. 아내나 남편한테 주고 부모한테 주고 자식한테 주고 온갖 사람들한테 내 운명의 밧줄을 주고 그 사람들이 밧줄을 이리 당기면 이리 끌려가고 저리 당기면 저리 끌려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이 사람 때문에 죽겠다, 저 사람 때문에 죽겠다, 이 사람이 좋아 죽겠다. 저 사람이 싫어 죽겠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태도가 아니라 바깥 경계에 내가 끌려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나 아내가 죽었다고 난리고, 부모가 죽었다고 난리고, 자식이 죽었다고 난리고, 회사가 부도났다고 난리고, 팔 다리가 부러졌다고 난리입니다. 회사가 부도났다고 난리를 치면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회사라는 얘기입니다.

  일상 속에서 늘 깨어 있지 못하더라도 바깥 경계에 부딪칠 때마다 ‘이러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지. 탓하면 나만 손해지.’ 하고 순간 알아차리고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경계에 사로잡히더라도 스승이 “정신 차려! 수행자의 입장을 분명히 해.” 하면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스승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 고집을 피우며 스승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집을 피우더라도 스승이 지적하면 자기를 놓고 얼른 돌아와야 합니다. 천하 사람이 그 사람을 설득해도 안 될 때 스승이 말하면 제정신이 들어야 스승을 섬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승은 그 사람이 훌륭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스승으로 삼기 때문에 스승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해탈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지금 집에 계신 남편이나 아내를, 부모를 오늘부터 스승으로 삼고 그 분이 말을 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예”라고 한번 해 보세요. 처음에는 잘 안 될 거예요. 안 될 때마다 ‘아, 내가 또 내 생각에 사로잡혔네. 스승이 주인인데 내가 또 주인하려고 하네.’ 이렇게 해 보면 얼마나 자기를 고집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짝 정신을 차려서 3일만 하면 깨칠 것이고, 정신을 놓치면 30년을 해도 깨치지 못합니다. 입에서 염불이 좔좔 나오고, 한 번 앉았다 하면 돌부처처럼 앉고, 하루에 3천배씩 절을 하고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을 자신이 확실히 보는 경험이 있어야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스승은 그의 훌륭한 인격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를 내려놓는 점검의 기준이어야 합니다. 이 원칙을 갖고 공부를 해야 진척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공부에 진척이 없습니다.




  우리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고 할 때, 첫째는 이런 이치를 깨닫고,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좋은 법을 만나 해탈의 길을 갈 수 있어,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로 돌아옴을 알아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내가 이 법을 닦아 정진하는, “부처님의 제자 됨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땅에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하는 발원입니다.

  불자는 이렇게 삼보의 발원을 늘 가슴에 새기기 때문에 어떤 모임에 가든, 어떤 사회에 가든 움츠러들거나 휩쓸리지 않고 부처님처럼 숲 속을 거닐듯이 여유롭고 태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삼보의 의미를 바르게 알면 정말 자기 인생의 주인 되는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 2008년 2월호 월간정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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