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술

법륜스님- 법성게 법문 중에서

거울닦는 달팽이 2010. 9. 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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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①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無緣善巧着如意 歸家隨分得資糧 (무연선교착여의귀가수분득자량)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이다리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시고행자환본제 - 이런 까닭으로 수행자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본래의 자리란 때 묻지 않은 본래의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파식망상필부득 - 망상을 쉬지 않고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번뇌망상인 사량분별을 끊지 않고는, 이 업식의 안경을 벗지 않고서는 법의 성품인 존재의 참 성품을 절대로 얻을 수 없다. 는 말입니다.
무연선교착여의 - 아무런 조건 없는 착한 방편으로 뜻대로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귀가수분득자량 - 중생이 집으로 돌아갈 때 자기 분수 따라 양식을 얻어 간다.

이게 무슨 뜻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부처님의 자비의 빗물은 온 중생에게 차별 없이 내리지만 중생은 그 받는 그릇의 모양이나 크기 따라 달리 받아간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집착이나 어떤 조건을 붙여 중생 교화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아무런 차별 없이 일체의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중생은 자기 근기 따라 얻는다는 말이지요.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 ‘다라니’라 하면 ‘진실한 말’ 이란 뜻이지요. 그러니까 이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은 쓰고 또 써도 끝이 없는 무궁무진한 보배로써, 이것으로 법계를 장엄하는 것이 사실은 보배 궁전과 같다. 그래서

궁좌실제중도상 - 궁극에는 중도를 행하여 실상을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

구래부동명위불 - 깨닫고 보니 본래부터 오고 감이 없으니 그 이름을 부처라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삼스럽게 깨달아서 새롭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 부처였다는 것이지요.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②

이것을 법화경에서는 어릴 때 길 잃고 집을 나가 거지로 살다가 오랜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 왔으나 자기를 거지 출신으로 잘 못 알고 사는 아들에게 자기 아들임을 깨우치게 한다는 어느 장자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어떤 장자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들이 어릴 때 집을 나가서는 길을 잃어버려 돌아오지를 않아요. 부모가 그 아들을 열심히 찾았지만 결국 찾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어 그 아들은 거지로 몇 십 년을 살았는데 살다 보니 자기 고향도 잊어버리고, 자기 집과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매일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서 겨우 먹고 살았지요.

이렇게 떠돌다가 어느 날 자기 아버지 집이 있는 그 동네로 가게 됩니다. 대궐 같은 집이었는데, 그 집 대문간에 서서 밥을 얻어먹으려고 하니까 그 집 마루에 어떤 노인이 앉아 있어요. 거지도 만만한 집이어야 밥도 얻어먹으러 들어가는데, 이렇게 집이 너무 크고 웅장하면 보통 얼어서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들어갈까 말까 입구에서 망설이며 서성이고 있는데, 평상에 앉아 대문간을 바라보던 노인이 보니까 아 그 거지가 꿈에도 그리던 자기 아들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내 아들아!” 하고 쫒아 나갔더니 이 아들은 자기를 잡으러 오는 줄 알고 겁을 먹고는 부리나케 도망가요.

그래서 노인이 하인을 시켜 그 아들을 붙들도록 합니다. 그랬더니 이 거지가 너무 놀라서 기절했어요. 그래서 이 장자가 생각하기를 ‘아, 이래서는 아이를 죽이겠구나.’ 싶어서 그냥 내버려 두고 돌아갑니다. 그랬더니 한참 기절해 있다가 다시 일어난 아들은 자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없어져서 살았다 싶어 얼른 도망갔어요. 그래서 장자는 하인에게 거지 옷으로 갈아입히고는 자기 아들인 그 거지를 찾아가게 하지요. 그리고는 “야, 이 사람아, 저기 가면 좋은 집이 있는데, 그 집에 가서 일하면 딴 데 가서 일하는 것보다 두 배의 돈을 주니까 가자.” 고 일하도록 부추긴 것이지요. 그래서 주로 외양간에서 똥 치우는 일을 시켰는데 수고비를 두 배로 주니까 열심히 일했어요.

하루는 이 아버지도 일부러 거지 옷으로 갈아입고 그 아들이 사는 모습을 봤는데, 아들이 그 거친 일을 아주 열심히 하면서 머슴방에서 재미있게 산단 말입니다. 옛날에 떠돌이 할 때와 비교하면 참 잘 사는 게 되겠지요. ‘이게 천국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는 겁니다. 이걸 본 장자는 가슴이 아팠지만 그냥 놔뒀어요. 그래 한참 세월이 흘러 십년이 지나서는 집안 청소하는 일을 시키고, 그 다음에는 하인 중에서도 조금 높은 직급의 일을 맡겼어요. 창고를 관리하는 일이었지요. 곳간의 곡식을 밖에 내주고 또 받아오고 돈도 헤아리는 일을 맡긴 겁니다. 이 집에 한 이삼십년 살아 보니까 이제 그런 것도 할 줄 알게 된 거지요. 그러나 이렇게 그 집의 전 재산을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자기 재산인줄 몰라요. 여전히 그 집의 종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장자가 죽게 됩니다. 그제 서야 장자는 모든 사람을 불러 놓고 하는 말이 “이 사람이 바로 내 아들이오. 이 모든 재산이 이 사람 거요.” 이렇게 말하고는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머슴, 이 거지가 바로 우리 중생입니다. 본래가 다 부처이고 부처의 아들딸인데도 우리는 부처된다는 소리만 들어도 놀라요. 거지노릇하면서 얻어먹는 그 몇 줌의 양식, 그 몇 푼의 품삯에 팔려서는 그것을 뺏길까봐 겁을 내는 겁니다. 부처님 법을 공부하라고 하면 ‘이거, 내 재산 내놓으라는 것 아니냐. 마누라 버리고 스님 되라는 소리 아닌가, 내 자식 뺏어가는 것 아닌가.’ 이런 걱정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불의 길로, 자기 본래의 자리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빌어서 그 품삯 몇 푼 받는 데만 관심이 있어요. 전 재산을 가질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공부를 조금해서 이 전 재산을 관리하는 데까지 왔지만, 여전히 자기가 부처인 줄은 모릅니다. 그래 부처님이 ‘자 이제부터 네가 부처다. 바로 너희가 나의 진실한 아들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합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일체중생이 다 본래 부처인 것을 알리기 위해 오셨고 , 우리는 이 업식의 미망에 싸여서 거지인 양 살고 있지만 이것만 떨쳐 버리면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중생이 본래 부처 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법화경’에서는 ‘보물을 간직하고도 알지 못하는 거지’ 에 비유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지가 오랜만에 부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부자 친구가 가득하게 차려 준 음식상을 받고 싫컷 먹고 마시고는 마침내 취해서 잠이 들어요. 그런데 부자 친구가 볼 일이 있어 나가야 되는데, 이 거지 친구는 인사불성이 되어서 깨어도 깨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자 친구는 나가면서 거지친구가 평생 먹고 살아도 남을 보석을 넣어줍니다. 혹시 술 먹고 잃어버릴까 싶어 주머니 안섶에다 넣고 꿰매주고 떠납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이것도 모르고 그 후에도 계속 거지로 살아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부자 친구를 길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요. 여전히 거지 모습인 자기 친구를 보자 부자친구는 자기가 준 보석이면 충분히 잘 먹고 살았을 텐데,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놀랍니다. 그런데 거지 친구는 자기가 귀한 보석을 가진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부자친구는 잠 잘 때 넣고 꿰매어준 그 보석이야기를 하지요.

우리 중생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 모두는 그 보석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이 능력을 놔두고 업식에 끄달리며 살아요. 자기 업식을 주인으로 삼고 자기로 삼아 거기 묻혀 사는 겁니다. 이것을 깨우쳐 주려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일대사 인연 때문임을 알아야합니다.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어 청정케 하려고 오신 것이지요.

그런데 중생에게 ‘네가 부처다’ 하면 놀라서 납득을 못하니까, 다시 중생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오욕락을 누리며 살다가 그것을 버리고 수행하여 해탈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랬더니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왕자니까, 또는 태어날 때부터 일곱 발이나 걸었다던데, 나는 못 걸었지 않느냐.’ 고 생각하면서 ‘나는 안돼’ 하고 또 물러나요. 그래서 부처님은 팔만 사천 법문을 하셔서 우리가 진리를 깨달아 진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진리의 세계를 ‘나와는 상관없다. 스님들이나 할 이야기이고, 늙어서나 할 이야기이다. 나같이 죄 많은 중생이 뭐가 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앙굴리말라도 , 500명의 유녀를 데리고 있던 기생의 우두머리 연화색녀도, 천하바보인 주리반특도, 똥꾼 니이다이도 다 부처님 법문을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진여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는 안 된다’ 는 생각. 나는 다 아니까 할 필요가 없다 는 생각. 이 두 생각을 버리고 정신 차려 진실로 내 업식의 안경을 벗어 던지고 진여의 세계를 바라본다면, 누구나 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어요.

중생이 본래 부처 ②

오늘부터 우리가 힘 써야 할 것은 이 업식의 안경을 벗는 일입니다. 볼록렌즈나 오목렌즈를 끼고서 ‘이건 너무 크다거나 너무 작다’ 해서 자기에게 보이는 대로 끼고서, 나중에 안경을 벗고 실제 크기와 다시 맞춰보면 크거나 작아서 못 쓰는 물건이 되겠지요. 그것처럼 자기 업식의 안경을 낀 채 그 안경에 맞추어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에게 자기식대로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이가 집에서는 말 잘 듣고 해서 쓸 만하다. 했는데, 밖에 나가면 ‘형편없는 놈’ 소리를 듣고, 남편이 집에서는 잘해서 훌륭한가 했는데, 밖에서는 집밖에 모르는 ‘쫌팽이’ 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요. 지금 제일 급한 것은 나 밖의 존재, 즉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고치는 게 아닙니다. 우선 색깔 있는 내 업식의 안경, 이것을 벗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에 제법의 실상을 보고 이치에 따라 고칠 걸 고쳐야 되는 것이지요.

시비분별은 자기 업식의 안경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임을 인정해야 됩니다. 객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있어서 시비분별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제법의 모습이 그렇게 내 눈에 비친 것이지요. 그 때문에 시비분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허상임을 알아야합니다. 제상이 비상인 줄을, 즉 한 생각 일으켜서 모양 지은 것인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 시비분별에 집착하지 말고 (無住), 모양 짓지 말며 (無相), 더 나아 가서는 무념이 되어야 합니다. (無念) 번뇌망상 즉 우리의 업식에 의해 일으키는 한 생각을 쉬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제법이 본래로 여여하여 그대로 진여의 실상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인연 따라 이리저리 일어나는 화작(化作)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냐? 업식을 녹이는 것입니다. 업식에 의해 일어나는 자기주장, 즉 아집을 놓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아집을 버리려면 먼저 엎드려 절을 해야만 됩니다. 내 생각이 옳고, 내가 잘났다는 이것을 먼저 굽히고 놓아야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이 진실의 세계에 접근하기 어렵고 또 안심입명의 경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분별을 놓아 버리면 사람아 바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자동차 운전하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말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것도 재물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집을 놓으면 화가 나지 않고 미움이 생기지 않고 번뇌가 사라져서 마음이 편해집니다. 잃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사라지는 것은 괴로움과 속박의 굴레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걱정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업식의 안경을 벗기가 싫다는 다른 표현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럼 왜 이 업식의 안경을 벗기 삻을까? 그것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는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나는 업식의 안경을 안 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당신들이 안경을 끼고 있지, 나는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망상을 피우는 겁니다. 전도몽상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수행자는 자기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내가 본 모습은 내 업식의 안경을 통해 본모습이니까 안경 벗고 세상 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탁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이구, 내 안경에 또 이렇게 비치네. 이건 절대 실제 모습이 아니야.’ 하고 마음 돌이켜야 합니다.

시누이와 마음이 안 맞아 화가 나서 ‘으이구, 미운 시누이.’ 하다가도 바로 생각을 돌이키세요. 내 안경에 비친 모습이니까. 내 안경을 벗으면 미움이란 말이 떨어지니까 용서할 것도 참을 것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공부할 때는 관점을 잘 잡아야합니다.

미운 짓’ 하는 생각이 팍 올라올 때 ‘미운 짓’ 이란 사실은 없다. 내 안경에 비춰진 모습일 뿐, ‘일체가 유심조소- 즉 마음으로 지어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 초점을 두고 공부해야 단박에 끝내 버리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꿈속에서 헤맵니다. 색안경을 끼고 사물의 빛깔을 바로 보려 하는 것과 같고, 안경을 벗어야 바로 알 수 있는 세계를 안경을 끼고 찾으러 다니는 꼴입니다. 그러나 굳이 안경 벗는 연습을 하러 산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결혼 안 한 사람은 안 한 지금 그대로 하고, 한 사람은 한 상태에서 그냥하면 되지, 결혼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결혼 안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바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일에는 승속이나 남녀, 노소, 귀천과 유무식이 따로 없습니다.

중생에서 부처로

‘수행자는 자기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본 어떤 것도 내 업식의 안경을 통과한 모습이니까 이 안경을 벗고 세상 보는 연습을 해야겠지요. 일체가 ‘마음이 지어 만든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공부를 해야憫熾? 그러니까 ‘법성게’를 공부한 바로 지금, 마음을 내는 겁니다.

기간을 정해 놓고는 ‘수행 하겠다’ 는 결심을 하고, ‘내 눈에 비친 일체의 모습은 내 업식으로 인한 것’ 이라 생각하고 상황에 적용시켜 보는 거지요.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보는 순간 화가 벌컥 올라와서 ‘으익, 저 남자가...’ 이러다가도 ‘아니야, 내가 보기에 늦은 거지, 남편 친구는 필요할 때 술 마셔줘서 정말 고맙다고 좋아하겠지.’ 이렇게 마음을 돌려요. 그리고는 “한 잔 하신다고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어떤 효과가 나는지를 기다리는 겁니다. 매일 싫은 소리를 해도 마시고 왔었는지라, 처음에는 그 소리를 듣고 ‘웬 기회인가?’하면서 더 많이 마시고 오겠지요. 그러면 눈치 보느라 많이 못 마셨을 테이니 실컷 마시게 해주고, 속 쓰린 걸 풀어주는 해장국을 끓여 놓고 기다려요. 너무 많이 마시면 속 쓰리니까. 이렇게 며칠만 하면 자기 몸을 생각해서라도 스스로가 술을 삼가게 됩니다.

‘하던 일도 멍석 깔면 안 한다’ 는 속담이 있어요. 내가 싫은 소리 하든 안하든 간에 남편이 술 마시고 밤늦게 귀가 하는 상황은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생각 그 자체를 놓아버리는 겁니다. 내 업식인 줄 알고 그 일체의 생각들을 놓으면 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 마음이 편해지면 가정에서 해야 할 내 역할이 제대로 보입니다. 이렇게 끄달리는 생각들을 놓아 버리고 내 공부에 집중하면 내게도 좋고 가족들도 좋아집니다. 이렇게 내게도 가족에게도 좋아지는 길이 부처님의 길이고, 내게도 가족에게도 나빠지는 길이 어리석은 중생의 길입니다.

이렇게 다부지게 공부하지 않으면 절에 오래 다녀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에 뭔가 변화가 와야 되요. 이렇게 공부하면 사주팔자에도 구애 받지 않고, 죽을 운명이라 해도 명이 길어집니다. 제법을 꿰뚫어 보고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될 만한 재앙이란 없습니다. 물놀이하다 파도가 높아 물에 빠지면 이왕 빠진 김에 조개나 줍겠다는 사람에게 어떤 것이 괴로움이 될 수 있겠어요? 남들이 ‘아이구, 저 집 아이가 시험에 떨어져서 어쩌나, 부도가 나서 어쩌지?’ 하고 걱정하지만 공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 상황은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때 배울 것이 아주 많습니다. 땅을 관찰하려면 일부러 허리 굽혀 관찰해야 하는데, 넘어졌으니 그 때를 틈 타 땅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닥친 일에서 바로 배우려고 마음을 내면 공부 안되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백일 동안 연습하면서 공부해 가면 그대로 다 법사가 될 수 있어요.

경을 읽으면 다 깨달아서 부처되라는 이야기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사람들이 서울 가는 방향을 하도 물으니까, 있는 위치에 따라 동쪽이나 서쪽, 북쪽으로 가라 하는 것이지, 다 서울 가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수원에 있으니 북쪽으로 가라 했고, 저 사람은 춘천에 있으니까 서쪽으로 가라 했구나’ 하고 회통될 만큼 뭔가를 체득해야 됩니다. 원효대사는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임을 알고 구역질 하는 동안 깨달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를 내거나 죽겠다고 하거나 부도가 나거나 뭔가 잘못되는 그 순간에 빠지지 말고 거기서 보배를 건져야 됩니다.

자동차에 팍 부딪칠 때 ‘아이고, 재수 없어. 조금만 늦게 나왔으면 ...’ 하고 생각되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거고, 부딪치는 순간 ‘죽는 거 간단하네, 마누라하고 싸우면 뭐하나. 이렇게 죽는데. 인생, 이렇게 간단한 것을, 싸울 일이 없겠구나.’ 이렇게 생각이 돌아가면 그 자동차 사고는 엄청난 공덕이 됩니다. 자동차가 부서지고, 그 정도 깨달으면 괜찮지요. 한두 달 입원해도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데 문제가 되겠어요? 이렇게 상황에 부딪히는 순간 공부로 전환 되어야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번뇌가 많아서 골치가 아프고 방향을 못 잡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각하면 혼자서도 무한한 일을 할 수 있어요.

만 명의 사람이 자고 있고 한 사람만 깨어 있을 경우, 잠자고 있는 만 명이 잠꼬대를 하면서 재미있다고 해도 깨어 있는 한 사람은 ‘잠꼬대 하지 말라’ 고 하지, 만 명의 사람이 말한다 해서 거기 끌려 자러 가지는 않습니다.

이 법의 이치를 알면 사바의 중생 속에 아무리 뒤섞여 살아도 물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겁날 게 없어요. 지금 불법이 잘못 되고 있다고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절인연도 아주 좋아지고 있어요.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는 변화나 과학기술의 발달, 하나의 지구로 되어 가고 있는 경향, 이 모든 것이 다 부처님 법이 시절 인연을 제대로 만나 빛을 볼 시점으로 전환 되는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시절에 불법을 만난 것을 정말로 기뻐하고, 부처님 제자 됨이 무한히 자랑스러워야 됩니다.

그런데 왜 그게 안 되느냐? 직접 안 해 보니까 그렇습니다. 법의 이치를 깨닫고 거기에서 기쁨을 맛보는 것이 아니고 그저 세속적인 생각으로 사니까 세월이 아무리 가도 법을 만난 기쁨 부처님의 제자 됨에 자랑스러움이 없어요. 그러니까 백일만 하면 됩니다. 백일 만에 내 개인 인생은 끝내어서 내 개인을 위해서는 아무런 할 일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 24시간 이 몸과 생각들이 다 중생을 위해서 저절로 쓰여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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