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호킨스 박사님의 가르침 중에서...

거울닦는 달팽이 2009. 5. 26.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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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을 초월하는 방법]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여 없애는 것은 다른 부정적 태도와 상태들에서 회복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두려움은 저항 없이 일어나도록 허용되고, 두려움의 감정 에너지는 일어나는 대로 내맡겨진다.

 

"그 다음에는 무엇?" 이라는 단순한 기법이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어떤 두려운 마음에서 출발하며

그 다음에 그런 두려움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의 귀결에 자신을 내맡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난 일자리를 잃어버릴까 봐 무서워."

"그 다음에는 무엇?"

"그러면 무일푼이 될 거야."

"그 다음에는 무엇?"

"그러면 우린 집에서 쫓겨날 거야."

"그 다음에는 무엇?"

"그러면 우린 노숙자가 될 거야."

"그 다음에는 무엇?"

"그러면 우린 음식 살 돈이 없을 거고 굶어 죽을 수도 있어."

"그 다음에는 무엇?"

"그러면우린 병이 들어서 죽을 거야." 등.

 

두려운 귀결이 하나하나 내맡겨지면, 두려움의 행렬은 항상 육체의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으로 종료되고 끝난다.

 

거의 모든 사회적,심리적,육체적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무의식적 정교화일뿐이며, 온갖 두려움이 여기서 일어난다.

갖가지 소름끼치는 공포를 통과하는 데는 짧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몇 시간,며칠,아니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마침내 죽음을 수용하고 신에게 그것을 내맡길 때, 두려움의 핵심이 쓰러진다.

 

                                                                                                   

신이 온전히 자비롭지 않다면,

우리는 오늘 살아 있지조차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세상사에 대한 구도자의 자세]

 

350수준에서의 수용은 무해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을 심판하고,통제하고,변화시키거나 지배하려 들지 않기때문입니다.

 

수용은 '세상을 구하러' 나서거나 무수한 표현을 갖는 세계를 비난하러 나서지 않습니다.

 

타인을 변화시키거나 통제하려는 소망을 내맡김으로써

타인의 의견과 가치관에 좌우되지 않는 호혜적 자유가 생겨나며,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나 필요도 없어집니다.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에서 자유로워질 때, 사회적 동의를 추구하고 갈망하려는 강박증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이것은 수동성이나 무관심과는 대조적이며 다릅니다.

수동성이나 무관심은 하나의 방어적 책략으로서 본원적으로 타인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나,

 

수용의 성숙함은 자존감을 잃지 않고 개인적,인간적 한계 모두를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을 포함하는데

가치판단은 그 유효성을 상실했고, 이제 그것은 일차적으로 임의적이며 개인화된 선택으로 보이기 때문에

개인적 의견은 권좌에서 밀려나게 되고, 또한 순전한 감정적 압력을 통해 지배하는 경향을 상실합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삶과 행복에 해로운 수많은 요소와 낮은 힘이 있는 것이 명백하지만,

그러한 것은 증오하거나 악마화할 필요는 없으며,

그저 적당히 고려하고 피하면 됩니다.

 

그래서 과거에 악마화되었던 것은 이제 악천후와 해일 같은 것으로,

혹은 미워해야 할 것이 아닌 계산에 넣어야 할 자연력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은 벼락을 미워함으로써가 아니라

벼락이 때릴 만한 곳을 피함으로써 생존합니다.

 

도덕적 심판자의 역할을 거절하는 것은 그러한 기능을 신에게 내맡기는 것을 허용해주며

("주께서 이르시되,'심판은 나의 것이다.'"),

 

결국에는

도덕적,윤리적,법적,정치적,종교적,민족적,사법적,사회적 위치성을 둘러싼

세상의 끝없는

논쟁들로부터의 분리로 귀착됩니다.

 

에고는 자신의 '소견'을 늘어놓는 것을 언론 자유권 등에 대한 영광스러운 찬양으로 보고 싶어 하지만,

겸손함은

인류가 개인적 의견과 조언 없이도 이만큼 살아남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겸손함은

세상 속의 수많은 자칭 전문가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있는 그대로임을 관찰합니다.

 

오히려 겸손함과 더불어, 개인의 삶은 거짓 가치를 잃어버리고 참된 힘과 기능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영적 에너지와 힘을 증가시키고 이로써

 특히 인류의 집단 의식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개인의 영적 힘과 온전성은 해수면을 상승시켜 바다에 떠 있는 모든 선박이 올라가도록 해줍니다.

 

겸손함이라는 온전성은 힘을 내뿜으며 이러한 힘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립물도 없습니다.

 

 


 

 

 [에고의 부정성으로부터의 단순한 탈출법]

 

1. 부정성은 정력적인 낮은 힘(동물에서 기원)에 기초하며, 이는오로지 신성한 기원에 속하는 힘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용 가능한 그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기원하는 것이 운용상 필요합니다.

 

2. 육체/감정/마음을 '나'로 동일시하지 말아요.

   육체/감정/마음이 '나의 것'이긴 해도 '나'는 아니라는 사실에 진실할 것이며 이를 인정하세요.

   이것은 매우 힘 있고 막강한 도구가 됩니다.

 

죽음보다, 그리고 지옥 같은 삶보다 더 나은 것은 성장하는 것이고,

또한 마음은 사람을 오도하고,교활하고 무자비하며, 자신의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마음은 진실은 물론 이러한 실상을 부정하려고 할것인데 그것이 바로 마음이 '하게 되어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진실이 자신의 천적임을 직관적으로 알고있습니다.

 

에고의 핵심은 자기애적 자부심이며, 에고는 은밀히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은 단순한 겸손함으로 해소될 수 있는데

 겸손함은 자유와 행복의 경험에 이르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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