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술

의식혁명 중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

거울닦는 달팽이 2010. 6. 2.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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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앞으로 나아갈 길

이 책을 철저하게 소화한다면 독자들은 35점 정도의 의식 수준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일생 동안 겨우 5점의 발전을 한다고 생각하면
35점의 향상은 굉장한 것이다. 첨단 이론물리학과 비선형 동역학이 보여주듯이,
개인의 작은 향상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의식 수준의 향상은 개인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더구나
이 선물은 파도의 효과와 마찬가지로 그 출처로 돌아오게 된다. 전 인류의
의식 수준은 몇 세기 동안 190에 머물렀으나 1980년대 중반에 갑자기
204의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이제 위로 전진할 수
있는 안전한 발판 위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준다.

지금껏 우리가 다룬 여러 문제들이 뉴스에서 뻔질나게 다루어지고 있다.
종교의 타락, 범죄의 가중, 어린이들의 폭력, 정치의 비도덕성, 사이비 종교의
이해하기 어려운 난폭함 등이, 거짓이 난무하고 이웃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갖지 못한 우리 사회에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혼동과 마비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도덕의 부족에서 온다.
필자는 '도덕'을 논한 이 책이 이와 같은 공백을 메우는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필자는 '도덕'이라는 어휘에서 옳고 그름을 가르는 도덕적 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가장 고귀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결정과 사고의
기초가 되는 객관적이고 개인적인 토대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우리는 200 이하의 정치 조직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이제까지
언급한 새로운 검사 방법을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공직자들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이제는 가능해졌다. 각 공공기관은 효과적인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 수준이 요구된다. 대체로 200 이하의 공직자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야기 시킨다고 보아야 한다.

더 큰 사회 문제는, 이처럼 어두운 인간 행동의 와중에서 어떻게 자비심을
발휘하느냐에 있다. 이 세상은 상대적이라서 개인은 그의 진실의 수준에서
행동하며, 따라서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다. 바로 이 '옳음'은 과격분자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사회의 진정한 위험은 백인우월주의(150의 수준)
같은 편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주의에서 오는 손상은 최소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위험은 내면을 비밀스럽게 정복하는,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억지의 힘이다. 부정적인 끌개 장들은 대중 의식에 편승하여 다채로운
수식어와 상징 조작으로 겉만 요란하게 꾸미게 마련이다. 의식을 파괴하는 것은
부정적인 메시지의 주입보다는 그것을 따르는 에너지 장에 의한 것이다.

인기 있는 사이비 철학의 부정적인 요소는 이 책들을 시험해 봄으로써 간단히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들에 대한 예방의 마음가짐도,
그 책들을 읽을 때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에 의한 영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 책들을 지성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책에 노출되는
그 자체가 오랫동안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부정적인 영향권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우리의 마음 속으로
살며시 침투하는 것과 같다.

영적인 통찰력과 종교성을 내세우는 문헌들을 대할 때에는 흔히 마음을
놓기 쉽다. 하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가증스러운 범죄는 신이 이름 아래
행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폭력을 사용하는 사이비 종교들은
뚜렷하게 보여 배척할 수 있지만,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믿음의 체계는 정말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보이지 않는 끌개 장이 파괴를 부르는 쪽으로 은밀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을 무서워하거나 싸우려 하지말고 단지 피하라'는 오래 된
지혜의 말씀을 듣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이 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악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의
우리말로 고쳐 말하자면 젊은이들(성인들의 내부에 항상 존재하는 젊은이를
포함하여)이 이러한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되면 낮은 끌개 에너지 장에 의해
부패된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분별의 가르침으로 독살 당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어두움은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고 분별의
빛을 비춤으로써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도덕적 분별력의 유지와
배양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하는 마지막 문제가 남아 있다.

우리의 연구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간은 현재 선악의 분별 능력을 결핍하고 있다는 것.

이러한 깨달음에 겸손하게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이미 발전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셈이 된다. 우리는 속기 쉽고 감각에 의해 쉽게 유혹되며 육체적, 지적인
매혹의 환상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분별력을 향한 첫 단계를 밟는다고 할 수 있다. 이원적인 세상에서 파괴적인
것을 즉시 알아내어, 아직 모르는 마음에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의식을 우리는
갖고 있으며, 이 신호는 해로운 자극이 존재할 때 육체의 약함으로 나타난다.
지혜란 궁극적으로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을 피하는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운동역학을 사용함으로써 진실과 허위에 대한 영혼의 어두움은 점차 밝아질 수
있다. 직관력을 타고난 극소수만이 부정적인 에너지에 의해 해를 입지 않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최면술 같이 작용하는 파괴적 끌개 장에서 오는 손상을 보수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한 가지 중독에서 회복하는 일에만 한 사람의
일생이 소모될 수 있다. 가장 흔하고 만연된 중독은 부정이며,
이것은 이지적인 허영에 의해 우리를 어둠으로 덮는다.

지성이란, 허위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결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허위에 대한
분별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 분별력을 견지할 만한 힘이 부족하다. 역사를 통해
나타난, 지성적인 숙고의 결과 이루어진 수많은 저술들을 보라. 인간에게는
결정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심한 것일까?
철학의 전 분야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인지를 알기 위해 수천 년 동안
고심해 왔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는 증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오래 전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어야 하지 않은가? 평범한 인간
행위에서는 지성으로 진실과 허위를 알 수 있다고 해도, 지성은 아무래도
부정적 에너지 장의 영향을 저지시킬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 우리의 지성은
될수록 모든 원인들을 상상해 내려고 하지만 인간 고뇌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개인이 지성적으로는 자신의 행동이 자멸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러한 지식 자체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중독에 대한
지적인 인식만으로는 중독을 고칠 수 있는 힘이 나타나지 않는다.

성전에는 우리 인간이 보이지 않는 억지의 힘들에 의해 고통받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사물에서 보이지 않고 조용한
에너지의 빛이 나오는 것을 알고 있다. 라듐의 발견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뢴트겐의 엑스레이는 치명적이고 방사선의 방출은 라돈과 마찬가지로 조용한
죽음을 가져온다. 우리를 파괴하는 끌개 에너지 장 역시 보이지 않고
은밀하지만 그 힘은 절대로 약하지 않다.

누가 '홀렸다'고 할 때의 뜻은, 부정적인 끌개 장의 지배에서 그 사람이
빠져 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면에서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너무 홀려 있어서, 자신들의 행동 동기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당이나 지옥을 택하며, 결국 자신의 선택의 노예가 된다.
지옥이란 신의 판결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가져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지옥이란 부정적인 에너지의 계속적인 선택과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최종 결과이다.

깨달은 이들은 중생이 하나의 꿈속에 갇혀 있다고 묘사해 왔다. 대다수는
보이지 않는 억지의 힘에 의해 밀려, 이 때문에 많은 시간을 절망 속에서
헤맨다. 우리는 죄를 사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고 이 고백으로 안심을 구한다.
후회는 인생사에 너무 잘 배여 있다. 그렇다면 이런 파괴적인 영향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갇힌 사람들에게 구원이란 과연 가능한가?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구원이란 가능한 일이다. 구원이란 사랑의 생각이
부정의 생각보다 훨씬 힘이 크다는 간단한 사실에 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기도에 의한 문제 해결은 확실히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 인간은
자신 속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성이란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고통이다. 우리 스스로 태어날 것을
요구했는지 우리는 기억할 수 없으며, 제한된 마음을 물려받은 결과 어느 것이
생을 돕고 어느 것이 죽음을 초래하는지 구분할 능력이 없다. 인생의 고뇌는
근시안적인 생각을 어떻게 초월하느냐에 있다. 이원성을 초월하고 더 이상
지상에 묶이지 않는 지점으로 진보하지 않는 한, 우리는 존재의 더 높은
차원으로 진입할 수 없다. 우리를 무지의 어둠에서부터 헤어 나오게 하는,
본래부터 주어진 나침반을 발견하게 하는 능력은, 초월을 향한 집단적인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지금껏 막대한 대가를 치러 왔던
교활한 지성의 덫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슨 거창한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면 족하다. 이 나침반은 단지 예, 아니오를 말할 뿐이다.
이것은 천당의 궤도 위에 선 것에는 강하게, 지옥의 궤도 위에 선 것에는
약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항상 접하는 인간의 에고는 실제적으로는 개별적인 '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그것'일 뿐이다. 이러한 환상을 꿰뚫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끝없는 '우주적 농담(Cosmic Joke)'이며, 인간의 비극은 그 코미디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분리된, 개별적인 '나'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에고가 얼마만큼이나 맹렬히 투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본질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는 그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인간의 이성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부단히 애쓴다.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의 뒷머리를 보려고 하는 것 같은 희극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허영심은 끝이 없어서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으려 그렇게도 애쓰고
있는 것이다.

에고와 동일시되는 마음은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 마음이 진실을 이해할 수 있다면, 마음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착각임을
인식하는 순간 용해되어 버릴 것이다. 에고를 초월한 마음의 패러독스를
넘어서야만이 '존재'는 마음의 무한한 절대성 속에서 스스로를 빛나는 자리에
세울 수 있다. 그럴 때, 모든 말은 아무 쓸모가 없어지고 만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의 눈멀음에 대한 자비심이 우러나와야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평화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 이 지상에서 우리의 목적은 불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나아갈 길은 명백하다. 인간의 의식 수준이 마침내 200 이상이 된 오늘날,
우리는 인간 문화의 전 분야에서 획기적인 대전환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의 앎과 행동에 훨씬 진지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좋든 싫든,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이제
집단적인 깨달음의 진화를 꾀할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 무지로 인한 대가를
이제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치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집단 의식은 새로운 차원으로 뛰어오를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암흑의 노예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저 높은 곳에 신의 영광이 있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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