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법륜스님 즉문즉설>: 자기 마음을 보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거울닦는 달팽이 2011. 2. 2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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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다혈질입니다. 이성보다 감정이(감성이 아니라) 앞서는 편입니다. 아무 일도 아닌데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또 착 가라앉기도 합니다. 최근들어 다혈질인 성격이 더 강해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살피는 일이 잘 안됩니다. 마음을 들여다보기 전에 이미 행동으로 저질러 놓은 상태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가장 기본이 알아차림이라고 하는데 그 알아차릴 겨를이 없다는 것이 제 문제입니다. 무조건 남이 하는 말은 '법문'이요, 내가 일으키는 생각은 '분별'이 100% 맞다고 하는데 전 꼭 반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 안하려고 해도 저절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괴로울 때가 많고,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꼭 하루에 한두 번은 실수를 합니다. 주로 말실수를 합니다. 안해도 될 말을 해서 남의 속을 뒤집거나, 참았다가 폭발을 한다거나, 유머라고 했지만 상대는 썰렁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또 내 자신이 그랬구나, 싶어서 기분이 나빠집니다. 기도할 때 이것을 참회하면 되는데 기도할 때는 아무 생각도 안납니다. 그냥 절만 할 뿐입니다. 남들은 참회가 된다는데 저는 대체로 아무 생각없이 108배만 하는 편입니다.

 

오늘 스님께서 수행을 꼭 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생활하면서, 법당활동 하면서 일어나는 마음을 잘 살피는 것이 수행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절하면서 아무 생각도 안나는 것때문에 자학하지 말고 그때그때 일어나는 마음을 잘 살피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자기 마음을 어떻게 보면 되는건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스님 법문을 준비했습니다.

 

기도 중 자기 마음이 올라오는 걸 보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것을 느끼고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을 구경하라 하셨는데 그것도 잘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요.


화를 내는 것과 화가 나는 것

‘자기 마음을 보라.’ 할 때 이 마음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는 천 가지 만 가지나 됩니다. 화를 내면 얼굴 표정이라든지 목소리라든지 몸의 동작이라든지 이런 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화의 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 화를 내는 마음의 작용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이 하나 있고 ‘화가 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화가 나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걸 말하고, 화를 낸다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걸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화를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화가 나는 것은 내 의지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팔을 올리고 내리는 건 내 의지와 관계가 있지만 심장이 뛰는 것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은 화가 나지 않는 경지로 가는 것

화가 나고 안 나고는 내 업식, 까르마와 관계가 있습니다. 화는 내 업식에서 일어납니다. 이 업식의 작용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수행은 화가 나지 않는 경지로 가는 겁니다. 화가 나지 않으면 낼 거냐, 말거냐 하는 것은 필요 없죠. 그러니까 수행의 목표는 화가 나지 않는 것이며, 그 첫 단계가 화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린다는 건 지혜에 해당됩니다. 자신에게 화가 탁 일어날 때 화가 일어나는 줄을 아는 거예요. 화가 일어나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화를 내게 됩니다. 이 사람이 화를 내면 남들은 그 사람 화났다는 걸 아는데 본인은 잘 몰라요.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 표정을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게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남도 아는데 자기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제정신이 아닌 거죠. 그러나 조금만 지혜로우면 바깥으로 화를 내지는 않아도 자신이 지금 화난 상태라는 걸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남은 모르는데 나는 아는 게 수행입니다. 이때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안다고 화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화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화가 났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면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지요.

즉, 먼저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이 지속돼야 합니다. 순간적으로 딱 알아차렸는데 그 다음에 올라오는 화를 놓쳐버렸다면 바로 화가 나버리게 됩니다.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것을 다른 말로 ‘지켜본다’고 표현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 번 놓쳤으면 ‘아이고, 놓쳤구나’ 하고 바로 알아차리는 거예요. ‘왜 난 놓쳤을까, 바보같이, 벌써 세 번이나 놓쳤네.’ 하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여러분들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오늘 집에 가야지’ 한다고 저절로 가지는 건 아니죠. ‘빨리 갔으면 좋겠다.’ 한다고 빨리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기든지 자동차가 한 바퀴씩 굴러가든지 전철이 한 바퀴씩 굴러가든지 해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빨리 이루려고 조바심 낸다고 이뤄지는 건 아닙니다.

화를 알아차리기만 해도 문제가 해결된다.
‘왜 화가 날까, 왜 불안할까, 왜 미워할까’ 하는 문제들은 그 다음에 탐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일단은 알아차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알아차리기만 해도 어떤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아차리려고 해도 초심자는 자꾸 놓치게 됩니다. 마음이 일어날 때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이 감정으로 격화되여 일어나서 거기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돼 버리지요. 그래서 ‘욕심에 눈이 어둡다’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 ‘눈에 뭐가 씌었다’ 이런 말들을 하지요. 이렇게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를 범부중생이라고 합니다.

질문하신 분은 나눔의 장도 좋고 명상수련도 좋고, 그렇지 않으면 지금부터 스스로 연습 삼아 도반들과 마음 나누기를 해보세요. 마음 나누기를 통해 자기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연습을 해 보세요.

 

정토회에서 나누기가 제일 좋다 하는 사람도 있고 나누기 때문에 정토회 다니기 싫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누기 때문에 정토회 다니기 싫다는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 마음의 알아차림이라는 것에 전혀 깜깜한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 나누기를 함으로써 타인을 통해 자기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 저 사람 마음이 저렇구나.’, ‘내 마음은 이렇구나.’ 하고 말이에요. 거기엔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고 다만 그 사람이 그 순간에 그런 마음의 상태였다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얘기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객관적인 사실로 자신의 감정을 볼 수 있는 연습을 계속적으로 해 보세요. 그러면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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