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있는 세상

The Doors - Light My Fire

거울닦는 달팽이 2016. 7. 2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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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어즈(Doors)
    데뷔/결성 : 1965년
    활동시기 : 1960년대
    짐 모리슨(James Douglas Morrison, 1943 - 1971) 레이 만자렉(Raymond Daniel Manzarek, 1939년생 ) 존 덴스모어 (John Paul Densmore, 1947년 생) 로비 크리거(Robert Alan Krieger, 1946년 생)

  • 도어스라는 밴드를 얘기한다는 것은 한 밴드의 음악에 대한 얘기라기보다는 격동하던 1960년대의 미국사회와 그것을 온몸으로 체화하고 표현한 짐 모리슨이라는 인간에 대한 얘기라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오른손으로 리드 키보드를 왼손으로는 펜더 키보드 베이스를 연주하던 밴드의 음악적 구심점 레이 만자렉과 다른 멤버들이 만들어 낸 음악만으로도 물론 도어스라는 밴드는 음악사에서 지워질 수 없겠지만 그것을 프론트에서 표출하던 짐 모리슨은 마치 영혼을 불러내듯 도어스의 음악을 대중들에게 흡입시키는 샤먼이었다. 

    # 1960년대 War & Peace & Love & LSD의 나날 

    도어스가 등장했던 1960년대는 미국 사회에서 잊혀질 수 없는 격동의 시기였다. 

    1960년의 쿠바에 대한 수출 금지 조항 제안과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LA 흑인 빈민들이 거주하던 와트시에서의 폭동으로 수백 명이 사상된 사건,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7년부터 거대해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들. 1968년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등 1960년대는 미국 전 후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위해 처절하게 시달리고 있던 그야말로 격변하는 역사의 한 중간에 있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 등장한 도어스는 (짐과 레이는 미국 대학 문화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말해지는 UCLA에서 만났다) 당시 그 (특히 젊은이들이 느꼈을)분열과 혼란을 음악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투영해낸 밴드였다. 

    이 시기는 미국 젊은이들의 음악이 거대한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후 침체됐던 분위기를 다시 띄워준 것은 미국이 아닌 영국 밴드 비틀스였다. 

    그 해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비틀스는 락 음악의 역사에서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는 미국 시장 점거를 성공했고, 비틀스는 미국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이어 많은 영국 밴드들이 속속들이 비틀스가 열어 놓은 미국이라는 황금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청교도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던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유를 부르짖는 락큰롤의 물결에 휩쓸릴 수 밖에 없었다. 

    반전의 분위기 속에서 국민 가수의 위치에 오른 밥 딜런은 어쿠스틱 사운드에서 일어나 일렉 기타를 들고서 포크 락이라는 음악으로 저항성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딜런은 그저 가수가 아니라 저항의 기수였고, 전쟁 영웅이었으며 또한 시인이었다. 

    그리고 비치 보이스가 ‘서프 음악’이라고 불리는 걱정 없는 행복한 음악으로 등장한 후 캘리포아는 젊은이들의 상징적인 낙원이 되었고, 그곳에 기반한 많은 밴드들이 등장한다. 

    ‘California dreaming’을 부른 마마스 앤 파파스, ‘Happy together’의 터틀즈, 버팔로 스프링필즈, 버즈 등이 캘리포니아를 근거지로 활동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음악을 대변하고 1960년대 음악에 있어 가장 많은 현상을 만들어 낸 도시는 누가 뭐래도 샌프란시스코였다.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등 LSD(1966년까지 미국에서 LSD는 합법적인 약물이었다)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이키델릭을 모티브로 인간의 정신과 내면을 노래하던 샌프란시스코의 밴드들은 사랑의 종족인 히피들과 함께 사이키델릭 트립(psychedelic trip)이라고 불리던 공연을 통해 교감을 이루었고, 이렇게 공동체적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의 음악적 분위기는 LA의 밴드들과 비교할 때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가 히피와 밴드들과의 (정신적인) ‘무브먼트’의 분위기였다면, LA의 분위기는 일정한 구심점이 없이 개개인의 영감이 중요시되는 분위기였다. LA에서 활동하던 밴드로는 프랑크 자파, 캡틴 빕하트(Captain Beefheart), 캔드 히트, 러브 등을 들 수 있는데, 도어스 역시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밴드였다. 

    # Short Trace Of Doors

    1965년 릭 & 레이븐스라는 밴드에서 블루스를 연주하던 레이 만자렉은 UCLA의 필름 스쿨에서 함께 공부하던 짐 모리슨을 베니스에서 우연히 만난다. 

    당시 자신의 동생인 릭 만자렉, 짐 만자렉과 밴드를 하고 있던 레이 만자렉은 시를 쓰듯 노래하는 짐 모리슨에게 함께 음악을 할 것을 권했고, 당시 LSD와 히피에 영향 받은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시와 산문으로 노래를 만들고 싶어하던 짐 모리슨은 바로 레이 만자렉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음악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에 마하리쉬 요기의 명상회에서 만난 존 덴스모어(사이키델릭 레인저스라는 밴드에서 재즈를 연주하던) 가 가담하고 로비 크루거가 들어오면서 레이의 동생들은 팀을 떠나게 되고, 윌리엄 블레이크와 알도 헉슬리의 작품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에서 영감을 얻어 도어스라는 이름의 팀이 만들어진다. 

    몇 번의 오디션을 보고 런던 포그라는 클럽에 처음 선 도어스는 베이시스트 없이 레이 만자렉이 왼손으로 펜더 키보드 베이스를 연주하며 오른손으로 리드 건반을 연주하는 독특한 사운드로 공연을 시작한다. 

    정통 블루스와 락의 고전들을 카피하는 것으로 공연을 시작한 도어스는 다분히 실험적인 자신들의 사운드를 만들어 나갔다.

    처음 도어스의 공연에서 짐 모리슨은 관객을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용기를 내서 관객쪽으로 돌아선 짐 모리슨은 멈추려 하지 않았다고. 해서 멤버들은 짐 모리슨이 쏟아대는 처음 듣는 시에 맞춰 즉흥연주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짐 모리슨은 공연 중 노래가 아닌 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쉬지 않고 무대에서 토해냈고, 멤버들은 그에 맞추어 맘껏 즉흥연주를 했다고. 

    얼마 후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로도 유명한 클럽 ‘위스키 어 고고(Whisky A Go Go)’에서 연주를 하게 되면서 조금씩 자신들의 팬을 만들어 갔고, 당대의 유명한 밴드였던 러브, 뎀(Them), 터틀즈, 시즈(Seeds) 등과 같은 무대에 서며 짧은 시간에 짐 모리슨의 카리스마와 도어스의 새로운 사운드는 많은 지지자들을 만들었다. 

    음악은 독특했지만 실험적이고 거친 무대 매너 때문에 쉽게 계약을 하지 못하던 중 짐 모리슨의 거침없는 무대를 보고 이끌린 잭 홀츠만의 눈에 띄어 도어스는 당시엔 소규모 레이블이었던 엘렉트라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1967년 1월 첫 앨범 <The Doors>를 발표한다. 첫 번 째 음반으로 락 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도어스는 같은 해 두 번째 앨범 <Strange Days>를 발매하고 도어스와 엘렉트라 레코드는 함께 거물 밴드와 메이저 레코드 회사로 급성장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골치 아픈 녀석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천재적인 영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본능적으로 끓어오르는 그 무언가를 그들의 음악 속에 가지고 있었어요. 뜨겁고 무서운 그 무언가가 그들에게 있었어요"라는 당시 엘렉트라 레코드 회사 관계자의 말과도 같이 당시 반전 분위기와 히피 문화 속에서 도어스의 음악은 다른 사이키델릭 밴드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마치 새로운 구세주인양 그들을 따르는 팬들의 숫자도 불같이 퍼져 나갔다.

    밴드와 공연의 규모가 커지면서 무대 위에서의 거침없고 즉흥적인 짐 모리슨의 행동 또한 많은 이슈를 만들어 냈다.

    1967년 12월 코네티컷 주에서 짐 모리슨은 공연 중 외설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체포되기도 했다. 

    점점 커져 가는 밴드의 명성과 쉴 새 없는 공연 등 거대해진 도어스의 덩치에서 오는 정신적인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는지 짐 모리슨의 약물 복용과 술마시기는 더욱 심해졌고, 술에 취한 채 무대에 오르는 일도 빈번했다. 

    그런 도어스의 무대에는 항상 경찰들이 함께 했다. 자신들의 팬들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으나 국가에서 보기에는 거의 정신 나간 폭도들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런 중 1968년, 세 번째 앨범 <Waiting For The Sun>을 발표했고, 짐 모리슨의 광기는 점점 심해져만 갔다. 

    일반 관객들의 상식을 훨씬 뛰어 넘는 무대 위에서의 난폭함과 외설적인 모습에 일부 팬들조차 도어스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할 정도로 짐 모리슨의 거침없는 광기는 날로 더해갔다. 

    그리고 1969년, <The Soft Parade>의 발매 후 가장 많은 팬들을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마이애미 사건이라고 말해지는 이 일은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에서 공연 도중 지미가 관객들 앞에서 옷을 벗은 일이다. 이 일로 인해 외설죄로 체포된 짐 모리슨은 재판에 회부되고 결국 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미국 여러 도시에서는 외설적인 행동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일정이 잡혀 있던 많은 공연이 최소 됐고, 이 일은 짐 모리슨에게는 정신적인 압박이었고, 다른 멤버들에게는 짐에 대한 불만을 쌓이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970년, <Morrison Hotel>을 발매하고 이어 같은 해 7월 짐 모리슨의 카리스마와 도어스의 즉흥적인 연주의 느낌이 살아 있는 라이브 앨범 를 발매하며 쉽게 멈추지 않는 라이브 밴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다음 해인 1971년의 발매 후, 끊이지 않는 마약 복용과 쉬지 않고 마셔 대는 술 때문에 자기 파괴 속으로 가라앉아만 가던 짐 모리슨은 결국 팀을 나와 자신의 애인 파멜라와 파리로 떠난다. 

    그 곳에서 짐 모리슨은 자신이 바라던 시인의 모습으로 시작 활동을 하며 와 라는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다. 

    그리고 짐 모리슨의 시를 좋아하며 그를 시인으로 사랑하던 여인 파멜라와 파리에서 지내던 짐 모리슨은 과, 두 권의 시집이 발표된 그 해 7월, 자신의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그의 사인은 그와 함께 1960년대의 3J로 불리는 제니스 조플린과 지미 헨드릭스과 마찬가지로 약물에 의한 심장마비였다. 

    그의 사망 이후 나머지 멤버들은 짐 모리슨 없이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영적 매개체인 샤먼이 없어진 도어스의 음악은 더 이상 이전처럼 관객들에게 흡입될 수 없었다. 

    결국 도어스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레이의 제의로 도어스는 해체했다. 

    비록 6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가장 많은 사건과 변화가 끓어 넘치던 그 시기에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도어즈의 음악은 당시의 정신을 가장 잘 표상화한 음악이자 철학이었고 하나의 종교였다. 그리고 짐 모리슨에게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에게 있어 시와 음악은 종교였고, LSD와 알콜은 성수였으며, 그 자신은 그것을 이끄는 샤먼이었던 것이다.

출처: http://www.izm.co.kr/artistRead.asp?artistidx=1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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