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기는 멧세지

(펌) 김규항 <예수전>에 대한 서평 /녹색 평론

거울닦는 달팽이 2009. 12. 1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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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예수전>에 대한 서평(녹색평론 105호, 2009년 3-4월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김규항 지음, <예수전>(돌베개, 2009년)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서 10장 9절)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교회에 다녔던 나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했다. 저 성경 구절처럼 ‘예수님은 주님이고, 부활을 믿는다’고 말만 하면 된다는데, 일찍부터 애쓸 것 없이 대충 살다가 막판에 말만 몇 마디 잘 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말이다. 물론 이런 망측한(?) 생각을 입 밖에 낸 적은 없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좋았고, 여학생들과 레크리에이션 하며 노는 게 즐거웠다. 그러나, 가끔 이런 회의가 솟아오르기도 했다. 많은 친구들은 통성 기도 시간에 ‘나 때문에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며 엉엉 통곡을 하곤 했는데, 사실 내가 죄 많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을 하겠지만, 예수님이 정말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는지는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이 의문들을 풀게 되었다. 내가 배웠던 기독교 교리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많은 부분 바울로의 신앙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의 보편 종교가 되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계승한 제자들이 아니라 바울로가 정립한 교의 체계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다’고 배웠던 복음서는 실제 AD 1~2세기 사이에 사도들의 선교를 위한 자료로 성립했고, 바울로를 따르는 필사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이 개작되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다석 류영모의 제자인 박영호는 바울로 신학은 짐승 대신 예수를 제물로 한 유대 교리의 원용일 뿐, 예수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비판한다. 사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이거니와 종교라는 잣대를 들이대기조차 민망할 지경이다. 가깝게는 지난 1년 사이에 줄줄이 낙마한 소망교회 출신 전직 각료들도 일요일마다 예배당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바치고 있을 것이다. 예수를 사칭한 강도들은 지금도 세상 어디에나 넘쳐난다.

 

지난 10여년간 우리 사회에서 ‘B급 좌파’라는 별칭으로 활발한 문필 활동을 펼쳐 온 김규항 씨가 마가복음 해설서인 <예수전>을 펴냈다. 그는 짧고 단정한 문장으로 문제의 핵심을 뛰어나게 묘파해내는 칼럼니스트이면서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펴내는 출판인이기도 하지만, 그의 이런 활동에는 예수를 좇는 신앙인의 자세가 바탕해 있음을 그의 여러 글들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예수전>을 통해 그려내는 것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간 예수’의 삶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이른 시기에 집필되었고 ‘역사적 예수’에 가장 근사하다는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가 보낸 3년간의 공생애를 그려낸다.

김규항은 보통 사람들이 먼저 눈길을 보내는 예수의 이적들에 대해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예수는 마술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함으로써 버림받은 병자를 당당한 사람으로 어깨 펴고 살도록 회복시켜주었으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명이 배불리 먹은 기적을 통해 ‘나눔’이 아니라 ‘나눔의 체제’가 만들어내는 기적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파도를 잠재우는 초자연적인 사건도 재산 자랑을 낙으로 알던 부자가 이를 부끄럽고 불편해 여기게 되는 ‘삶의 전복’에 비하면 작은 일이라고 김규항은 말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가 말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는 이적을 행하는 대목에서 늘 ‘믿음’을 말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파도를 잠잠하게 만든 뒤 제자들에게 “왜 이리도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질타한다. 예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면서, 12년간 하혈증을 앓던 여인을 낫게 하면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내 능력에 대해 왜 이리 믿음이 없느냐”고 야단치거나 병자들에게 “네가 내 능력을 알아 보는구나”는 뜻으로 믿음을 말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아마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너는 너다. 네 삶의 자유를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말고, 무엇의 노예로도 살지 말고, 어깨 펴고 당당하게 살아라. 이걸 믿으면 못할 것이 없다”라는….

 

깨부수는 예수

 

예수는 에둘러가는 일이 없다. 그는 언제나 직선으로 들이받으며 당대의 금기를 돌파한다. 유대 세계에서 죄를 사할 권한은 성전의 제사장에게만 있었지만, 예수는 이를 부정하고 스스로 병자의 죄를 사했다. 로마 제국의 수탈 체제의 최말단에 기생했고, 그래서 모두가 멸시하던 세리를 제자로 삼았다. 죄인들과 같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먹고 마셨고, 바리새파들이 경건하게 폼 잡으며 행하던 단식에 대해서는 ‘후졌다’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며 조롱했다. 안식일 날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방조하고,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건 아니다”고 일갈한다. 병자의 오그라든 손을 안식일 날 펴준다.

 

예수 주변에 모여든 군중 속에는 꼭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 끼어들어 기회만 엿보고 있다. 물론 예수는 그들의 시험을 능란하게 돌파한다. 당시 민중들을 고통 속에 빠뜨린 것은 로마에 대한 조공, 갈릴리의 영주 헤롯 안티파스의 토목공사, 그리고 성전 지배세력들의 수탈과 같은 3중 체제였다. 그런데, 예수가 로마 제국 체제를 비판한 것은 은유적으로 제시된다. 오히려 로마의 지배 속에서 유대 전통을 지키려 일어선 종교인들로서 민중들의 일정한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던 바리새파들과 대립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사실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엄청나게 세분화된 율법 체제를 만들어 따르도록 함으로써 민중들에게 죄의식을 강요하고 있었다. 예수는 진정한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바로 이런 바리새파들이라고 여겼기에 이들을 공격한 것이라고 김규항은 말한다. 민중들이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 빛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것을 가로막음으로써 노예의 삶으로 주저앉히는 체제의 안전판, 그러면서 민중들의 존경을 탐하는 그들의 위선을 예수는 눈뜨고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규항의 시선은 ‘이 땅의 바리새파들’로 향한다. 어쩌면 김규항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거부감이 들 만큼도 먹고살기 불편할 만큼도 아닌 경제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 그들은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심이 가득하지만,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현실적”이라는 수사로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예수의 수난

 

예수는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갈릴리에는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넘쳐났지만, 유대 성전 지배 체제의 중심인 예루살렘은 당연히 예수에게 적대적이었다.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예수는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린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운명이었다.

 

예수는 거기서 큰 소란을 일으킨다. 성전 세력들과 결탁하여 가난한 순례객들로부터 엄청난 이익을 뜯어가는 환전상인, 비둘기 상인들의 장사판을 둘러 엎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내 아버지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고 질타한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정치적 해방자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고 제자들은 동요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그러면 안 된다고 펄쩍 뛰는데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며 불같이 화를 낸다. 그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고, 당대 민중들의 기대와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무력하게 죽었다.

 

그러나, 예수는 왜 그렇게 무력하게 수난을 받아들였을까. 예수는 자신에 대한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살다 죽은 배우였다는 말인가. 예수는 정치적 혁명이 거듭남을 기약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김규항이 지적한 바대로 민중의 삶이 바뀌지 않은 혁명이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한 것이며, 진정한 혁명이란 민중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의 주위로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주리고, 아프고, 영혼이 고단한 무리들이다. 그는 병자의 고통을 보면서 애가 끊어져 아무리 피로해도 배가 고파도 내치지 않는다. 며칠 째 먹지 못하고 자신을 따라다니는 무리들을 보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몇 개의 떡과 물고기로 그들을 먹인다. 체포되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갈 때는 너무나 쇠약해진 나머지 다른 사람이 한동안 십자가를 대신 져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정작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몰약에 포도주를 타서 만든 마취제는 거절한다. 그는 성전 지배 세력과 그 하수인들에게 조롱당한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을 안고 비참하게 죽는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이란 신통력으로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자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으로 우리 안에 함께 살고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구약의 야훼와 같이 시시콜콜 감찰하고, 징벌하고, 진노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슬픔에 똑같이 애끊으며 고통을 함께 하는 자임을, 그리고 그런 자들을 하늘나라 잔치에 가장 먼저 초대하는 분임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김규항은 마가복음 13장에 드러나는 예수의 묵시록적 발언들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마가복음 집필 당시의 기독교인들의 심리 상태가 반영된 것이라고 짐짓 선을 긋는다. 그러나, 만약 예수 자신이 곧 이어질 종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이렇게 집착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멸망의 시대를 넘어서는 하늘나라 운동의 겨자씨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만큼 예수는 그 시대의 어두움에 깊이 슬퍼했고, 멸망의 징조 앞에서 화급했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 신학의 영원한 쟁점이다. 김규항은 여기서도 단호하다. 십자가형으로 절명함으로써 죽었던 육신의 세포가 다시 재생한 것이 부활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난 육체도 결국 ‘언젠가는’ 다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옳다. 만약,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육신이 있다면, 그래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면, 그에게 생은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의 부활은 ‘진정한 목숨’에 대해 가르쳐 주는 사건이라고 김규항은 말한다.

 

- 사람이 부활한다는 건 세포 덩어리인 몸을 떠나 영원히 살아 소통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말한 '진정한 목숨'이다. 우리가 집착하는 목숨, 즉 인생이란 길고 영원한 목숨의 일부 순간일 뿐이다. …… 인생에 대한, 몸이라는 껍질을 사용하는 목숨의 일부 순간에 대한 무지와 집착으로 본다면 인류는 퇴보를 거듭했을 뿐이다.

 

 

예수를 좇는 자들의 사회주의

김규항은 <예수전> 곳곳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자본주의 체제와 절대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예수를 따르는 길은 자발적 가난의 실천이며,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돈과 물질의 정의’가 선행되는 유물론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우리는 돈과 물질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거나 그에 집착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가치, 영적인 가치에 우리의 삶과 사회적 정열을 더 많이 할애하기 위해서, 돈과 물질의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

 

김규항은 <예수전>에서 드러나는 여러 표현을 볼 때, 근대를 중세의 암흑을 넘어선 정신적인 진보로 규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는 또한 개신교의 뿌리가 된 칼뱅의 자본가 정신을 비판한다. 그는 개신교의 프로테스탄트적인 자본주의 정신과 근대 사회의 정신적 진보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체제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자본주의적 욕망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요컨대 그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결국 근대의 쌍생아임을 인식하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말하는 ‘특별한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나눔의 체제’라는 추상적인 표현을 반복할 뿐이다. 그래서 <예수전>은 많은 부분 엇비슷한 도덕적 주장이 반복되는 윤리 교과서로 읽힐 위험성을 안고 있다.

 

예수가 ‘구름 타고 영광에 싸여 돌아오는 날, 다시 만나자’는 복음적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면, 예수가 ‘지금 여기’에서 어떤 삶을 그리고자 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 점에서 <녹색평론> 98호(2008년 1-2월호)에 실린 <갈릴리의 농민과 예수>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글쓴이 박경미 교수는 R.호슬리가 일구어 낸 AD 1세기경 갈릴리 지방의 사회 경제 체제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예수의 ‘하늘나라 운동’은 갈릴리 농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을공동체를 복원케 하려는 운동이었다고 말한다. 즉, 예수는 로마 제국과 그 하수인들, 성전 지배체제의 3중 수탈로 괴멸되어가던 갈릴리 지역의 마을 공동체에서 모세의 사회계약을 ‘오래된 미래’로 삼고 거기에 기대어 ‘빚을 탕감하고, 서로의 근심과 기본적 필요를 들어주는’ 상호 부조의 삶을 복원하려 했던 것이다.

 

마가복음에도 나오지만, 예수는 모세의 가르침을 빌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수탈로 이용되던 이혼 제도를 반대하고, 성전 봉양을 핑계로 부모에 대한 공경을 내팽개치는 습속을 비판한다. 그리고, 죄인들까지 포함해서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던 예수의 밥상공동체 운동, 병자들에 대한 치유,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는 갈릴리 지역의 전통적 공동체의 삶과 민중적 삶의 지혜를 부활시키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예수의 가르침은 철저히 농민의 삶에 바탕해 있다. 겨자씨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포도주와 누룩의 비유, 양과 목자의 비유 모두가 그렇다. 예수는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토착 아람어로 말했다. 요컨대, 예수는 농민들이 서로 돕는 공동체를 복원하고자 했고, 그것이 바로 예수가 ‘지금 여기’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하늘나라 운동이었다. 이 정신이 바로 오늘날 예수를 좇는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할 정신이며, 김규항이 말하는 ‘나눔의 체제’의 바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예수

 

김규항의 <예수전>을 읽으며 오늘날의 예수를 생각하게 된다. 권정생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한다면 분명 십자가 대신 똥짐을 지는 농부가 될 것이다. 거기에 저 1970년 평화시장의 전태일이 겹쳐진다. 2007년 한미 FTA 최종협상장 앞에서 제 몸에 불을 지른 택시노동자 허세욱이 떠오른다. 2009년 1월 예수는 분명 용산에서 불에 타 숨진 이들의 가족과 함께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 것이다. 이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가 있기를….

 

그러나, 지금 이 땅, 예수가 떠나고 없는, 아니 예수가 아예 발걸음조차 한 적 없었을 저 거대한 성전의 휘장 아래 ‘믿셥네다’를 외치는 군중들 앞에는 내 재산과 내 명예와 내 욕망을 지켜주시는 건장한 ‘세콤 예수’가 진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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