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술

[스크랩] 나쁜 조건들을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정진의 계기로 삼아라

거울닦는 달팽이 2011. 4. 1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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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금언

 

자신에 대해 적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확장해 나아가라.

악이 온 우주(유정계와 무정계)를 가득 채우고 있더라도,

그 나쁜 조건들을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정진의 계기로 삼아라.

 

하루를 보내면서 항상 이 말을 상기하며 살아가라.

얻는 것은 환상이지만 잃는 것은 눈을 뜨고 밝아지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 다른 사람에게 패배하고 살 것이며

나의 모든 승리와 얻은 것을 그들에게 줄 것이라고.


이것은 불교의 연금술이다.

모든 악(惡)은 깨달음의 길로, 부처가 되는 길로 변형시킬 수 있다.

악이 그대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대가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독약이 그대의 적이 아니라,

단지 그대가 어떻게 해야 독약을 약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모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현명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독은 약이 된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약이 독이 된다.

모든 것은 그대에게 달려있고, 그대가 처신하기 나름이다.


악(evil)이란 단어에 대해 검토해 본적이 있는가?

악을 거꾸로 읽으면 그것은 생명(live)이 된다. 악은 생명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대가 악이라는 글자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있다.


나쁜 조건을 보디치타, 즉 부처의 마음 혹은 무심을 얻는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길로 변화시키라는 이 금언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한데, 예수는 이 말을 불교의 경전에서 가져와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는 인도를 여행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전도를 시작하기 전에는 인도에서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성경 속에 예수의 생애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 까닭이다.

오직 한번 언급된 것은 예수가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사원에 갔다가

거기에 있는 랍비들과 논쟁을 벌였다는 것뿐이다.

그때 예수의 나이는 대략 12살이었음이 틀림없다.

그 이후로 그의 행적은 전혀 성경 속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문득 18년 동안 이스라엘로부터 사라졌다가, 예수는 30살이 되어서 갑자기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33살에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예수가 복음을 전한 기간은 겨우 3년밖에 되지 않는다.


예수는 18년이란 긴 세월동안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왜 성경에는 그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는가?


아직도 티벳에는 예수의 잃어버린 18년을 설명해주는 예수와 관련된 문헌들이 남아있다.

그는 동양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유태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 이유들 중 한 가지는

그가 이질적이고 낯선 동양의 것을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져갔기 때문인 것이다.

비록 예수가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말을 인용하기는 했지만,

예수는 구약에 나오는 구절들을 그때까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의미로 그 뜻을 해석했던 것이다.

예수는 유대사회에 이질적인 것을 들여왔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바로 이 언급,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은 아주 반 유대적인 것이다. 유태인의 신은 악에 대해 아주 반대한다.

악을 너무나 증오하기에

유태인들의 신이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 전체를 멸망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그 신은 그 도시들이 악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들을 멸망시켰다.

거기에 살던 선한 사람들도 함께 멸망했다.

선한 사람도 있었지만,

악한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선한 사람들까지 멸망시킨 것이다.


유태인들의 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주 질투심이 많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내게 순종하지 않으면, 나는 너희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 신은 아주 독재적인, 군림하는 신이다.

구약에 의하면 악은 반드시 ‘눈에는 눈’ 이라는 식으로 벌을 받아야만 하게끔 되어있다.


예수는 거듭 거듭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이렇게 들어 왔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대를 향해 돌멩이를 던진다면, 그를 향해 더 큰 돌이나 바위를 던지라고,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누군가가 그대의 뺨을 때리거든 다른 뺨도 역시 내어주라.”


이 말은 유태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전혀 생소하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불교 쪽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전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한 불교사상인 것이다.


악을 그대의 가슴 속에 받아들여 그것을 변형시키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악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악에 저항한다면 어떻게 그 악을 변형시킬 수 있겠는가?

악을 감내하라.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원수를 사랑하라.”

유대인의 신도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데, 왜 사람이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신조차도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대가 가련한 사람에게 원수를 사랑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그대자신을 사랑하듯, 그대의 원수도 사랑하라.”

유대인들이 그때까지 알지 못하던 예수가 사용한 이 말은 그 근원이 다른 곳에서 온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접근방식이며,

붓다가 이 세상에 이바지한 것 가운데 진정으로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면의 연금술이기 때문이다.

악을 감내하라. 악에 저항하지 말라. 악과 어울려 싸우지도 말고, 그것에 대해 화를 내지도 말라.

그 대신 악을 흡수하라. 왜냐하면 악은 선으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아픔과 악을 좋은 쪽으로 변형하는 예술은

서로 반대되는 것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예술이다.

빛은 오직 어둠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어둠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어둠 없이는 빛이 있을 수 없기에, 빛만을 사랑하고 어둠을 미워하는 사람은 모순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생명은 죽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음이 싫을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 존재하는 영역을 창출해내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대한 통찰이다.

죽음은 삶과 대조를 이루어, 삶이 흰 백묵의 글씨로 검은 흑판 위에 쓰일 수 있도록 배경이 되어준다.

삶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게 해주는 어둠이 죽음이다.

밤하늘의 어둠이 사라지면 별들도 사라져버린다.

낮에는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별들이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빛이 너무 밝아서 그대는 별들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별들은 어두움과 대조될 때만 빛난다.

오직 죄인이 있을 때라야만 성인(聖人)도 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붓다는 죄인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성인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가능하게 했다.

성인과 죄인은 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선에 집착하지도 않고 악을 멀리하지도 않게 된다.

선과 악을 삶의 일부로, 한 꾸러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수용을 통해서만 그대는 대상들을 변형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고통을 변형시키려면 먼저 그대는 지켜보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세 번째 요점이다.

첫 번째는 악에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반대되는 것은 반대의 것이 아니라 불가분하게 함께 꾸러미로 묶여서 상호 보완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선택도 있을 수 없다. 선택함이 없이 평정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 번째는 지켜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을 지켜보는 자가 될 때에만 그대가 그 고통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그 고통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대는 그 고통을 흡수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대가 버리고자 하는, 그대가 제거하고자 하는,

그대의 고통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면 그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하지만 그대가 지켜보는 자가 되면, 고통은 그대를 찌를 모든 가시를 잃어버린다.

그때 고통은 거기에 있고, 그대는 그 고통을 지켜보는 자가 된다.

그대는 하나의 거울이 되어 그 고통을 지켜볼 뿐,

그 고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된다.


행복은 오고가는 것이며 불행도 오고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대는 단지 거기 있어 거울로서 그런 일들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삶도 오고 가고 죽음도 오고가지만 거울은 그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거울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그 자신은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남는다.

거울은 어느 상황에도 물들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대가 지켜볼 때, 큰 간격이 생겨난다.

그리고 오직 그 지켜봄 속에서만 속된 금속을 금으로 바꿀 수 있게 된다.

오직 그 지켜봄 속에서만 그대는 내면의 과학자가 되어 무심히 관찰하는 관찰자가 될 수 있다.

이제 그대는 반대되는 것이 반대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므로,

그 반대되는 것들을 서로 뒤바꿀 수가 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악을 소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독을 감로수로 변화시키듯 악을 뭔가 유익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푸른글님의 번역을 가져왔습니다-

출처 : 레이키힐링
글쓴이 : Gang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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