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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키스>를 보면서...

거울닦는 달팽이 2009. 2. 1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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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의 온라인 상의 대화 중에 나온 구스타프 클림트에 관한 얘기..그리고 우리의 사랑 얘기..

클림트의 <키스>라는 작품이 생각나서, 검색하다 찾은 글이다..

 

이 블로그의 주인은 학부 시절 존경하던 교수님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라 한다.

<사랑>에 대한 이 그림의 철학적 해석이 맘에 들어 퍼 놓는다..

 

 

 

 

 

 

남성과 여성이 키스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키스하고 있다고 내가 상상하는 것이다.

둘은 사실 그 상태로 정지되어 있다. '성관계는 없다'라는 라캉의 말을 이 그림은 교묘히 숨기고 있다.

키스라는 제목과 여인의 신비하고 황홀한 모습, 야수와도 같은 남성의 목근육은 나로 하여금 그림 속에서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도록 이데올로기화한다.

마치 하나 된 사랑의 환희인 것처럼, 남성과 여성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처럼...

상상계적 장치는 색과 형태 그리고 둘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남성은 금빛 망토로 여인을 감싼다. 둘은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가 현실화되는 듯하다. 하지만 남성은 여성을 자신의 색으로 환원, 규정하고 있다. 얼핏 보면 네모의 도형과 원의 이미지, 검은 색과 화려한 색의 대비, 그리고 어렴풋이 보이는 여인의 윤곽이 둘의 타자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인은 정확히 남성 안에 존재하고 그 안에서 녹아 스며들고 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만나지 못했다. 만남이기 위해선 타자성과 동일성의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성은 남성의 금빛 권력 안에 묻혀있다. 그러기에 그녀가 아닌 그가 고독하다

그리고 시간 속에 존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남성은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타자성, 즉 단순히 다름이나 차이가 아닌 주체에 의해 규정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그녀의 고유한 특성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은 레비나스와 그런 나의 시각에 정확히 저항한다. 그녀는 남성에 의해 단순히 규정된 존재가 아니다. 그는 규정하였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 규정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타자 안에 매몰되는 것, 자기긍정의 세계를 벗어나 완벽한 자기부정을 통한 타자중심주의 그리고 그것을 통한 새로운 자아의 확인은 그녀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었기에 그 안에 스스로 용해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죽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그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동시에 절벽을 향해 이미 자신의 다리를 건네주고 있다.

 

남성은 억압이고 권력이다. 그래서 남성은 욕망이다. 여성을 감싸고 있는 금색의 전체적 실루엣을 보라. 그것은 거대한 남근이다. 남성과 여성, 절벽 그리고 꽃밭은 억압된 욕망, 즉 발기된 남근이다. 이 압축과 전치를 통해 꿈의 검열이 일어나고 그 검열 뒤에서 남성은 자신의 적나라한 정액을 여성에게 발산하려 하고 있다. 욕망은 소유하길 원하고 대상을 착취할수록 증폭된다. 쾌락은 고통으로, 고통은 죽음으로...

그런데 새디스트적 자아도취에 빠진 남성은 여성의 얼굴에 나타난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절벽으로 밀고 있다.  환희가 그녀만의 쥬이상스임을 간과하고 있다. 그는 그녀도 남근을 향하리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라는 소타자를 향해간다.

하지만 그녀의 쾌락은 신비이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보여 질 필요성이 있다.

남성의 얼굴은 불필요하다. 이미 남근이 그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클림트의 키스는 그래서 '제2의 기호학적 체계'이다.

그것은 왜 모든 낭만적 사랑에 관한 영화나 소설이 키스이후의 것을 보여주지 않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없기 때문이다.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이상적 자아에 도취된 상상계적 환상에 불과하다.
여기에 절벽의 마지막 의미가 숨어있다. 반복된 욕망의 추구와 해소 그리고 엇갈림은 동일한 흔적을 나의 무의식에 남긴다. 자극 그리고 그리움, 원래상태에 대한 그리움, 시지포스와 같은 무의미한 반복이 가져다주는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근원적 욕망은 해리로 하여금 킬리만자로의 봉우리로 가라고 말한다.

실재계로 향하기 위해 '쾌락원칙을 넘어서' 가야한다.

 

이런 관점에서 키스는 영원한 휴식에의 그리움이며 자살에의 욕망이다.

죽음 같은 사랑이든 불같은 욕망이든 둘은 쉬기를 원한다. 주체는 타자이고 욕망은 환유이다. 상상계적 자아든 상징계적 주체이든 나는 나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너는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나도 너에게 그러하다. 욕망도 사랑도 그리고 만남에의 그리움도 엇갈린 흔적만을 남기고, 영혼은 지쳐버린 채 이제 안식하고 싶다.

그래도 난 상징계안에서 실재계를 보고 싶다.

그래서 키스를 프로이드나 라캉의 눈으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킬리만자로의 봉우리 기슭에 죽어있는 표범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실존적 자살이어야 한다. 물론 실존적 자살은 실존주의적 자살이 아니다.

진리는 이론으로 가두어둘 수 없다. 그것은 공간이동이 없는 분리이며 갈라짐이 없는 이질화이다. 키엘케골이 말한 질적 도약도 어렴풋이 그 의미를 느끼게 해 줄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지금 안에서 언젠가 존재론적 단절을 이룰 때 나는 기표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그 너머의 순수한 기의를 발견할 수 있다. 타자가 누군지 몰랐던 '독일인의 사랑'처럼, 자아가 공이며, 자아와 타자의 구분도 공임을 깨달았던 한 인간처럼, 그리고 사랑이란 죽음 안에서 신비를 체험했을 그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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