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행복은 어떻게 생기나?- <깨어나십시오>중에서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 )

거울닦는 달팽이 2009. 1. 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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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로 돌아오십시오. 
자신을 관찰하십시오. 
그래서 앞에 나는 자기 관찰이란 즐겁고 비범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러분은 어떤 노력도 필요가 없게 됩니다. 
환상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알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행복이라 부릅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여러분은 깨달음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 말합니다. 
"지혜에 관해서 한 말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의 삶을 인도할 말씀을 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날은 스승의 침묵일이고 그래서 그는 종이를 가져다 되받아 적어 보입니다. 
"깨달음." 
제자가 보고는 말합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좀 덧붙여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종이를 되받아 적습니다.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 
제자가 말합니다. 
"예. 그런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스승은 종이를 받아 또 씁니다.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이란 깨달음을 뜻한다." 

그것이 곧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걸 어떻게 하는지 보여 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기법을 전하는 것이 되고 조종하는 것이 될 테니까. 
그렇지만 자신을 살피십시오.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그걸 깨달았습니까, 
아니면 그와 동일화했습니까? 
누군가에게 화를 냈을 때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습니까, 
아니면 단지 그 분노와 동일화했습니까?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체험을 연구하고 이해하려고 해 보았습니까?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는지? 

나는 깨달음에 이르는 어떤 다른 길도 모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는 것만 변화시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깨닫고 있지 않은 것은 억압합니다. 그 때는 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때 그것이 변합니다. 

나는 더러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이 깨달음의 성장은 점진적인 일이냐, 아니면 별안간의 일이냐?" 
순간적으로 깨닫는 행운아들도 있습니다. 문득 깨닫죠. 

천천히, 점증적으로 계속 깨달음에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물을 보기 시작하죠. 
환상이 사라지고 백일몽의 껍질이 벗겨지며 사실들을 접하기 시작하죠. 
일반 법칙이란 없습니다. 

양떼에게 다가갔다가 
놀랍게도 양떼 속에서 한 사자를 발견한 
사자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양떼 속의 그 사자는 
새끼 때부터 양처럼 울고 양처럼 거닐며 양들에 의해 길러졌습니다. 
사자가 그 양-사자에게로 곧장 가서 정면에 서자 양-사자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니다. 
"양들 속에서 무얼 하는 거냐?" 
"나는 양예요." 
"오, 아니야. 넌 아니야. 나와 함께 가자." 
사자는 그를 데리고 연못으로 갔습니다. 
"봐라!"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자 양-사자는 목청껏 포효했고 그 순간 변했습니다. 
다시는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운이 좋아 신들이 자비를 베푼다면 또는 신의 은총을 받았다면 
(신학적인 표현은 원하는 대로 쓰십시오) 
여러분은 "나"가 누구인지 갑자기 깨닫고 다시는 전과 같지 않게 됩니다. 
다시는 어떠한 것도 여러분의 기분을 움직이지 못하고 
아무도 다시는 여러분에게 상처를 줄 수 없는 겁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비범한 일 아네요? 
왕처럼, 여왕처럼 살게 되죠. 그야말로 왕과 같은 존엄을 지니고 살죠. 
신문에 사진이나 실리고 많은 돈을 버는 것처럼 시시한 일 아닙니다. 그런 건 너절한 일들이죠. 
자기가 아무도 아니라는 것에,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성공이나 실패에 마음 졸이지 않아요. 그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죠. 
명예나 불명예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바보짓을 해서 웃음거리가 되어도 역시 아무것도 아니죠. 
멋지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이 목표에 
힘들게 여러 달이나 여러 주간 자기 인식을 통해 단계적으로 도달합니다. 

그러나 약속하죠. 
깨달음을 위해 여러 주간 시간을 투자하고도 차이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삶의 질이 변하고 그래서 더 이상 신앙에 의지할 것도 없게 됩니다. 
그 변화가 보이는 것이고 사람이 다른 겁니다. 
달리 반응하는 겁니다. 
사실은 덜 반응(react)하고 더 행동(act)하는 거죠. 
전에는 본 적이 없는 것들이 보이는 거죠. 


훨씬 더 원기왕성해지고 훨씬 더 생기있어집니다. 
흔히들 욕망이 없다면 죽은 나무토막 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성공에 대한 긴장들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될 것입니다. 
긴장을 푸십시오. 
브레이크를 건 채 운전을 하고 있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일어날 일입니다. 

내가 외우기에 애를 먹은, 위대한 중국인 현자 트랑크수의 절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궁사가 상을 바라지 않고 활을 쏠 때는 자기 궁술을 다 발휘한다. 
동상을 받기 위해 쏠 때는 이미 흥분한다. 
금상으로 받기 위해 쏠 때는 눈이 흐려져 목표가 둘로 보이고 제 정신이 아니다. 
그의 궁술은 변하지 않았으나 상이 그를 갈라 놓은 것이다. 염려하는 것이다! 
쏘기보다 이기기를 더 생각하고 이길 필요가 힘을 빼어 놓는 것이다." 
그게 사람들 대부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고 살고 있을 때, 모든 실력, 온 힘을 얻는 것이고 
긴장이 풀리고 염려하지 않으며, 이기든 지든 문제삼지 않는 겁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에서만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 속에서 명예란 별것 아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회적 인습, 그뿐이죠. 
그래서 신비가들과 예언자들은 그런 것에 조금도 마음 쓰지 않았죠. 
명예나 치욕이나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죠. 
그들은 딴 세상에, 깨달은 사람들의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성공이나 실패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나도 바보 너도 바보인 것을,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는 태도였던 겁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말했죠. 
"인간에게 가장 힘든 세 가지 일은 물질적 위업이나 정신적 성취가 아니라, 
첫째로 미움을 사랑으로 갚는 일, 
둘째로 쫓겨난 이들을 받아들이는 일, 
셋째로 자기가 잘못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내것"들과 동일화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내가 틀렸어! 네가 날 더 잘 안다면 얼마나 자주 내가 그릇된지 알겠지. 바보에게 무얼 기대해?" 
그런 말을 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내 안에 있는 이런 측면들과 동일화하지 않았다면 네가 나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는 겁니다
처음에는 구태의연한 조건화가 들쑤시고 우울해지며 불안할 겁니다. 탄식하고 울기도 할 겁니다. 
"깨치기 전에 우울하더니 깨친 후에도 계속 우울하구나."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우울과 동일화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게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아십니까? 

자신에게서 나와 그 우울을 바라보며 동일화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사라지도록 무얼 하지 않고, 그것이 거쳐가며 사라지는 동안 자신의 삶을 마냥 기꺼이 살아 가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면 사실 아직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이죠. 
그럼 불안은? 
불안이 와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불안하나 근심하지 않는 겁니다. 

역설이 아닐까? 
구름이 몰려오도록 기꺼이 내버려 두는 겁니다. 싸울수록 그것에 더 힘을 부여할 테니까. 기꺼이 마치 그것이 그냥 지나치는 것인 양 관찰하는 겁니다. 
불안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겁니다. 
미친 짓이 아닐까?

우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그릇된 관념에 빠지지는 않는 겁니다. 
전에는 행복이란 흥분된 감동이나 짜릿한 기분이라고 생각지 않았던가? 
그게 바로 우울을 가져오는 원인이죠. 누군가 그걸 말해 준 게 아니던가? 

짜릿한 감동. 좋지. 
그러나 바로 다음 차례 우울로 가는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겁니다. 
짜릿한 감동을 느끼지만 그 뒤의 불안을 맞아들이는 겁니다. 어떻게 이 행복을 지속할 수 있을까?

그건 행복이 아닙니다. 
중독이죠. 

세상 사람들 중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평균적인 사람들이라면 별로 없을 겁니다. 매우 드물겠죠.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자를 은근히 멸시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여러분도 바로 그들만큼 중독되어 있을 겁니다. 

내가 이 새 세상을 처음으로 언뜻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은 무섭도록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이 홀로 된다는 것, 
누군가를 자유롭게 떠나 보내고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 
아무도 편애하지 않고 누구나를 -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 - 사랑한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를 이해한 겁니다. 
그것은 선인과 악인을 똑같이 비추고 성인이나 죄인에게나 똑같이 비가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장미가 
"착한 사람들에게는 향기를 풍기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 말할 수 있어요? 
전등이 
"이 방의 착한 사람들에게는 빛을 비추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고 말할 수 있어요? 
혹은 나무가 
"내 아래에서 쉬는 착한 사람들에게는 그늘을 주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런 것이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랑은 우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처음부터 죽 성서 안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거기에 시선을 준 적이 없는 것은 우리 문화가 연가와 연시들을 통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과 반대됩니다. 
욕망이고 통제이며 소유이죠. 
속임수이고 두려움이며 불안이지 사랑이 아니죠. 
행복이란 부드러운 얼굴빛, 휴일의 휴양지라나요? 그런 것들이 행복은 아니건만 
우리는 행복을 우리 안팎의 다른 것들에 매어 놓는 교묘한 방법들을 가졌습니다. 
"나는 내 노이로제가 끝날 때까지는 행복해지기를 거부한다"고요?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죠. 
여러분은 바로 지금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노이로제를 지닌 채로. 


더 기쁜 소식을 원합니까? 
인도에서 "아난드"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데는 오로지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을, 지복을 체험하지 못하는 데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어요. 
갖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 또는 집착이 그겁니다. 
그렇지만 않다면 여러분은 지복을 체험하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갖지 않은 것에 연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여러분은 지복에 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는 문외한들, 굶주리는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일상적인 지혜를 들려주고 계셨습니다. 
복된 소식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받아들일 몫이라고. 
그러나 누가 들어요? 
아무도 흥미가 없죠.
차라리 잠들어 있고 싶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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