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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밑줄 긋기

거울닦는 달팽이 2010. 2. 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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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녹색평론사

 

 

나는 본질적으로 산업사회의 산물이었고, 모든 문화가 자신의 영속화를 위해 사용하는 눈가리개를 쓴 채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나의 가치관, 역사에 대한 이해, 사고 패턴은 모두 '산업인간'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었다.

 

산업 단일문화의 확산은 다차원적인 비극이다. 한 문화가 파괴될 때마다 여러 세기 동안 누적된 지식이 말살되고, 다양한 인종집단들이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낌에 따라 거의 불가피하게 갈등과 사회붕괴가 뒤따른다.

 

서구 사회의 지배적 사고는 오랫동안 우리가 본래 공격적이며, 다윈주의적 투쟁에 영원히 같혀 있다고 가정해왔다. 기술 발전을 진화의 한부분으로 생각, 진화와 산업혁명이 초래한 변화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서구인들이 전통적인 민족들보다 더욱 고도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라다크는 이 관점이, 파괴의 잠재력을 크게 증가시키면서 탐욕과 경쟁과 공격성을 심화시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우리의 파괴력의 규모와 속도가 이렇게 컸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라다크에서 나는 진보로 인하여 사람이 땅에서, 서로서로에게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보았다. 원래 행복했던 사람이 서구적 규범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평온함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 결과 나는 문화가 개인을 형성하는 데 내가 일찍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근복적인 역할을 한다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었다.

.......

 

제한된 자원을 조심스럽게 쓰는 것은 인색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이 검약의 본래의 뜻, 즉 작은 것에서 더 많이 얻어내는 일이다.

 

라다크 인들은 짐승을 죽이는 일은 가볍게 여겨지지 않고, 반드시 용서를 빌고 많은 기도를 올린 후에야 한다.

 

<라다크인들의 기도>

내가 타고 짐을 싣는 짐승들,

나를 위해 죽임을 당한 짐승들,

내가 고기를 먹은 모든 짐승들,

그들이 빨리 부처가 되기를.

...

 

부엌은 집의 심장이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지만 자기들의 속도로 웃음과 노래를 곁들이며 한다. 일과 놀이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놀랍게도 라다크 사람들이 실제로 일을 하는 것은 일년에 4개월뿐이다.

 

<식품과 영양에 관한 저자의 생각>

첫째로, 우리가 점차로 깨닫고 있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영양이라는 것은 없으며, 오히려 영양은 운동이나 스트레스 같은 다양한 요인들에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사람들에게 어떤 영양이 필요한가 하는 것은, 상당한 정도로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에 따라 진화해 왔기 때문에, 신체의 요구는 그 땅이 제공할 수 있는 것과 일치하게 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에스키모 인들이 사실상 아무런 곡물섭취없이 생선과 고기만으로 건강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라다크 사람들은 보리와 낙농제품을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균형은 불교의 가르침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 한 승려는 "새가 날 수 있으려면 두 날개가 균형을 유지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혜가 자비심과 함께 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여성은 지혜를 상징하고 남성은 자비심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함께 종교적 본질을 이룬다.

 

서구문화는 보다 넓고 장기적인 관점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전문화되고 당장 눈앞이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경제는 갈수록 커지는 전문화와 중앙 집중화 그리고 자본 및 에너지의 집약적 생활양식으로  세계를 빠르게  끌어가고 있다.

 

여기 라다크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신기루이며, 구름의 성,

꿈이요, 환영인 줄을,

본질은 없고, 보이는 성질만 가지고 있는 것,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달이 호수로 옮겨간 일이 없는데도

밝은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비친 것고 같음을,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메아리는 음악에서 소리와 흐느낌을

얻어 지니지만 그러나

메아리 속에는 멜로디가 없다.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마술사가 말과 황소와 수레와 또 다른 것들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는 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사마디라자수트라

 

불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도 않고, 어떤 식으로든 염세주의를 장려하지도 않는다. 그 반대로 불교는 우리가 일단 우주의 본성을 이해하면, 바깥의 일들의 덧없는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한 행복을 깨달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무지는 감각과 개념화를 통한 세계너머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이런 '무지한 방법으로 보기를 고집하는 한, 우리는 삼사라. 즉 존재의 바퀴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불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세상의 '존재'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

문제는 무엇에 중점을 두는가이다. 우리의 감각이 인지하는 세계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관점으로 보라는 것이다.

"존재를 믿는 사람은 소처럼 어리석다. 그러나 비존재를 믿는 사람은 더 어리석다. 사물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 둘 다도 아니고, 둘 다가 아닌 것도  아니다." - 나가르쥬나

 

"모든 것이 연기의 법칙하에 있습니다. 나가르쥬나가 말했듯이,'관계를 통한 근원은 부처의 풍요롭고 심오한 보배입니다.'

 

"자아'는 궁극적으로 우주 속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시는 자주 지식과 이해는 그것 자체로 충분치 않음을 내게 상기시키곤 했다. 사실 그것들은 자비심과 함께가 아니면 위험할 수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달라이 라마는 그의 진정한 종교는 친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항상 다른 이들에 대한 염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자비심이 이른바 깨달음의 방법이 된다. 시인이자 현자였던 밀라레파는 "공의 개념에서 자비심이 나온다"고 말했다. 개별적 존재의 경계가 사라져버리면 너와 나는 절대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한 몸의 다른 면일뿐이다.

 

"무지가 있는 한 의식이 필요합니다."라고 스타크나 승원의 우두머리 라마승이 나에게 말한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수준의 영적 발달에 도달하고 나면 버려도 되는 사다리 같은 것입니다."

 

삶에 대한 -그리고 죽음에 대한-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무상함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와 그에 따른 집착의 부재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물이 어떠해야 된다는 생각에 매달리기 보다 그들은 복되게도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추수를 하는 중에 눈이나 비가 와 다 망쳐버려도, 흔히 자신들의 환경에 대해 농담을 하며, 전혀 심란스러워하지 않는다. )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직접 참여하지 않은 일은 무엇이든 그들의 지식이 제한된 것임을 나타내는 동사를 사용하여 묘사한다. "그렇다고 합니다.."그런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컸어요..등등..

좋은 것과 나쁜 것, 직접 경험을 한 경우에도 그들은 우리처럼 분류하고 판단하려고 하지 않는다.  빠른 것, 느린 것, 이곳과 저곳이 현저하게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컨데 정신과 육체, 이성과 직관을 근본적인 대립의 관계로 보지 않는다, 라다크 사람들은 세계를 그들이 '셈바'라고 부르는 것- 번역하자면 '마음'과 '가슴'의 중간-을 통해 경험한다. 이것은 지혜와 자비심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단 말입니까? -체링 돌마

 

라다크 사람들은 확장된, 포괄럭인 자야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우리처럼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기 보호막을 쳐놓고 그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가 자부심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존심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의 자존심은 의문의 여지없이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하인 취급 받던 남자의 이야기..그 나이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대범했기 때문에 자신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나는 라다크사람처럼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안정된 사람들을 만난 일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살아있는 맥락을 의식하고 있다. 별들과  해와 달의 움직임은 그들 나날의 활동에 영향을 주는 친숙한 리듬이다.

 

라다크 사람들의  보다 큰 자아의 개념은 사람들 사이의 긴밀한 유대와 관계되어 있다. 그들은 많은 경험을 -슬픔과 기쁨을-공유해왔다. 그들은 삶의 중요한 전환기가 되는 의식들에서 서로를 지지해주며, 함께 일을 해 왔다. 건강한 사회란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의 그물을 제공하면서, 긴밀한 사회적 유대와 상호의존을 권장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틀 안에서 개인들은 아주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될 수 있을만큼 안정감을 느낀다. 역설적으로 라다크 사람들이 산업사회의 우리들보다 정서적으로 덜 의존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랑과 우정이 있지만, 그것은 격력하거나 구속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든 적응하는 능력, 상황에 상관없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대단한 장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라다크 친구들의 편안하고 대범한 태도를 이해하게 되었고, 내가 아무데도 가지 않은 것처럼 대해 주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라다크 사람들은 아무것에도 우리처럼 집착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레에 가면 좋지요. 그리고 가지 않아도 역시 좋습니다." 일 것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정말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다크 사람들은 일상의 음식보다 잔치를 더 좋아하고, 불편하기보다는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아프기보다는 건강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만족과 마음의 평화는 그런 외부의 상황에 좌우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내면으로부터 온다. 라다크 사람들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들 주위와의 관계는 내면의 평정과 만족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사람이 건강하고 따뜻하고 안락하고 배부르더라도, 그가 "무지"한 한 행복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만족감은 자신이 삶의 흐름의 일부임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긴장을 풀고 그 흐름과 함께 움직이는 데서 온다. 당신이 먼 길을 막 떠나려 하는데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비참한 기분이 될 게 뭐 있는가? 아마도 더 좋을 것은 없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그렇다고 해서 '불행할 게 뭐냐?" 이다.

..............

 

변화/서구의 도래

 

오만한 말을 타고

왕처럼 날으며

온갖 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자들,

새들도 날아다닌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는가?

 

    -타시 랍기아스, 여행자들에 화가 나서, 1980년

 

1975년 처음 도착했을때, 마을의 생활은 몇세기동안 그래왔던 대로 같은 기초에 근거하고 있었고, 그 자체의 원칙에 따라 그 자신의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지역은 자원부족과 험한 기후와 불편한 교통 덕분에 식민지주의와 개발로부터 보호 되어 이었다.

 

나는 라다크 말을 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대화가 초래하는 강렬한 심리적 압력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현대 세계를 어느 정도 라다크  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나는 또 서구 문화가 밖에서 보기에는 무한히 더 성공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관광객들) 라다크인들의 마음의 평화나 가족관계와 공동체의 관계의 질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라다크 사람들의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 부를 보지 못한다.

 

셰게의 농촌지역에 있는 수백만의 젊은이들에게 현대 서구문화는 자기들보다 훨씬 우월하게 보인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 그들처럼 밖에서만 보면 현대세계의 물질적인 면, 즉 서구문화의 뛰어난 면만이 보일 뿐이다. 그들은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면- 스트레스와 외로움,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을 쉽사리 볼 수 없다, 그들은 또 환경파괴, 인플레이션, 실업등도 보지 못한다,.

한편으로 자기들의 문화는 내부로부터 알고 있다 그 모든 한계와 불완전성을 포함해서.

 

전통문화에서 마을 사람들은 돈 없이 그들의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켰다

 

....

<2부>서구화가 진행된 라다크에 관한 내용

 

이제 갑자기 라다크 사람들은 국제적인 현금경제의 일부로서 멀리 있는 세력들에 의해 통제되는 체제에 -기본적 욕구 충족을 위해서도-더욱 의존적으로 되었다. 그들은 라다크가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다. 달러의 가치가 변하면 그것은 결국 인도의 루피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생존을 위해 돈이 필요한 라다크 사람들이 이제는 세계 경제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통제하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땅에서 생활 할 때는 그들은 스스로의 주인이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모든 욕구 충족을 위해 아주 다른 경제 체제에 의존적으로 되고 변덕스러운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예민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돈에 정신을 빼앗기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오늘 10루피가 있으면 보리 2킬로그램을 살 수 있는데, 내일이면 값이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모두들 너무 나 탐욕스러워져가요. 전에는 돈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돈 뿐이예요."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동등한 자격으로 친구로서 번갈아가며 서로 도우면서 일해왔다. 이제 추수기간에 임금 노동이 생겨나서,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될 수 있는대로 적게 주려고 하고 받는 사람은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받으려 한다. 관계는 변한다. 돈은 사람들 사이의 쐐기가 되어서 사람들을 자꾸만 서로에게서 더 멀리 밀어낸다.

 

전통적 경제에서 시간은 넉넉했고 오직 계절의 변화에 의해서만 제한을 받았다. 할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생활은 인간적인 속도로 진행되었고, 누구든지 인내심을 가질 여유가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현대 경제는 시간을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바꾸어 놓았고, 갑자기 시간은 물량화되고 잘디잔 조각으로 나누어졌다. 시간은 값비싼 물건이 되었고, 사람들이 새로운 "시간을 절약하는"기술을 갖게 됨에 따라 삶의 속도는 더 빨라졌을 뿐이다.

 

태도와 가치관에서의 근본적인 변화 즉,새로운 세계관- 인간에게 다른 생물들 위에 군림하는 막대한 힘을 부여하는 세계관이 라다크에 생겨난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라마승이었다. 현대화된 부문에서는 기술자가 그렇다.

라마승과 기술자의 세계관은 크게 다르나. 옛 믿음은 모든 생명의 하나됨이나 연기법을 강조하는 반면 새로운 과학적인 견해는 생명의 분리성을 강조한다. 라마승으로부터 기술자로의 이동은, 살아있는 모든 것과의 정적이며 자비로운 관계를 권장하는 윤리적인 가치로부터, 아무런 윤리적 토대가 없는 가치 중립의 '객관성"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나타낸다.

 

현대의 학교는 아이들은 생태적이 아닌 기술 중심적인 사회에서 전문가가 되도록 훈련을 받는다. 학교는 전통적인 기술을 잊어버리는 곳이고 더 나쁘게는 그것들을 경멸하는 곳이다 서구의 교육은 1970년대에 라다크의 여러 마을에 들어 왔다. 현대교육은 지역의 자원을 무시할 뿐 아니라 더욱 나쁘게는 라다크 아이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부심을 빼앗겼다. 학교의 모든 것은 서구의 모델을 장려하고, 그 직접적인 결과로 아이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든다.

 

"1974년 이전에는 라다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개화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충분했다.

한 아이가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래는 부끄러운 듯이 부르지만, 영어와 힌두어 노래는 아주 신이 나서 부른다...요즈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고유의 옷을 입지 않는 것을 본다. 아마 창피하게 행각하는 듯하다" 라고 썼다.

그렇게 하면서 교육은 라다크 사람들을 서로서로에게서, 그리고 땅으로부터 유리시켰고, 그들을 세계경제라는 사다리의 제일 아래칸에 자리잡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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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간디가 라다크에 갔더라면 그의 마음이 갈망한 거의 모든 것을 거기서 발견했을 것이다.

                                                   -M.L.A 곰페르츠 소령, <신비의 라다크>1928

 

사람들이 개발과정의 한가운데 서 있을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체적인 조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관계되어 있다, 현대화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문화적 붕괴의 또하나 중요한 요인은 현대 세계와의 접촉에서 비록하는 열등감이다.

사람들의 자존심과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흔들리기 전에는, 자기들이 문명화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전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

 

그러나 개발이 파괴를 의미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누려온 사회적, 생태적 균형을 희생하지 않고도 생활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그들은 일반적인 개방 방식처럼 그들 자신의 오래된 토대를 무너뜨릴 것이 아니라 그 토대 위에다 건설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라다크를 개발하려면 우리는 이 사람들이 더 탐욕스러워지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가 없다.- 라다크   개발관, 1981년

 

내가 처음 라다크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욕심이 없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개발 담당관이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저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그들의 여가나 즐거움을 희생시킬 생각이 없었다.

라다크에 개발이 처음 시작된지 16년쯤 되어서 나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간격이 커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자들이 자신감과 힘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았고, 실업과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고, 또 범죄가 극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가족과 공동체가 와해되는 것을 지켜 보았으면, 자급자족 대신에 외부세계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심화됨에 따라 사람들이 땅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현대화란, 지역적인 다양성과 독립성을, 하나의 단일문화와 경제체제로 대체하는 과정인 것이다.

자신의 식량, 의복, 주거를 스스로 마련할 수 있는 이 사람들에게는, 불안정한 현금수입을 위해 자신의 문화와 독립성을 버린다는 것은 삶의 질의 심각한 저하를 의미한다.

 

라다크와 인접한 히말아야의 부탄 왕국의 상황은 인간의 복지를 돈의 관점에서만 정의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인가를 생생하게 예시한다.

사람들은 자기네의 기본 욕구를 스스로 충족시키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미술과 음악을 즐기며, 가족, 친구, 여가 활동을 위한 시간을 실제로 서구인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 은행은 부탄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뉴욕 거리의 집없는 사람들과 부탄이나 라다크 농부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두 경우에 모두 소득은 없을지 모르지만, 통계 자료뒤에 있는 현실은 밤과 낮처럼 다르다.

먼 오지의 자급경제 속에서든, 산업세계의 중심에서든, GNP를 사회복지의 주 지표로 보는 체계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자기의 뜰에서 키운 감자를 먹는 것보다 나라의 다른 편에서 키워서 가루로 만들고 얼리고 말려서 만든 화려한 포테이토 과자를 사서 먹으면 경제를 위해 더 낫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소비는 물론 더 많은 운송, 더 많은 화석연료, 더 큰 오염, 더 많은 화학첨가물과 방부제 ,그리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더 큰 거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GNP의 증가를 의미하고, 그래서 장려된다.

경제전문가들과 개발전문가들이 널리 선호하는 이러한 일차원적인 진보관은 경제성장의 부정적인 영향등을 은폐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더욱이 그것은 지역에 기초를 둔 자급 경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다.

 

...

...

과학적 탐구가 쓸모가 없다거나 기술이 유용하게 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 두가지가 단기적인 이익과 편의주의라는 좁은 목표에 연결되어 있고,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부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개발, 현대화, 서구화 그리고 산업화라는 용어들은 대체로 동의어처럼 사용해왔다.

 

세계 전역에서 개발의 영향을 보아온 우리들은 모든 사람이 미국의 꿈을 실현하게 되리라는 신화를 어째서 영속시키고 있는가?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 대답은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의 이해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제 3세계의 엘리트들은 습관적으로 개발 자금을 착복하고, 산업국가들의 주 목표는 자기들의 전문성과 생산품에 대한 시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개발 계획자들은, 그들이 자연자원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한, 모든 사람이 뉴욕시민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한 견해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자연적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부의 재분배 필요성을 편리하게 피해간다.

급속히 악화하는 환경 문제와 제3세계의 부채 및 기아의 증가는  현재의 개발 모델에 무언가 잘못이 있음을 가리키는 지표로 보아야 한다.

 

대규모의 전례없는 경제 통제권이 강력한 다국적 기업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과, 세계 경제에서 제 3세계의 지위가 더욱 하락하는 것은 감추어진 채로 있다.

"하나의 시장"은 공동체와의 협력을 함축하고, '지구촌'은 관용과 상호 교류의 공간처럼 들린다. 경제적 통일과 기술적 획일화가 실제로 환경파괴와 공동체의 와해를 초래한다는 인식은 거의 없다. 오늘날의 경제는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조장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간격을 넓히고 있다. 우리는 경제적, 정치적 힘의 거대한 집중화를 향해 가고 있다. 정부들은 유럽 공동체나 세계은행 같은 초국적 기구에게 점점 더 많은 통제권을 넘겨주고, 책임을 이양하고 있다.

정부들은 갈수록 민중으로부터 멀어지고, 민중의 다양한 이해에 반응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더 많은 자원 착취와 더 많은 기술혁신, 더 큰 시장, 더 큰 이윤을 향한 무자비한 추진력이다. .금전적, 심리적 압력이 개도국이나 선진국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맹목적인 소비주의로 몰아붙이고 있다

좌우명은"인류의 향상을 위한 경제성장"이다. 광고와 대중매체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지를 일러주고 있다. 즉, 현대적이고 문명화된 부유한 사람이 되라고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제 3세계'의 농촌사람들은 현대적인 생활에 대해 특히 왜곡된 인상을 가지게 된다. 즉, 모든 사람이 아름답고, 모두가 깨끗한 , 편안함과 매력이 넘친 생활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개발은 '자동조종장치'로 움직이고 있다. 계획된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있지 않은 곳에서도 개발은 현대적인 삶에 대한 일차원적 이미지- 그 부작용과 오몀과 심리적 스트레스 와 약물 중독과 고향상실이 배제된 이미지에 의해 계속 진행된다. 사람들은 개발이라는 동전의 한쪽 면만을 보고, 쉽게 상처를 받으면서 현대화를 갈구한다.

 

이러한 순진함이 지적 능력의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산업문화에 대한 정보부족의 결과이다. 대중매체나 광고를 통해 실제로 그곳에 도달하는 유혹적인 이미지들은 유독성 쓰레기, 농토유실, 산성비, 지구 온난화 같은 것에 대한 경고를 동반하지 않고 있다.

 

또한 동시에 서구에는 제 3세게에 대한 원조와 개발의 실상을 알려주는 정보가 결핍되어 있다.

제 3세계의 농촌 공동체가 서구의 시장에 내다 팔 커피, 코코아, 쌀 등을 재배하기보다, 자급이나 지역 시장을 위해서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러한 수입 농산물을 구매함으로써 가난한 나라들을 가장 잘 돕는다고 믿는다.

경제적으로 독립적이고 ,그런 상태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공동체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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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개발

 

우리는 아직 하늘에 닿아보려고 한다. 선진국 사람들은 다시 내려오고 있다. "그 위는 텅비어 있어' 라고 말하면서.     

                              - 계롱 팔단 ,마을의 모임에서, 1990년

 

 

 

반개발은 새로운,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인간적인 진보의 개념을 증진하고 보급할 것이다. 세계도처에서 좀 더 지속 가능한 대안을 탐색하고 있는 수많은 지역운동을 부각시킬 것이다.

제 3세계의 많은 의식있는 사람들이 현대화의 어두운 면을 직접 보기 위해서 서구에서 살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삼년이 지나고 나서야 거죽 밑- 외로움과 불행, 부정의와 낭비를 보기 시작할 수 있다.환상은 하나씩 깨어지고, 그 과정에서 그는 그 자신의 문화가 서구라 잃어버린 많은 긍정적인  자질들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정부와 원조기관에 압력을 가할 수 있고, 자립을 위해 노력하는 풀뿌리 조직들을 후원할 수 있으며, 자역 문화가 파괴적인 변화에 저항하는 데 도움이 될 정보를 공급할 수 있다.

 

우리는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의 균형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이 오늘날 흔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현대화의 추진력은 전적으로 세계화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중도는 반드시 탈중심화를 포함할 것이다.

 

라다크 프로젝트

 

라다크는 그야말로 낙원이다. 그것이 파괴되다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 한 여행자, 1975년

 

서구에 대한 균형잡힌 인상을 갖는 것. '생태학'과 '태양에너지'라는 용어는 라타크 전역에서 지금 널리 사용되고 이해되고 있으며, 환경과 라다크의 장래의 복지를 의식적으로 우선 순위에 두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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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한편으로 광범위한 집단과 생각들로 이루어진 반주류의 흐름이, 모든 생명은 뗄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오래된 지혜를 되살려왔다.

 

녹색정당들의 결성과 환경단체들의 회원수의 증가는 환경보호에 대한 참여가 확산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체계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깊이 들어가보면, 인종적 폭력, 물과 공기의 오염, 가족의 와해, 문화적 해체 등 겉보기에는 관련이 없는 듯한 문제들이 긴밀히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 문제들의 접점을 발견한다면 그것들과 맞싸우려는 우리의 시도가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각 문제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 그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어떤 가닥을 잡아 당기면 되느냐의 문제로 된다.

 

산업사회라는 그물은 크게 과학, 기술, 그리고 편협한 경제적 패러다임의 상호작용- 갈수록 더 중앙집중화와 전문화로 나아가는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산업혁명 이래로 정치와 경제의 단위는 커진 반면에, 개인의 시각은 더욱 제한되었다. 나는 우리가 균형잡히고 건전한 사회로 가는 길을 발견하려면 우리의 정치적 , 경제적 구조를 탈중심화하고, 지식을 향한 우리의 접근 방식을 더 넓힐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끝없는 경제성장과 물질적인 번영이 정신적,사회적 빈곤, 심리적 불안정 그리고 문화적 생명력의 상실을 대가로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라다크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행복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더디게 배운 교훈이다.

그것은 삶 그 자체를 순수하고 구김없이 받아 들이는 일이었다. 라다크에서 나는 마음의 평화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타고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공동체와 땅과의 긴밀한 관계가 물질적인 부나 고급기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았다.

나는 삶의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화적 다양성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를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이국적인 문화를 우리의 소비를 위해 꾸러미로 만들어 이용하고 상업화하는 것도 아니다.

 

문화적 차이를 되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불필요한 무역을 줄이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일 것이다. 바로 지금도 우리 납세자들의 돈이 수송을 위한 하부구조를 확장하고, 무역을 위한 무역을 정지시키는 데 쓰이고 있다.

시장의 체계화를 향한 추세는 권력과 자원을 갈수록 소수의 손아귀에 집중시킬 뿐만 아니라, 도시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

 

대가족 속의 인간관계는 긴밀하지만 핵가족에서처럼 격렬하지는 않다. 각 개인은 긴밀한 관계의 그물에 의해 부양을 받고, 어느 하나의 관계가 지나치게 많은 무게를 감당하지 않는다.

라다크 사람들은 자아  이미지의 관점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기록한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기 회의가 전혀 없다는 것, 깊은 안정감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 안정감이 관용을 낳고, 저마다 차이가 있는 타인들을 받아 들이게 한다.

 

여성의 사고 패턴에 대한 연구는 여성적인 관점이, 감정의 면에서나 추상적 사고의 면에서나

관계와 연관성을 더 중시한다는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사회에서의 여성적인 것으로의 전환은 오래 지체되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논리를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다.

자연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론은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 경험을 통한 학습은 역설투성이이고 깔끔하지 못하고 변덕스러우며 우리의 기대를 뒤집는 혼란스러운 현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불가피하게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새로운 기술이 전체적 맥락 속에서 갖는 잠재적인 영향을 시간을 두고 검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파괴적인 부작용을 덜 발생시킬 것이다.

 

서구에서 우리는, 현실에서 한 단계 떨어진 채, 이미지들과 개념들에 의존하여 삶을 사는 경향이 있다.

(자연을 말하면서 플라스틱 꽃을...ㅠ.ㅠ )

 

생태적 마을을 (에코 빌리지)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스웨덴을 휩쓸고 있다.

그 모두가 재생 가능한 에너지와 쓰레기의 재활용에 기초를 두고있다 .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들과 가장 현대적인 문화 사이에놀라운 유사성이 나타나고 있다.

라다크 사람들이 항상 해왔던 것처럼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부엌을 가정의 중심으로 삼고, 자연적으로 기른 음식을 통째로 먹으며, 건강 문제에는 오래된 자연 치료법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지구 사이에 본래부터 존재해온 오래된 유대관계로 되돌아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핵가족에서 그토록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애착이나 죄책감과 거부감 같은 것을 라다크에서 본 일이 없다. 50년전만 하더라도 산업사회에서 가족은 오늘날보다 좀 더 건강하고 상호부양적인 것이었다.

 

우리의 주류문화는, 진보에 대한 선형적 관점, 즉 우리의 과거및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관점을 장려한다.

현대의 진언이라고 할 만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는 우리의 사고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돌아가고 싶어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올바른 미래를 찾는 우리의 노력은 불가피하게 자연- 인간본성을 포함하는 -과의 더 큰 조화를 이루는 어떤 근본적인 패턴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라다크 사람들이 결코 잊어본 일이 없는 사실-인간은 누구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아이들은 자신을 증명해보일 필요가 없고 자기 나름으로 존재할 권리를 애써 쟁취해야 할 필요가 없는 가족체계 안에서만 참으로 잘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다.

 

전세계를 통해 심리학에서 물리학에 이르지까지, 농사일에서 가정의 부엌에 이르기까지 삶의 온갖 영역에서 모든 생명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깨달음이 커지고 있다.

인간적인 규모의 삶과 보다 여성적이고 영성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라다크가 보여준 것처럼 그러한 추세는 중요한 의미에서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실상 수천년 동안 존재해왔던 가치- 자연질서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 우리 서로서로의 , 그리고 우리와 지구 사이의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알아보게 하는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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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이의 말>

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 (Roder,1992)- Helena Norberg-Hodge

 

스웨덴 출신 여성학자의 16년 간에 걸친 현지 체험에 기초를 둔 책

히말라야 고원에 자리 잡은 한 유서깊은 공동체애 대한 생생한 현장보고와 그 근대화 과정데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하여 오늘날 인류사회 전체가 직면한 사회적, 생태적 위기의 본질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이 분야의 고전적인 필독서.

 

1975년 처음 방문, '작은 티벳'으로 불리는 라다크는 비록 인도 영토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지만,

천년넘게 독자적인 언어와 티벳 불교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자급자족의 삶을 꾸려가던 공동체.

1975년은 인도중앙정부의 결정에 따라 외국 관광객에세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 이 책 저자도 이해에 그 지역을 찾아간 소수의 서구인 중의 한 사람.

 

이 책은 13만명의 인구를 가진 히말라야 고원의 한 작은 사회를 다루고 있지만,

그 사회의 분석을 통한 성찰과 메세지는 라다크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존의 바탕을 무분별하게 무너뜨리면서 그것을 오히려 진보와 발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오늘날,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살아가는 과학 기술의 시기의 인간의 교만심이 "진정한 미래는 오랜 옛 지혜 속에 있다' 라는 진리를 받아 들일 수 있을 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결과로서 닥쳐올 재앙을 예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996년 여름  김종철

 

 

 

 *라다크 /다음 백과사전

 

인도 대륙 북부 잠무카슈미르 주에 속하는 카슈미르 동부지역.
면적 약 11만 7,000㎢로 히말라야 산맥 서쪽의 라다크 산맥을 비롯해 카라코람 산맥과 인더스 강 상류 지역을 포함한다.
라다크는 세계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로 고원과 깊은 골짜기가 많다. 고원지대는 동쪽에 많이 몰려 있으며 서쪽으로 갈수록 적어진다. 남동부의 룹슈 지역, 곧 해발 4,100m 되는 지대에는 넓은 기수성(汽水性) 호수들이 몰려 있다. 룹슈 북서부 자스카르는 추위가 심해서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사람과 가축이 매년 상당기간 집안에서 지내야 할 정도로 추운 이 지역을 흐르는 자스카르 강은 북쪽으로 향하다가 레 시(市) 아래쪽 지점에서 인더스 강과 합류한다. 라다크 본토에서 더 북쪽으로 가면 해발 2,750~4,550m 지역에서 비료와 관개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민은 농사를 짓기 어려운 고원지대 골짜기에서 양을 치며 사는 사람들과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 주변 땅에서 농사를 짓는 라다크족으로 나누어진다. 라다크 본토에서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레 시는 상업 중심지로 스리나가르 동쪽 260㎞ 되는 곳에 있다.
라다크는 연중 맑은 날씨가 계속되지만 연평균강우량이 84㎜밖에 되지 않는 건조기후지역이다. 가느다란 눈발이 자주 내리지만 가끔 큰눈이 오기도 한다. 식물은 골짜기나 주변지형에 감싸인 곳에서만 자란다. 발육상태가 좋지 않은 위성류·가시금작화를 비롯한 식물이 땔감으로 이용되며 밀·보리·수수·메밀·완두콩·콩·순무 같은 농작물도 재배한다. 모직물이 유일한 제조업 제품으로 생산된다. 라다크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던 지역이었으나 1949년 맺은 휴전협정으로 남쪽은 인도, 북쪽은 파키스탄에 속하게 되었다. 1960년대초 인도가 지배하던 라다크 북동지역이 중국 군대에 점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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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말라야 그늘속에 있는 라다크는 커다란 산맥들이 이리저리 얽혀있는 고지대의 황무지이다. 최초의 미곳 주민은 북부 인도의 몬족과 길기트의 '다-드'라는 두 아리안족이었다. 그들은 초기에 (아마 기원전 500년경)티베트에서 온 더 큰 집단인 몽고 유목민과 합류했다. 현재 라다크인은 이 세 종족의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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